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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245화 (245/300)

[245화] 더욱 진한 웃음

스걱!

무언가가 검에 베이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빌리의 눈이 커짐과 동시에 뭔가 말하려는 듯이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빌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미 그의 목은 몸과 분리되어 있었고, 눈에 보이는 건 자신에게 다가오는 땅이 전부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엔 의문이 가득했지만,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순식간에 일기토의 승부가 정해졌다.

순식간에 결정난 승부에 지켜보던 모든 이들의 뇌가 순간 정지했을 정도였다.

약속이나 한 듯 전장에 침묵이 감돌았다.

반면 스탄다비아 군대는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무려 소드 익스퍼트 중급의 상대를 단 한 수로 죽여 버린 것이다.

그것도 기습을 한 상대를.

사람들의 얼굴이 흥분으로 빨갛게 상기되었고, 곧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아아아아아아아!”

“와하하하하하하하!”

“라우터! 라우터!”

“스탄다비아는 강하다!”

“자포리자! 자포리자!”

“이 새끼들아, 각오해라! 그동안 당한 설움을 돌려 주마!”

스탄다비아 군대의 사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그에 반해 무려 다섯 배나 규모가 큰 프라인과 아드리온 연합군의 사기는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깔보던 상대에게 두 번이나 당하자, 수치심과 함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제기랄!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야, 장난해? 최고의 용병단이라고 하더니. 이름도 모를 기사에게 목을 바치는 것들이 무슨 최고의 용병단이야! 그 많은 돈을 받았으면 돈값을 해야지! 영지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오히려 초를 치다니. 영지전이 끝나고 엄히 죄를 물을 것이다!”

천막에 앉아 햇빛을 피하던 게렉스가 한달음에 달려와 헤레이스에게 폭언을 내뱉었다.

처음 피닉스 용병단을 데리고 오자 했을 때, 패드래건은 반대했다.

안 그래도 사정이 좋지 않은데 비싼 비용을 내기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게렉스가 계속해서 밀어붙였고,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결정적으로 스탄다비아를 먹는 순간, 이 정도 비용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에 넘어가 버렸다.

그런 용병단이 자신의 얼굴에 똥칠을 하고 있었다.

처음 싸움에서 진 것은 이해할 만했다.

휴렉스가 계속해서 밀어붙였고, 마지막에 방심해서 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패드래건과 게렉스는 모두 기사가 아니라서 이 싸움에 숨겨진 진의는 파악하지 못했다.

첫 일기토에서 지고 나서 패드래건의 눈빛이 좀 따갑긴 했지만, 그도 특별한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번째 일기토에서 너무 쉽게 져 버리자 패드래건은 참지 못했다.

“아니, 게렉스 백작!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최고 수준의 용병단이라고 하더니, 검 한 번 섞어 보지 못하고 목이 달아나는 놈이 무슨 최고란 말인가! 돈이 얼마나 들어갔는데, 저런 허접한 놈들이 온 건가?”

패드래건의 말에 게렉스는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자신을 책망하는 것도 책망하는 것인데, 돈을 착복하지 않았느냐는 뉘앙스까지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게렉스는 참지 못하고 햇빛을 가려 주는 천막에서 뛰쳐나가 헤레이스에게 달려갔다.

헤레이스는 게렉스의 질책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이런 변방의 백작에게 막말을 들을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오고 싶어서 온 곳도 아니었다.

시일도 촉박했고, 자신들은 이런 작은 영지전에 낄 급이 아니었다.

실제로 자신이 신세를 진 적이 있는 귀족의 부탁이 아니었으면, 천금을 주더라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몇 날 며칠을 밤을 새다시피 해서 겨우 시일 내에 도착했는데, 이런 사달이 나다니.

막내를 잃은 것만 해도 화가 나는데, 용병단에서 자신 다음으로 강한 빌리까지 잃었다.

“끄응…….”

헤레이스의 꽉 다문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치솟는 짜증을 참지 못하고 이를 꽉 깨물자, 턱 쪽 근육에 물결 모양이 생겼다.

뭐라고 한마디 쏘아 주고 싶었지만, 그는 지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라 더욱 속이 쓰렸다.

헤레이스는 잔뜩 굳은 얼굴로 전장을 향해 걸어 나갔다.

빌리까지 죽었으니 이제 자신이 직접 해결해야 만했다.

헤레이스는 빌리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 나갔지만, 자신이 질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은 빌리와 아예 급이 다른 강자였다.

빌리 정도는 새끼손가락으로 죽일 자신이 있을 정도였다.

자신이 직접 이렇게 나서는 것은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대부분은 부하들 선에서 해결이 됐기 때문이다.

“나는 피닉스 용병단의 단장 헤레이스다. 듣자 하니 스탄다비아에는 자포리자 영주가 가장 강하다고 하더군. 용기가 있으면 나와의 대결에 나서라.”

헤레이스의 묵직한 말이 전장에 울렸다.

자포리자는 자신이 지목받자 당연한 듯이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그런 그를 칼튼이 막았다.

“저기, 영주님…….”

그답지 않은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바라봤다.

“저에게 기회를 한 번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칼튼은 크게 심호흡을 하곤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의 눈동자엔 싸우고 싶다는 투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용병단의 단장이라고 했으니, 아마 프라인과 아드리온의 연합군에서 저자가 가장 강할 것이었다.

자포리자도 싸우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나, 부하가 어렵게 한 부탁을 외면할 만큼 나쁜 주군은 아니었다.

자포리자는 믿는다는 듯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한 번 두드려 주고는 등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감사합니다, 영주님!”

칼튼이 인사를 하고 전장으로 걸어 나갔다.

전장의 중간에서 두 남자가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당신이 이곳의 영주인 자포리자 자작인가?”

“영주님은 감히 너 같은 작자가 입에 올릴 분이 아니다.”

칼튼의 엄숙한 말에 헤레이스는 피식 웃었다.

“겨우 이런 변방의 영주, 그것도 겨우 자작밖에 안 되는 작자가 무엇이 그리 대단하다고. 그리고 나와의 싸움이 두려워 밑의 기사나 보내는 주제에 말이야.”

“너 정도는 영주님이 상대하기에 너무 부족해 내가 나가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니 함부로 그 입을 놀리지 말라.”

자신의 주군을 모욕하는 헤레이스에게 칼튼이 엄중한 경고를 보냈다.

“흥! 운 좋게 내 부하 두 명을 이겼다고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인데. 난 애초에 그들과는 경지가 달라. 그러니 너는 그냥 들어가고, 자포리자 보고 나오라고 전해.”

“건방진 놈. 오늘 너에게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알려 주겠다.”

칼튼이 헤레이스의 오만한 태도에 먼저 검을 뽑았다.

“뭐, 이것도 나쁘지 않지. 네놈의 목을 베고 나면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할 테니.”

헤레이스 역시 검을 뽑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칼튼이 태산과 같은 기세를 담아 검을 내리그었다.

헤레이스는 피하지 않았다.

싸움에서 처음 기세를 잡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꽈앙!

굉장한 소리가 났다.

지켜보고 있던 모든 이들이 깜짝 놀랐다.

이건 도저히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아니었다.

고위급 마법사가 거대한 헬파이어를 날린 듯한 소리가 났다.

“이런 미친!”

이 자리에서 가장 놀란 건, 같이 검을 맞댄 헤레이스였다.

단 한 수였지만, 상대의 기량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게 가능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변방에 이런 대단한 인물이 있을 줄은.

그러면서 느껴지는 기분 나쁜 예감.

알 수 없는 끈적함이 온몸에 달라붙는 기분이었다.

‘내가 잠자는 드래곤을 건든 건가?’

헤레이스는 처음 이 일을 제안받았을 때, 왠지 모르게 내키지 않았다.

‘그때 거절했어야 했어.’

하지만 후회는 언제 해도 늦은 법.

거기다 이미 검을 맞대고 있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의 심기를 흩트리는 쓸데없는 생각일 뿐이었다.

당장은 눈앞의 기사를 이기고 이 영지전을 승리로 이끌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이 기사의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네.’

이건 상대에 대한 큰 실례였다.

자신과 맞설 수 있는 수준의 기사를 저잣거리의 듣보잡 취급을 했으니.

지금의 경지까지 올라오기까지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하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상대를 무시하는 건,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도 같았다.

헤레이스는 곧바로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물었다.

“아직 당신의 이름도 못 물었군. 사과하지.”

“나는 스탄다비아의 기사장 칼튼이다.”

칼튼도 그의 마음을 아는 듯 흔쾌히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이런 변방에 당신과 같은 실력자가 있는 줄 몰랐군. 내 운이 다한 느낌이 들 정도야. 하지만 이 정도 시련으론 나의 발걸음을 막을 수 없어. 지금까지 걸어 온 길보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더 많이 남았거든.”

헤레이스는 칼튼을 향해 말했지만, 스스로의 각오와도 같았다.

칼튼이 자신도 인정할 만한 강자이긴 하지만, 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마나를 검에 불어넣자 견고하게 오러의 형태가 잡혔다.

진심으로 싸움에 임하는 만큼, 오러가 불꽃처럼 화려하게 피어났다.

그 모습에 프라인과 아드리온 연합군에서 커다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 이 정도 경지에 이른 검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만큼, 신기하고 놀라울 뿐이었다.

두 번의 패배로 가라앉았던 사기가 이 한 번의 퍼포먼스로 살아났다.

아니, 처음 영지전을 임할 때보다 사기가 더욱 크게 올라갔다.

그제야 게렉스의 굳어진 얼굴이 풀리며 패드래건과 눈을 마주쳤다.

마치 자신의 부른 용병단이 대단하지 않으냐는 자부심이 깃든 눈빛이었다.

패드래건도 웃음으로 그의 자부심에 동의했다.

“좋군.”

칼튼의 무표정한 얼굴에 웃음기가 피어났다.

그는 진정 기분 좋은 모습이었다.

‘조금 전 탄두스에게 화를 낸 것이 미안해질 지경이군. 실전에서 오는 이 긴장감, 흥분, 온몸을 뚫고 들어오는 짜릿함 때문에 미칠 지경이야.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니, 나도 내 모든 것을 시험해 봐야겠어.’

그의 환한 웃음에는 거짓이라고는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헤레이스는 칼튼의 그 웃음에 심장이 바늘에 찔리는 것처럼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분명 자신이 칼튼의 실력을 짐작했듯이 그 역시 자신의 실력을 예상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저런 웃음이라니.

일기토는 이제 시작이었고, 인사와 같은 단 한 수를 나누었을 뿐인데 마음에서부터 지고 들어가고 있었다.

고수와의 싸움일수록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요한지, 평생을 용병 생활하며 전쟁터를 떠돈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실전 경험은 누구보다 많은 자신보다 더 여유로운 모습이라니…….

이 상황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점점 다가오는 검은색의 끈적하고도 불길한 기운에 온몸이 잠식당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헤레이스도 만만한 자는 아니었다.

이런 위기를 밥 먹듯이 겪어 봤다.

자신보다 강한 자를 수도 없이 이겨 봤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적극적인 마음이었다.

헤레이스는 힘들수록 입가에 더욱 진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자신을 누르는 심리적 억압을 모두 던져 버리고, 강하게 바닥을 박차며 총알같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검에 깃든 오러가 더욱 선명한 파란빛의 꼬리를 남기며 거대한 호선을 그렸다.

그와 함께 칼튼의 검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이 상대의 검을 마중 나갔다.

콰아아아앙!!

중간 지점에서 두 검이 부딪치자 해일이 격돌하듯 푸른 기운이 사방으로 튀어 나가며 사그라들었다.

엄청난 격돌이었다.

이런 강자의 싸움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프라인과 아드리온 연합군은 눈을 떼지 못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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