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내가 몰랐던 또 다른 변수
꽈꽈꽈꽈꽝꽝꽝!
한 치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은 두 개의 검이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합을 나누었다.
칼튼은 온몸이 쩌릿쩌릿했다.
진정한 호적수를 만난 기분이었다.
물론 헤레이스보다 강한 이를 상대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당장에 자포리자와 매일 대결을 벌이고 있었고, 선인님과도 꾸준히 대결을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 대결은 지금처럼 신나지 않았다.
배울 것은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부족함을 늘 겪어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자신의 밑에 있는 기사들과의 대결에서 승리감을 맞볼 순 있었지만, 그건 무언가가 부족했다.
그렇기에 비슷한 실력을 갖춘 사람과의 싸움이 이렇게 즐거운지 몰랐다.
미치도록 즐거워서 이 싸움을 평생 이어 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싸움이 끝나면 탄두스에게 정식으로 사과해야겠어.’
탄두스의 행동이 기사답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상대가 가진 기량을 모두 펼칠 수 있게 해 줬으니 엄밀히 말하면 틀린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자기 합리화를 할 만큼 이 싸움이 오래갔으면 했다.
사막에서 목이 찢어질 만큼 심한 목마름을 겪고 있는데 오아시스를 발견한 기분이랄까.
칼튼의 미소는 싸움이 이어질수록 더욱 짙어졌다.
‘이런 미친 새끼!’
적의 미소가 짙어질수록 헤레이스는 반대로 기분이 나빠졌다.
싸움은 팽팽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누가 이겨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마치 자신이 이긴 것처럼 기뻐하는 칼튼의 미소를 보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칼튼이 목숨을 건 이 싸움을 진정 즐기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검을 익히고 싸워 왔던 헤레이스는 이 싸움을 즐기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이겨야 한다는 강박만이 가득했다.
두 사람은 치열한 싸움을 이어 갔다.
시간이 지나자 서로가 익숙해진 만큼 약점이 보였고, 그 약점을 파고들어 상처를 남겼다.
서로의 몸에 난 작은 상처를 시작으로 상처가 조금씩 커져 갔다.
하지만 칼튼의 미소를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헤레이스는 무엇보다 저 미소가 얄밉고 기분 나빴다.
그 생각은 이내 칼튼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꼭 보고 말겠다는 오기로 이어졌다.
평생을 몬스터와 싸워 온 칼튼과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이들의 싸움은 용호상박이었다.
일기토가 시작된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누가 승기를 잡았다고 말하기 애매할 정도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마나가 화수분이 아닌 이상, 서서히 말라 갈 수밖에 없었다.
무기에 맺힌 오러의 색이 옅어지고, 그 형상이 서서히 뭉개져 담배 연기처럼 흩어져 갔다.
“헉, 헉, 헉, 헉, 헉!”
“헉, 헉, 헉, 헉, 헉!”
조금 전 격렬한 격돌을 한차례 벌인 둘은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고 숨을 골랐다.
말라 버린 입에서 단내가 훅훅 치밀었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지금 메말라 버린 입안이 문제가 아니었다.
머릿속이 극도로 혼란스러웠고 속이 바짝바짝 타고 있었다.
‘분명 내가 더 강해. 몸속의 마나도 내가 더 많고, 실력도 내가 더 위야. 그런데 이게 뭐지? 왜 저놈을 쓰러뜨리지 못하는 거지? 왜 보기 싫은 저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 거지?’
싸움의 길어지자 서로의 실력이 바닥까지 드러났다.
그리고 헤레이스는 자신이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할 만큼 미세한 차이지만 자신이 분명 더 강한 걸 알았다.
싸움이 이어질수록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더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도저히 칼튼을 꺾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지금의 모습은 자신이 더 패배자 같다.
‘왜지?’
칼튼과 첫수를 나누고 기분 나쁜 예감이 들긴 했다.
하지만 전장에서의 잔뼈가 굵은 만큼, 적극적으로 싸움에 임함으로써 그 정도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기분 나쁜 예감은 하나가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검은색의 끈적하고도 불길한 기온이 발뒤꿈치를 타고 서서히 올라오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리가 무거워졌을 때, 자신이 몰랐던 또 하나의 변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놈이 만만치 않은 강자라곤 하지만, 실력이 더 뛰어난 내가 지금까지 승부를 내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 분명 내가 모르는 다른 뭔가가 있어. 도대체 그거 뭐지?’
많은 전장을 누비며 싸움을 해 왔지만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
자신이 미처 몰랐던 또 하나의 변수를 찾기 위해 헤레이스는 온 신경을 집중해서 칼튼을 살폈다.
그리고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칼튼의 갑옷이 자신보다 깨끗하다는 점이었다.
‘뭐지? 공격을 성공시킨 횟수도 내가 더 많고 위력도 내가 더 강했어. 그런데 내 갑옷은 거의 걸레가 되기 일보 직전인데, 저놈의 갑옷이 나보다 훨씬 더 상처가 적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하지만 의문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칼튼이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약간의 집중력이라도 흐트러지는 순간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 한가하게 해답을 찾고 있을 수는 없었다.
싸움은 지루하게 이어졌다.
서로가 최선을 다해 공격해 보지만 둘은 결정적인 공격은 어떡해서든 피해 내거나 막아 냈다.
싸움이 길어진 만큼 몸속의 마나는 말라 갔고, 검에 맺힌 오러도 그 끝을 보이고 있었다.
이제는 정신력이 승리를 가르는 기준이 될 터.
마나가 말라 버린 단전에서 고통이 일기 시작했다.
마나 결핍이 일어나기 일보 직전인 것이다.
승자는 마나 결핍이 주는 끔찍한 고통을 참고 끝까지 싸울 수 있는 자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승부는 어이없이 끝이 났다.
오러가 거의 사라지고 순순하게 검끼리 부딪쳤을 때, 헤레이스의 검이 두 동강이 나 버린 것이다.
그 순간, 헤레이스는 자신의 몸을 감싼 검은색의 끈적하고도 불길한 기온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너, 너, 너 같은 기사가 어떻게 전설의 금속으로 된 검을 가지고 있는 거지? 그것도 갑옷까지 전부!”
헤레이스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자신의 부하들이 이런 촌구석 작은 영지의 기사들에게 진 것도 놀라웠는데, 자신과 비슷한 실력의 기사가 있는 것까지.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건, 자신과의 승부를 가른 전설의 무구의 등장까지.
“어떻게 가지고 있긴, 모두 주군이 내려 준 것이지. 승부란 게 무조건 자신의 실력만으로 이기는 것이 아닌 건, 용병인 네가 나보다 더 잘 알겠지. 그러니 이 승부의 결과를 억울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분명 네 실력은 훌륭했지만, 마지막에 서 있는 것은 나란 것을 인정해야 할 거야.”
칼튼의 말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자신 또한 누구보다도 무구에 신경을 쓰고 있으니.
지금 입고 있는 갑옷과 검도 왕국에서 가장 뛰어난 대장장이에게 부탁해 만든 것이고, 이 검으로 지금까지 수많은 역경을 헤쳐 왔으니.
그렇다고 해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무구의 차이로 졌다는 사실에 아쉬움이 남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승부의 결과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까지 끝이 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일평생 용병 일을 한 헤레이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칼튼은 상대에 대한 존중으로 한 번에 목을 베었다.
‘역시 처음부터 여기 오는 게 아니었어. 지금까지 내 느낌으로 몇 번의 위기를 넘겨왔는데… 이번에는 왜 그 느낌을 무시했을까? 나도 모르게 변방의 작은 영지라는 생각에 빠져 적을 기만하고 있었구나.’
헤레이스는 눈에는 짙은 안타까움이 남았다.
“이게 뭐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패드래건은 이 싸움의 결과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엔 짙은 분노와 함께 당황스러움이 걸려 있었다.
“게렉스 백작, 겨우 스탄다비아의 기사에게 목을 내주는 놈들이 왕국 최고의 용병단이라는 거요? 그 많은 돈을 겨우 저런 쓰레기들을 데리고 오는데 쓰다니. 지금 병사들의 표정이 어떤지 보이지 않소?”
“…….”
“무려 다섯 배나 많은 병력인데도 다들 진 거 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 않소. 차라리 데리고 오지 않는 게 훨씬 나았단 말이오! 자네는 이제 이번 영지전에서 손을 떼시오. 그리고 영지전이 끝나고 나서 책임을 져야 할 것이오!”
분노한 패드래건은 게렉스를 벼랑 끝으로 밀어붙였다.
자존심이 상한 게렉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으나, 그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 정도 일로 스탄다비아에게 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전리품을 나눌 때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여우 같은 패드래건이 이 일을 그대로 넘길 리가 없을 테니까.
“패드래건 백자님, 미안합니다. 분명 대단한 용병단을 보내 준다고 했는데…….”
그 자존심 강한 게렉스가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그라도 이 상황에서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역시 일은 한 다리 건너서 추진하면 탈이 날 경우가 많지. 그래서 내가 직접 준비해 둔 것이 있네.”
“백작님, 설마…….”
수치심에 화끈거리던 게렉스의 얼굴에 기대감이 어렸다.
일기토는 스탄다비아의 완벽한 승리로 끝이 났다.
기사들의 연이은 승리로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와 반대로 프라인과 아드리온의 병사들은 분하다는 듯 이를 갈았다.
보통의 경우 일기토에서 이 정도로 완벽하게 진다면 기가 죽기 마련인데, 지금은 워낙 병력이 차이가 나다 보니 일어난 현상이었다.
일기토에서 용병들이 졌다고 해도 병력이 무려 다섯 배나 많은 만큼,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내뿜었다.
“모두 들어라!”
자포리자의 묵직한 목소리가 전장에 울렸다.
“이곳에서의 포식자는 바로 우리다. 지금까지 약자였던 우리는 더 이상 없다. 이제부터 우리의 살과 피로 자신들의 몸을 불린 짐승들에게 처참한 복수를 행할 것이다. 오늘부터 스탄다비아는 그대들과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 갈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전투였다. 그 상대가 몬스터에서 인간으로 바뀐 것뿐. 그러니 이 전투는 아무것도 아니다.”
확신에 찬 눈빛으로 자포리자는 일일이 병사들과 눈을 마주쳤다.
“피를 흘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단 죽지만 마라. 선인께서 내려 주신 포션은 어떠한 상처도 낫게 할 수 있다. 만약 이 싸움에서 누군가 죽는다면, 그 가족은 내가 평생을 돌볼 것을 약속하며 싸울 수 없는 몸이 되더라도 스탄다비아의 영웅으로 평생 대접받을 것이다. 그러니 프라인과 아드리온의 피로 이곳을 붉게 물들이도록 하라!”
“와아아아아아아!”
평소 말이 없던 자포리자의 힘 있는 웅변은 병사들의 진심을 흔들었다.
“부대 정렬!”
자포리자의 명령에 일기토를 보기 위해 넓게 퍼져 있던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자포리자를 정점으로 한 삼각뿔의 돌격 진형이 만들어졌다.
늘 소수 정예로 싸워 온 이들의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진형이었다.
“돌격!”
자포리자의 함성과 함께 스탄다비아의 군대가 달려 나갔다.
스탄다비아의 군대와 맞서 프라인과 아드리온 연합군이 택한 건, 중간을 두툼하게 만든 횡렬 진이었다.
스탄다비아 군대의 전진을 막고 둘러싸서 잡아먹겠다는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이건 자포리자의 전진을 막아야 가능한 전법이었다.
창과 방패 중 어느 것이 강할지 결정이 나는 순간인 것이다.
연합군의 방패병들이 자기 몸보다 큰 방패를 땅에 박아 철벽을 만들었다.
그리고 방패 사이로 보기에도 날카로운 창이 튀어나왔다.
이런 전투에서 가장 위험한 곳은 바로 선봉에 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