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252화 (252/300)

[252화] 살려 주게

헌터들의 레벨이 복구되었고, 헌터로 각성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다시금 회복되었다.

로바 음료수를 마신 사람들은 점점 마운틴 펀치를 멀리하게 됐고, 어느 날부터는 입에도 못 될 정도로 역한 맛을 느꼈다.

이 신기한 현상에 많은 말들이 오갔고, 여러 군데에서 해성 그룹에 문의가 들어왔으나 해성 그룹은 침묵할 뿐이었다.

마운틴 펀치가 시장에서 사라지는 데에는 6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와 함께 마운틴 펀치가 일으킨 해악은 모두 사라졌다.

경일의 의도대로 마의 구간에 묶인 헌터들의 레벨 업이 시작됐고, 헌터의 전력이 순식간에 올라갈 수 있었다.

* * *

프라인과 아드리온의 연합군 중 서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 무기를 버리고 꿇어앉자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이 새끼들아 뭐 하는 거야? 우리의 수가 훨씬 많아. 당장 일어서서 싸우란 말이야!”

게렉스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쳐 보지만, 그의 목소리는 담배 연기처럼 공기 중에 허망하게 퍼져 사라졌다.

퍼억!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억!”

칼튼이 게렉스의 명치에 주먹을 내지르자, 그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챙!

검집에서 검이 뽑히는 소리와 함께 게렉스의 목에 차가운 검신이 닿았다.

고통에 괴로워하던 게렉스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영지전의 패배를 인정할 테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게.”

게렉스는 곧바로 태도를 바꾸어 빌기 시작했다.

무릎을 꿇은 채로 칼튼의 다리를 잡고 눈물 콧물을 짜는 추한 모습에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길 정도였다.

“백작이라는 작자가, 그것도 한 영지의 영주란 놈이 부끄럽지도 않으냐! 너를 믿고 전장에 나온 병사들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

자포리자가 게렉스를 보고 엄하게 꾸짖었다.

“병사? 저들의 모든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게 바로 게렉스 호킹인, 나의 목숨이다. 내가 있어야 저들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저들은 나의 고귀한 혈통을 지키는 역할일 뿐이야.”

게렉스는 오히려 자포리자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너는 혈통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생각하는가? 하…….”

자포리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경일이 보내 준 역사책을 읽은 자포리자는 인간은 모두 동등한 존재이며, 이 시대의 사람은 어떤 부모를 만나냐에 따라 인생이 뒤바뀐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게렉스는 단지 남들보다 운이 좋아 귀족이라는 부모를 만난 것뿐이지, 그 자체는 다른 사람들이랑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게렉스는 이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너랑은 대화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겠다. 그래도 다행히 영지전의 승자가 패자의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건 잘 알고 있는 것 같군. 고로 나는 너를 죽이겠다. 그리고 호킹이라는 성을 가진 너의 모든 일족 또한 목을 벨 것이다. 너희들은 지금까지 남들이 누리지 못할 온갖 권리와 사치를 누렸으니, 귀족답게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여라.”

자포리자의 말에 게렉스가 발끈해 소리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내가 당연히 누려야 할 것을 누렸을 뿐이야. 그게 왜 죄가 되는 거지? 말도 안 되는 괴변으로 나를 겁박하지 마라! 그래, 영지전의 패자인 건 인정한다. 하지만 네놈도 나를 죽이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이야. 지금까지 자작이 백작의 목을 벤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러니 여기서 멈추는 게 좋을 것이다. 베르아스 왕국의 모든 귀족들의 눈 밖에 나기 싫다면 말이야.”

게렉스는 애원과 협박을 섞어 이 위기를 모면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포리자에게는 애원과 협박, 그 어느 것도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화만 돋웠을 뿐이었다.

“칼튼.”

자포리자가 게렉스에게 시선을 거두고 칼튼을 바라봤다.

“네, 영주님.”

“이놈은 지금 바로 죽이지 않겠다. 지금 죽여 주는 건 너무 관대한 거 같아서 말이야. 이놈의 발에 족쇄를 채우고, 새벽부터 밤까지 일을 시켜라. 이놈의 일족 역시 똑같이 일을 시켜라. 이들이 지금까지 끼친 해악을 조금이라도 갚도록 말이야. 그리고 밥은 우리가 어려웠을 때 먹었던 만큼만 줘라.”

“알겠습니다, 영주님. 저놈을 당장 끌고 가서 가두어라.”

칼튼의 명령에 옆에 있던 기사가 재빨리 게렉스의 몸을 밧줄로 구속하자, 게렉스가 발악하며 소리쳤다.

“네 이놈! 이게 무슨 짓이냐! 이건 귀족 모독이다. 일개 자작 놈이 감히 백작인 나에게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당장 멈추지 못할까? 이런 짓을 하고도 네 놈이 무사할 거 같아? 여기 수많은 사람이 보고 있어! 이 사람들이 모두 증인이다! 왕국에서 엄벌이 내려올 것이야!”

“하하하하! 조금 전 네놈 하나의 목숨보다 못하다고 말해 놓고, 이제는 너를 위해 나설 거라고 말하는 것이냐? 뼛속까지 썩은 놈이군. 그리고 왕국이 나를 벌하기 전에 네놈부터 걱정해야 할 것이다.”

“이놈이 지금 뭐… 욱!”

게렉스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칼튼이 자신이 주군을 욕하는 게 듣기 싫었는지 그의 배를 걷어차 버린 것이다.

그러고는 바닥에 쓰러진 게렉스를 그대로 질질 끌고 가 버렸다.

그가 바란 대로 목숨은 건졌지만, 지금의 결과가 죽는 것보다 나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누구보다 사치스럽게 살아온 그가 돼지가 먹는 음식보다 못한 음식을 먹으며, 눈을 뜬 순간부터 자기 전까지 일만 해야 하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굳이 겪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터.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자가 있었다.

조금 건 정신을 차린 패드래건이었다.

그는 게렉스처럼 자존심에 가득 찬 무모한 바보가 아니었다.

중앙 정계 진출을 위해 노력했던 사람답게 그는 자포리자의 성향을 분석하고 이용할 생각을 했다.

그의 목표는 마법사인 아들의 목숨이었다.

‘모든 걸 희생하더라도 리암만은 살려야 해. 그럼 로우 가는 다시 일어설 수 있어. 지금은 자포리자의 신발을 혀로 핥는 한이 있더라도 무조건 머리를 숙여야 해!’

자포리자가 자신에게 오자 그는 얼른 입을 열었다.

“영지전의 승리를 축하하지. 도저히 질 수 없는 싸움이라고 봤는데, 이렇게 허무하기 질 줄은 생각도 못 했어. 이런 변방의 작은 영지에서 소드마스터가 나오다니. 기적 같은 일이군.”

패드래건은 담담히 말을 이어 갔다.

그의 말이 통했는지 자포리자의 얼굴에 약하게 호기심이 생겼다.

“내가 알기론 겨우 소드 익스퍼트 하급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요 몇 년 사이 어떻게 그렇게 발전할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이야.”

패드래건은 자포리자를 칭찬하며 그의 관심을 끌었다.

“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자네에게 제안할 것이 있네.”

자포리자가 확실히 자신에게 관심을 가졌다고 생각한 순간, 그는 미끼를 던졌다.

“뭐지?”

자포리자가 자신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모습에 그는 약간의 희망을 품었다.

“영지전을 승리했으니 이제 승자인 자네가 프라인과 아드리온을 다스려야겠지. 두 개의 백작령인 만큼, 그 크기가 절대 작지 않아. 아무래도 스탄다비아만 다스려 본 자네에겐 버거울 수도 있을 거야. 아, 내 말은 자네의 능력이 모자라서 그런 게 아니라 경험이 없다는 뜻이니 오해는 말게.”

패드래건은 자포리자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려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버거울 수도 있다는 단어에 혹시 자포리자가 기분이 상하지 않았을까 하고 걱정했지만, 그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담담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하겠네. 지금 스탄다비아에는 누구보다 필요한 게 경험 많은 행정관이라고 생각하네. 자네가 자리를 잡을 동안 내가 그 역할을 하겠네. 내 귀족의 명예를 걸고 최선을 다할 것을 맹세하지.”

무표정하던 자포리자의 얼굴에 미세하게 표정이 생겼다.

패드래건이 한 말은 항복 선언보다 더 치욕적인 말이었다.

백작인 그가 머리를 숙이고 자작인 자포리자의 밑으로 들어가겠다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해 주게. 내 아들은 풀어 주게. 어차피 자네의 목표는 게렉스와 나였으니, 별로 어렵지 않은 부탁일 거야. 내 아들은 원래 이곳에 산 것도 아니고, 이번 영지전 때문에 몇 년 만에 프라인에 방문한 것이니 아무런 원한도 없지 않나.”

그제야 자포리자는 패드래건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그가 발톱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던 자신에게 머리를 숙이는 이유를.

부정이 안타깝긴 했지만, 자포리자는 자신을 노린 적에게 자비를 베풀 만큼 무르지 않았다.

그리고 패드래건은 몰랐지만, 자포리자는 프라인과 아드리온을 다스릴 생각이 없었다.

“백작님의 요구는 들어줄 수가 없겠군요.”

자포리자의 단호한 거절에 패드래건의 얼굴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자신의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아들이 아니었으면 절대 하지 않을 말까지 했건만, 이렇게 쉽게 거절당하자 수치심에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중앙 정계 진출을 위해 노력한 만큼, 그의 인내심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물었다.

“내가 내민 조건을 거절한 이유가 무엇인가? 내 생각에는 충분히 자네에게도 도움이 될 텐데 말이야.”

자포리자도 아들을 살리려는 그의 순수한 마음을 존중해 자신의 계획을 말해 주었다.

“나는 프라인과 아드리온을 내 영지로 삼을 생각이 없습니다.”

“아니, 그게 말이 되는가? 영지전을 하는 이유가 그건데, 영지에 관심이 없다니.”

“가만히 있는 스탄다비아에 싸움을 걸어온 건 당신들이었죠. 나를 당신과 같은 잣대로 보지 마세요.”

자포리자의 강렬한 눈빛으로 패드래건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 때문에 왠지 위축이 되는 패드래건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1안이 틀어졌으면 2안으로 가야 했다.

패드래건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영지를 가질 생각이 없다면 우리가 배상금을 내겠네. 그게 자네에게도 이득이지 않겠나.”

패드래건은 오히려 더 잘됐다고 생각했다.

배상금을 물어 주면 거덜 난다 해도 영지는 지킬 수 있으니, 자포리자 밑으로 들어가는 것보단 훨씬 더 나을 것이었다.

“하하하하하하하!”

이에 자포리자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패드래건은 자신의 면전에서 웃는 자포리자의 모습에 기분이 상했으나, 최대한 얼굴에 티를 내지 않기 위해 겨우 참았다.

“확실히 대단하긴 하군. 이 상황에서도 잔머리를 굴리다니. 중앙 정치에 도전할 만해. 그런데 아직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못한 이유도 알겠군. 안타깝게도 큰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없군.”

자포리자가 자신의 꿈을 신랄하게 비웃자, 패드래건의 얼굴이 불타는 것처럼 달아올랐다.

“왜 아까부터 내가 당신을 살려 줄 거라고 생각하지? 지금 머리를 숙이고 있어서? 당신이 나에게 머리를 숙인 게 무슨 대단한 걸로 보이나? 개만도 못한 놈이 너의 가치를 너무 높게 생각하고 있구나.”

자포리자의 싸늘한 한마디에 패드래건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난 네놈을 살려 줄 생각이 전혀 없어. 간자를 보내 마나 연공법과 비누 제조법, 그리고 무기를 빼돌리려고 한 짓을 잊지 않았겠지? 거기다 호시탐탐 스탄다비아를 위협하고 통행세를 붙여 남의 이득을 가로채고. 그게 안 되니 스탄다비아를 통째로 삼키려고 영지전까지 건 너를 왜 살려 줄 거라고 생각하지? 난 게렉스보다 네놈이 더 싫은데?”

패드래건은 그제야 자포리자가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가 말을 들어준 건 귀족으로서의 예의를 지킨 것이 아니라,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서라는 것을.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화를 내려던 패드래건은 급하게 화를 삼켰다.

화를 삼킨 목구멍이 마치 불구덩이를 삼킨 듯 고통스러웠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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