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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253화 (253/300)

[253화] 아들만은 살려 주게

하지만 자신의 목적인 아들만은 어떻게든 살려야 했다.

지금 자신이 머리를 숙이는 건, 모두 자신이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영지전에서 진 패자가 무슨 말을 하겠나. 그래, 내 목을 가져가게. 대신, 아들만은 제발 살려 주게. 내가 이렇게 부탁하네!”

패드래건이 마지막으로 택한 건 처절한 읍소였다.

그는 무릎을 꿇고 더러운 흙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자포리자를 향해 아들을 살려 달라고 간절하게 빌었다.

하지만 자포리자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내가 왜 놈을 살려 줘야 하지? 그놈은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마법을 쓰면서도 웃더군. 마치 벌레라도 죽이 듯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오히려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어. 그런데 내가 왜 그런 놈을 살려 줘야 하지?”

패드래건은 점차 절망감에 빠진 얼굴이 되어 갔다.

하지만 아들을 살리기 위해 모든 자존심을 버린 그는 자포리자에게 끝까지 애원했다.

“내 아들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이 나라의 마법계를 이끌어 갈 인재네. 자네도 베르아스의 귀족인 이상, 왕국을 위해 큰 결정을 내려 주게.”

“하, 이제 왕국까지 파는 건가? 그런데 난 왕을 섬기지 않아. 난 주군이 따로 있거든.”

그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만큼 멍해질 정도로 충격적인 말이었다.

이 나라의 귀족인 이상, 왕을 부정하는 말은 절대 꺼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그것도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설마… 지금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알고 하는 거겠지? 감히 왕을 부정하다니… 이건 반역이야!”

패드래건은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꼬투리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꿇었던 무릎을 다시 세우곤 단호한 얼굴로 온몸의 기세를 올려 자포리자를 압박했다.

“지금까지 베르아스 왕국이 스탄다비아를 위해 해 준 건 아무것도 없어. 선조 때부터 지금까지 목숨을 바쳐 몬스터를 막아 왔지만, 국왕은 우리를 철저히 무시했지. 네놈같이. 우리가 그 긴 세월을 목숨 바쳐 몬스터를 막지 않았다면, 네놈이나, 베르아스 왕국이 이렇게 평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나?”

자포리자가 무섭게 눈을 치켜뜨고 잡아먹을 듯이 패드래건을 노려봤다.

그 기세에 눌린 패드래건은 뒷걸음질 치면서도 마지막 힘을 짜내어 소리쳤다.

“자포리자는 베르아스 왕국을 부정했다! 이건 반역이다! 당장 저놈을 잡아라! 영지전이 중요한 게 아니다! 당장 저놈을 잡지 않고 무엇을 하느냐?”

패드래건은 마지막 기회를 잡은 듯 스칸디아 평야가 떠나가도록 소리쳤다.

하지만 움직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스탄다비아 군대는 오히려 자포리자의 말이 당연히 여겼고, 프라인과 아드리온 연합군은 스탄다비아의 압도적인 무력을 본 이상 감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서 점점 핏기가 사라져 가고, 결국 패드래건의 외침은 공허하게 끝날 수밖에 없었다.

“또 수작이 남았나? 죽기 전에 한 번 마음껏 펼쳐 보아라.”

자포리자의 목소리가 창처럼 폐부를 찔러 왔다.

패드래건은 그 자리에서 다시 무릎을 꿇었다.

“제발… 나의 목숨만으로 만족해 주게! 아니, 로우 가의 모든 이를 죽여도 좋으니, 아들의 목숨만은 살려 주게나.”

패드래건은 자신의 말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비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눈물을 흘리고 손바닥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자포리자의 단호한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실수야. 이번 영지전에 아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었어. 가볍게 실전 경험을 쌓으라고 불러들인 것이 죽음의 덫이었다니.’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을 수밖에 없었다.

이날, 패드래건의 목뿐만 아니라 아들의 목까지 달아났다.

영지전에서 승리한 스탄다비아 군대는 프라인과 아드리온으로 들어갔다.

영지민들은 겁에 질린 채 그들의 모습을 숨어서 훔쳐봤다.

영지전에서 진 영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영주 대부분은 영지전을 이긴 포상으로 병사들의 행동을 묵인했다.

그들은 영지민의 재산을 빼앗고, 강간하고 살인을 저질렀다.

하지만 스탄다비아의 군대는 단 한 명도 영지민들에게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적이 영지민들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포리자는 그런 짓을 경멸하는 인물이었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할 뿐, 이들은 한눈팔지 않고 목적지로 향했다.

“우와, 정말 대단합니다! 이 정도로 꾸밀 정도면 돈이 얼마나 들어갔을지 예상도 되지 않습니다. 아직 왕성을 가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왕성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보입니다.”

행정관 사미르는 아드리온의 내성을 둘러보곤 혀를 내둘렀다.

얼마나 화려한지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어디를 둘러봐도 빈틈없이 화려함이 빛나고 있었다.

이게 모든 영지민들의 살과 피를 짜낸 결과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의 감탄은 분노를 바뀌었다.

“하, 알리사는 여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군요. 정말이지, 같은 귀족이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네요. 아니지, 나 같은 남작 나부랭이를 높으신 백작님과 비교하면 안 되지.”

분노를 넘어 자기 비하가 올 정도로 내성은 온갖 진귀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뭘 이런 걸 가지고 부러워합니까? 스탄다비아는 이런 것과 비교조차 하지 못할 보물들이 널려 있는데.”

칼튼이 그런 사미르를 위로했다.

“하긴, 이들이 아무리 맛있는 걸 먹어도 선인님이 보내 주는 고기는 못 먹어 봤겠지요. 하… 정말 그 고기는 천상의 맛이었어요. 생각만 해도 입에 군침이 도는군요. 이번 영지전 승리를 축하하는 파티가 열리면, 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겠지요?”

사미르는 입맛을 다시면서도 이곳에 온 이유를 잊지 않았다.

그는 내성을 샅샅이 뒤져 게렉스가 모은 재물들을 모았다.

하지만 화려한 장식으로 점철된 성에 비해 나온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거, 사치를 부린다고 돈을 다 쓴 모양입니다. 무슨 한 지역을 책임지는 영주란 작자가 이딴 식으로 운영을 하다니. 정말 한심하군요.”

사정은 프라인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이미 파산 상태로 보였다.

자포리자는 이 돈을 가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고생했을 프라인과 아드리온의 영지민들에게 돌려줄 생각이었으나, 액수가 너무 적어 몇 푼 돌아가지도 않을 거 같았다.

하지만 이들에게 줄건 돈 몇 푼이 전부가 아니었다.

영주의 착취로 힘들게 살아온 이들에게 자포리자는 커다란 선물을 준비했다.

마을마다 게시판이 세워지고 자포리자의 뜻이 담긴 벽보가 붙었다.

“이게 진짜라고?”

게시판을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직접 보고 듣고도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자신은 이곳을 다스리지 않을 것이고, 이전 영주가 가진 재산을 모두 공평하게 나누어 주고, 원하는 자들은 스탄다비아의 영지민으로 받아 주고 지원도 해 준다는 말이지?”

“네. 벽보에 그렇게 적혀 있네요.”

“그럼 이곳은 앞으로 누가 다스리게 되는 거지?”

“모르죠. 왕국에서 새로운 귀족이 오거나, 근처 아무 귀족이 다스리지 않겠어요?”

영지민들의 얼굴에 실망감이 보였다.

이들도 자포리자에 대한 소문은 듣고 있었다.

얼마나 영지민을 아끼는지.

그런 이가 자신들의 새로운 영주가 된다고 하니 다들 기대에 차 있었다.

하지만 자포리자가 공식적으로 프라인과 아드리온을 다스리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크게 실망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방금 말했잖아요. 원하는 자는 스탄다비아 영지민으로 갈 수 있다고.”

“아니, 그게 그리 싶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모든 생활 기반이 여기에 다 있는데, 거기에 가면 어떻게 먹고살려고.”

“아저씨, 솔직히 어딜 가도 여기보다 나을 거 아니에요? 전 자포리자 영주님을 믿고 따라갈 겁니다.”

영지민들의 의견은 반으로 갈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주를 택하는 영지민들이 늘어났다.

앞으로 이곳을 다스릴 영주가 또다시 게렉스나, 패드래건 같은 자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바엔 눈앞에 있는 자포리자를 선택하는 게 훨씬 현명한 행동이었다.

프라인과 아드리온의 일을 정리하고 대규모의 인원이 자포리자의 뒤를 따랐다.

자포리자는 앞으로도 적극적으로 스탄다비아에 사람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경일에게 이 세계의 숨겨진 진실을 듣고, 그는 몬스터 숲을 점령해 나갈 생각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몬스터의 숲으로 들어오면, 그만큼 몬스터의 세력권이 줄어든다는 의미였다.

패드래건에게 한 말은 그냥 한 게 아니었다.

그는 베르아스 왕국에서 독립해 몬스터 숲에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생각이었다.

이것은 경일을 돕는 일뿐만 아니라, 자신이 배운 지식을 기반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은 꿈이기도 했다.

거의 7만에 이르는 엄청난 사람들이 스탄다비아로 들어왔으나, 그들은 수용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새롭게 자리 잡은 선조의 땅은 넓었고, 필요하면 몬스터를 쫓아내 땅을 넓히면 됐다.

경일에게 무한대의 지원을 받고 있어 몬스터를 막아 줄 방벽을 세우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이주민들을 가장 먼저 놀라게 한 건, 스탄다비아로 들어가는 협곡을 막고 서 있는 엄청난 규모로 세워진 방벽이었다.

보기에도 튼튼해 보이는 방벽이 자신들을 지켜 줄 거란 생각에, 이곳에 오기 전 가졌던 불안한 마음이 일순간 사라질 정도였다.

방벽을 지나자 보이는 스탄다비아의 모습에 그들의 눈빛이 희망으로 반짝였다.

깨끗한 거리에 반듯하게 뻗어 있는 길을 따라 만들어진 집.

특히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형식의 집은 튼튼하고 안락해 보였다.

저런 집에 살면 어떠한 추위도 느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아빠, 우리도 저기서 사는 거야?”

가장 기뻐한 건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보기만 해도 좋은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방방 뛰었다.

“어, 그게…….”

간절하게 바라보는 아들의 질문에 대답을 머뭇거리는 순간, 자포리자가 가볍게 고개를 끄떡여 주었다.

이에 아이의 아버지는 눈을 크게 부릅뜨더니,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럼. 앞으로 우리 가족도 저런 집에서 살게 될 거야.”

“와! 아빠 최고!”

아이가 기뻐하는 모습에 사람들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조성된 농지에는 여러 작물이 풍족하게 자라고 있었고, 군데군데 물이 흐르는 수로가 있었다.

일을 하는 사람들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으며, 이주민들은 저 웃음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도 얼른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싶었다.

이 시대에 최초로 새워진 계획도시를 본 이주민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세계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흑…….”

감정이 격해진 몇몇 사람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들도 이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힘들게 살아온 삶의 보상을 한꺼번에 받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좋은 곳에 새롭게 합류하는 터라 혹시나 텃세가 있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영지민들은 이들의 합류를 두 손 들고 환영했다.

스탄다비아에 가장 필요한 건 인력이었다.

영지의 빠른 발전에 비해 인력이 못 따라갈 지경이었다.

이미 계획이 되어 있었는지 행정 절차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주민들의 신상 조사가 끝나자 곧바로 땅이 주어지고, 그들이 터를 잡고 살 마을이 정해졌다.

모든 물자가 풍부한 만큼, 이주민들은 스탄다비다의 생활에 빠르게 녹아들었다.

그리고 스탄다비아엔 이 시대 최초의 제재소가 지어졌다.

누구보다 교육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자포리자를 위해 경일이 종이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전수했던 것이다.

종이는 당연한 듯이 인쇄술을 싹트게 할 것이었다.

종이와 인쇄술이 결합하면서 생성되는 그 파급 효과는 혁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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