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254화 (254/300)

[254화] 황금 명함

이 시대의 책은 양피지로 만들어지며 책 한 권을 만드려면 수백 마리의 동물이 필요했고, 가격도 비쌀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이 시대의 지식은 일부 귀족들의 전유물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종이와 인쇄술의 발전은 지식의 보급에 일대 변혁을 가져올 것이었다.

지식을 익힌 평민들이 이 사회의 불합리를 깨우칠 것이고, 그것이 귀족 사회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었다.

스탄다비아에 아이들을 위한 학교 공사가 시작되었다.

기본적인 공부와 함께 마나 연공법과 검술을 체계적으로 가르칠 계획이었다.

스탄다비아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경일의 레벨도 쉴 새 없이 올라갔다.

스탄다비아의 비약적인 발전은 상인들로 인해 왕국 전체에 알려졌다.

그런 와중에 종이의 등장은 왕국의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또 한 번 스탄다비아로 몰리는 계기가 됐다.

동물 가죽을 이용해 만든 양피지를 이용하던 귀족들에게 종이는 염색된 천을 넘어서는 큰 관심을 받았다.

종이의 등장으로 가장 마음이 급해진 건 가우스 교였다.

스탄다비아가 남들의 이목을 끌어서 좋을 게 없었다.

“이거, 스탄다비아가 이번엔 종이라는 걸 만들면서 군침을 흘리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가우스 교의 대신관 이데카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우리에게도 압박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최대한 거절하고 있지만,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어쩔 수 없이 몇몇 종교를 더 받아야 할 거 같습니다.”

타르다스 교의 대신관 쉐올도 상황이 만만치 않음을 내비쳤다.

“가장 큰 문제는 왕실에서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다른 종교나, 귀족들은 어떻게 막아 세울 수 있어도 왕실이 참여하는 순간, 우리가 밀려날 위험이 있습니다.”

엘리시움 교의 대신관 켈레우스의 말에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아직 준비가 부족하긴 하지만, 날짜를 당겨야겠습니다.”

켈레우스의 말에 이데카른은 마음이 급했는지 출병 날짜를 당기려 했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절대 남에게 넘겨줄 수는 없었다.

“염색된 천으로도 대단한데, 설마 종이라는 것을 또 만들어 낼 줄은 몰랐습니다. 아직 생산량이 얼마 되지 않아 종이를 써 본 귀족이 적어서 다행이지, 종이가 알려지기 시작하면 귀족들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기존의 양피지보다 훨씬 싼 값에 같은 역할을 하니, 그 쓰임새가 무궁무진합니다. 이건 비누나 염색된 천을 뛰어넘는 돈이 될 게 뻔합니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출병해야 합니다!”

이들은 종이를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만 보았다.

종이의 등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이들은 관심조차 없었다.

종이는 앞으로 사람들이 지적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될 것이고, 그럼 이 시대의 종교가 말하는 교리가 얼마나 허망하고 말이 되지 않는지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할 것이었다.

한마디로 종이는 종교들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는 물건이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돈에 눈이 뒤집힌 이들은 애초에 이런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출병 날짜를 당기는 것은 문제가 없을 듯한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쉐올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뭐, 변방의 작은 영지 하나 접수하는데 큰 준비가 필요하겠습니까?”

전쟁을 시작하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병사를 모으고, 보급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싸우기 전 정보를 수집하고, 그에 맞는 작전을 세우고.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이 필요했다.

“그래도 최소한의 정보 수집은 필요한 거 아닙니까? 얼마 전 스탄다비아가 프라인과 아드리온 연합군과의 영지전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라 헛소문이라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뭐, 어쨌든 맹수가 작은 사냥감을 사냥할 때도 최선을 다하는데, 안 그래도 무리하게 잡은 출병 날짜를 당기는 건…….”

쉐울은 너무 급하게 흘러가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쉐울 대주교님의 말씀은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시간이 없습니다. 이대로 있다가 다 잡은 물고기를 뺏길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미 많은 돈이 들어갔는데, 잘못하다가는 아무것도 못 해보고 그 돈을 모두 날릴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아마 우리는 지금의 자리를 유지하는 건 힘들어지겠죠. 그리고…….”

이데카른은 좌중을 둘러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스탄다비아가 프라인과 아드리온과의 영지전에서 승리했다고 해도 우리가 지금 모은 병력이 무려 2만 명입니다. 거기다 이번 전쟁에는 피츠 경도 참가하기로 했습니다.”

“오,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아무런 걱정이 없겠군요.”

피츠 하머는 베르아스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용병이자, 소드마스터였다.

돈을 너무 밝히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힘을 사용하는 자로 평판이 좋지 않은 자였지만, 그의 실력은 누구나 인정할 만큼 대단했다.

“출병 날짜를 당기면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부작용을 저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모를 부작용을 대비해 피츠 경을 섭외한 겁니다.”

“허~ 너무 과한 처사 아니오? 쉐울 대주교의 의견은 나도 동의하지만, 그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켈레우스는 스탄다비아를 정복하는데 소드마스터까지 부르는 것은 낭비로 보였다.

이미 종교 연합군에도 피츠보다는 못해도 강자들은 많았다.

거기다가 전투 마법사까지 포진하고 있어 굳이 피츠까지 대동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뭐, 과하다면 과하죠.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스탄다비아를 먹으면 피츠 경을 부른 비용 정도야 주점에서 먹는 술 한 잔 값처럼 느껴질 겁니다. 그러니 이런 적은 돈에 연연할 필요가 있을까요?”

“하하하, 그렇군요. 스탄다비아를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돈인데, 내가 좀 민감했군요. 이거, 부끄럽습니다.”

“아닙니다. 켈레우스 대신관님의 의견도 충분히 나올 만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럼, 두 분도 출병 날짜를 당긴 것에 이의가 없으시죠?”

“없습니다.”

“네.”

이로써 종교 연합군의 출병 날짜가 당겨졌다.

스탄다비아의 목을 한 번에 꺾어 버릴 수 있는 거대한 맹수가 스탄다비아를 향해 이빨을 드러낸 것이다.

* * *

해성 그룹은 제2의 도약을 시작했다.

영인초 포션이 들어간 음료수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마의 구간에 갇힌 헌터는 전 세계에 널려 있었고, 이들은 모두 음료수를 원했다.

우해수의 충고를 받아들여 영인초 포션이 들어간 음료수를 따로 만든 게 다행이었다.

경일과 이길호는 영인초 수확에 정신이 없었다.

던전에 들어와서 나갈 때까지 영인초를 수확했고, 수확한 영인초는 손윤찬의 지휘 아래 포션으로 만들어졌다.

만들어진 영인초 포션 전량은 엄중한 경비를 받으며 해성 음료 공장으로 이동되어 음료수로 탈바꿈 되었다.

“이거, 일이 이렇게 커질지는 미처 생각도 못 했습니다. 힘드시죠?”

“아닙니다. 하나도 힘들지 않습니다. 그 누구보다 마의 구간에 갇힌 헌터들의 심정을 잘 알지 않습니까? 저의 노력이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가슴이 뿌듯합니다.”

이길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웃었다.

이들이 노력하는 만큼 헌터들이 마의 구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이것은 헌터들의 전력 상승으로 이어져 이전보다 던전 폐쇄를 더 쉽게 할 수 있었다.

몸은 힘들지만 기분 좋은 날이 이어졌다.

해성 길드와 손을 잡은 뒤로는 분식점에서 더 이상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던전병 치료 포션이 풀리고, 죽을 얻으러 오는 사람도 사라졌다.

경일이 꿈꿔 왔던 분식점의 모습이 나날이 이어졌다.

“아저씨, 떡꼬치 주세요.”

“나는 소떡꼬치요.”

분식점이 안정되면서 경일이 제일 먼저 아이들을 위한 메뉴를 늘였다.

꼬치는 인기 폭발이었다.

경일은 꼬치 소스를 완전히 아이들 입맛으로 만들었다.

아이들 전용 메뉴나 마찬가지였다.

“안녕하세요.”

수한이가 이제 제법 의젓하게 인사를 한다.

처음 볼 때는 코흘리개 아이였는데, 아이들이 자라는 건 눈 깜빡할 새였다.

의젓한 모습도 보기 좋았지만, 너무 빨리 커 버린 거 같은 아쉬움도 들었다.

하지만 새롭게 단골이 된 어린아이들이 많아 그 아쉬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보육원의 아이들도 제법 자라 이제 학교를 오가면서 분식점을 들리는 일이 많았다.

언제 던전병을 앓았냐는 듯이 수아는 이쁘고 건강한 모습으로 잘 자랐다.

공부도 잘하고 이대로만 크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아저씨, 나는 꼭 아저씨랑 결혼할 거예요.”

볼 때마다 하는 저 소리만 빼놓고는.

“이거, 생각보다 장사가 잘되네요.”

한창 아이들을 주문한 음식을 챙겨 주고 있는데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친근한 목소리에 아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옷을 잘 모르는 경일이 봐도 비싸 보이는 옷차림은 이 동네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경일의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경험상 저런 류의 사람이 오면 꼭 새로운 사건이 터지곤 했다.

“제가 그리 반갑지 않은 모양입니다. 저는 사장님이 돌아가신 부모님을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가운데 말입니다.”

거리를 두려는 경일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는 더욱 살갑게 다가왔다.

관리가 잘된 얼굴이라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었으나, 적은 나이로 보이지는 않았다.

“무슨 일입니까?”

경일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하하하, 이거 참.”

경일의 태도에 민망한지 멋쩍게 한 번 웃고는 남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저한테 이런 태도를 보인 사람은 정말 오래간만이라 신선하기까지 하네요. 그렇다고 사장님을 질책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는 마시고요. 사장님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요.”

남자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해 댔다.

경일은 그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적개심이 끓어올랐다.

남자의 태도는 정중했고, 아직 이곳에 온 이유도 듣지 않았는데도 남자를 처음 본 순간부터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내가 왜 이러는 거지?’

“하하하하.”

경일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본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뭐, 당연한 반응입니다. 저도 사장님을 보고 있자니 알 수 없는 적개심이 생기는걸요.”

남자의 말은 듣고 있자니, 경일은 점점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러면서 기분은 더욱 나빠져 갔다.

남자는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교묘하게 그 부분을 피해 가며 경일에게 동질감을 표시했다.

“…….”

경일은 말없이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대화할수록 자신이 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대신 묵직하게 가라앉은 눈빛은 말보다 몇 배의 힘이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분이시군요. 뭐, 그렇다고 곤란하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오히려 말이 더 잘 통할 수도 있는 부분이니까요. 오늘 저녁에 만나는 게 좋겠죠? 아무래도 서로 믿음이 없으니 장소는 사장님이 원하는 곳으로 잡으시지요. 여기로 연락 주십시오.”

남자는 매대 위에 명함을 남기고 곧바로 뒤돌아 떠나 버렸다.

경일은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명함을 보았다.

“설마… 이거 순금이야?”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명함의 재질이었다.

묵직한 금빛은 자신이 순금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두께도 일반적인 종이 명함이 아닌 신용카드 두께였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경일이 인상을 찌푸리고 순금 명함을 들여다봤다.

명함에는 이름과 핸드폰 전화번호만이 적혀 있었다.

“명지광? 어디서 들어 본 듯한 이름이기도 한데.”

경일이 순금 명함을 들고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손주아가 지나가다 명함을 보고 다가왔다.

“어머, 이거 진짜 금이에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순금 명함을 보고 손주아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