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255화 (255/300)

[255화] 암던의 주인

“아마 그런 거 같아.”

경일이 궁금해하는 손주아에게 순금 명함을 내밀었다.

“우와~ 얼마나 잘 사는 사람이길래, 이거 못해도 백만 원은 나가겠죠?”

“글세? 나도 잘 모르겠는데.”

“명지광?”

손주아는 순금 명함에 적힌 이름을 보고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왜? 아는 사람이야?”

“에잇, 사장님, 이런 순금 명함을 뿌리고 다니는 사람을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냥 이름이 익숙해서 그래요.”

“누군데?”

“이번에 마운틴 펀치 만든 삼원 그룹 회장 이름이 명지광이잖아요. 순금 명함을 이렇게 뿌릴 정도면… 그런데 그런 높으신 분이 이런 동네에 올 이유는 없을 거고…….”

순간, 경일은 망치로 뒤통수를 후려 맞은 듯 정신이 얼얼해졌다.

‘이런 개자식이!’

손주아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남자의 정체를 알았다.

그는 바로 암던의 주인이었다.

경일은 곧바로 네로에게 달려갔다.

아이들과 놀고 있던 네로를 낚아채듯이 들고 조용한 골목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야?”

네로도 경일의 행동에 당황했는지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암던… 암던의 주인이 나타났어요.”

“뭐?”

늘 반쯤 감겨 있던 네로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암던의 주인이 나타났다니? 정말이야?”

“네.”

경일은 조금 전 명지관이 나타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지? 암던의 주인이 이렇게 나오는 건 듣도 보도 못했어. 너를 반가워했다고? 서로 목숨을 걸고 피 터지게 싸워도 모자랄 판에?”

네로의 놀란 눈이 감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명지관의 행동은 파격적이었다.

“왜 만나자고 한 걸까요? 분위기로 봐서는 싸우자고 하는 거 같지는 않은데.”

“글쎄다. 그리고 서로 정체를 알았다고 해도 사실 치고받고 하는 싸움은 일어나기가 힘들어.”

“왜요?”

“게이트를 열 능력이 있으니까. 설마, 너만 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경일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게이트를 열 능력이 있는 이상, 싸우다 불리하면 언제든지 도망치는 것이 가능했다.

이길호의 경우만 보더라도 경일이 인정하고 그를 진정 믿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게이트가 아예 보이지 않았다.

“그럼, 옛날 던전의 주인은 어쩌다가 죽은 거예요?”

“방심하거나 실력 차이가 너무 나서 게이트로 도망갈 시간을 벌지도 못했던 거지. 어떤 미련한 놈은 싸움을 피하는 건 남자가 명예가 아니라면서 죽을 걸 뻔히 알면서도 덤비다 뒈졌지.”

“허…….”

경일은 네로의 이야기에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암던의 주인은 얼마나 강할까요?”

“모르지? 암던의 활동을 열심히 했으면 지금쯤이면 상당히 강하겠지. 아니, 열심히 안 해도 암던이 생긴 지 오래됐으니 자연히 강해졌을 거야.”

네로의 말에 불안한 듯 경일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너무 쫄지 마. 지금껏 만나 던전의 주인 중 네가 가장 열심히 했어. 비록 던전을 만난 시간이 많이 늦어졌지만, 게이트도 못 열고 당할 만큼 넌 약하지 않아. 그토록 짧은 시간 동안 너처럼 강해진 예는 없으니까, 벌써부터 걱정하지 마.”

네로의 말에 어느 정도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았으나, 명지광의 실력을 모르는 이상 여전히 두려운 건 당연했다.

“만나자고 하는데 굳이 피할 이유는 없겠네요. 장소까지 내가 원하는 곳으로 잡으라고 하는 걸 보니, 싸우자고 온 건 아닌 듯합니다.”

“그래, 내 생각도 그래. 하여간, 이곳에서 겪는 일은 나도 처음이라 내가 조언하기가 좀 그래.”

답이 나온 건 아니지만, 네로와 대화를 하면서 어느 정도 불안을 덜었다.

경일은 곧바로 순금 명함에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까 들었던 명지광의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아홉 시에 보는 걸로 합시다. 장소는 문자는 보내 드리죠.”

“하하하, 실행력이 있는 분이군요. 내가 오늘 만나자곤 했지만, 이렇게 빨리 마음을 정할 줄은 몰랐습니다.”

명지광은 점잖게 얘기했지만, 경일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개소리하지 마. 내가 만만해 보여? 나보다 먼저 던전과 만난 건 인정하지. 그렇다고 네놈이 나보다 강하다고 생각하지 마.”

경일은 기죽지 않고 강하게 나갔다.

싸워 보기도 전에 마음에서부터 지고 들어가는 건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오! 이런, 실례 했습니다. 이거 나도 모르게 그쪽의 신경을 건든 거 같군요. 사과드리지요. 그리고 저는 대화를 원합니다. 싸우려고 했으면 애초에 내가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겠지요.”

명지광이 분명 화를 낼 거라 생각했는데, 곧바로 꼬리를 말았다.

‘뭐지? 이자가 노리는 것이 뭔지 짐작도 되지 않아.’

경일은 명지광과 대화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져 갔다.

도저히 그의 속셈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럼 남은 건, 명지광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방법뿐이었다.

“좋습니다. 얼굴 보고 이야기하죠.”

경일은 곧바로 전화를 끊어 만날 장소를 문자로 보냈다.

그가 약속 장소를 잡은 곳은 시외의 한적한 공원이었다.

처음에는 사람이 많은 장소로 잡으려다 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인류를 멸망시키는 게 목적인 그가 사람들이 많다고 싸움을 마다하지는 않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람이 많은 건 자신의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약속 장소를 문자로 보내고 나자 마음이 복잡했다.

약속 시간까지 제법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동안 경일은 삼원 그룹에 대해 조사했다.

워낙 알려진 그룹이라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많은 정보가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명지광에 대한 정보는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무슨 대기업 회장이란 작자가 이렇게 정보가 없지?’

삼원 그룹은 과거에 여러 히트 상품을 낸 회사였다.

혜성같이 나타나 마운틴 펀치 같은 전혀 새로운 맛의 음료수나, 조미료 등을 개발해 한순간에 덩치를 불렸다.

그리고 돈을 벌어 가장 먼저 한 것은 건설 회사를 인수한 것이었다.

주로 아파트를 지어 분양했는데, 삼원 아파트는 어느 순간 대한민국에서 가장 살고 싶어 하는 아파트 1위에 올라섰다.

그런데 그 이유가 좀 이상했다.

삼원 아파트가 다른 건축 회사들의 아파트에 비해 특별히 잘 지어져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디자인, 편의성 등 모든 것이 다른 회사가 지은 아파트에 비해 부족했다.

더군다나 걸핏하면 부실시공에 대한 이슈가 터졌는데, 그런 아파트에 사람들은 살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 이유는 게이트 때문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삼원이 지은 아파트의 일정 거리 안에서는 게이트가 생성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저 우연히 일치라고 넘겨 버렸지만, 우연이 계속되자 그 생각이 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화두가 바로 안전이었다.

안전을 위해서라면 조금 불편한 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 삼원 그룹에 많은 시선이 쏠렸고, 경영자를 궁금해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명지광은 단 한 번도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게 어느 정도냐 하면, 정부 행사 때에도 참석하지 않을 정도였다.

기업이 권력자에게 밉보여서 좋을 게 없었다.

하지만 삼원 그룹은 이걸 로비로 이겨 냈다.

정부 고위 관료를 지낸 사람을 이사로 받아들이고, 전방위로 뇌물을 뿌렸다.

로비가 통했는지 그 뒤로 명지광이 나타나지 않는 게 당연하게 인식될 정도였다.

삼원 그룹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좋지 않았다.

그들은 인색할 정도로 사회적 책임, 기업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차라리 그 돈이 있으면 뇌물을 더 뿌리고, 정부 요직을 관둔 인사들을 스카우트했다.

오죽했으면 삼원 그룹을 두고 숨겨진 정부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허, 대단하군. 역시 암던의 주인 같은 활약상이야. 그자가 사회에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쳤을지 상상도 되질 않네. 마의 구간도 이번 마운틴 펀치처럼 음식에 암던의 고유 식물을 넣었겠지. 이번에 마운틴 펀치 사건이 제대로 공론화되지 않은 것도 다 이유가 있었군.”

경일은 우해수를 움직여 마운틴 펀치의 해악에 대해 은밀히 소문을 냈다.

지금의 기술로는 마운틴 펀치에 독이 든 것을 발견할 수 없지만, 간접적으로 마운틴 펀치가 문제가 있다는 걸 밝히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레벨이 떨어진 헌터들의 공통점이 전부 마운틴 펀치를 자주 마셨고, 로바 음료를 먹고 레벨을 회복한 건 팩트였으니까.

하지만 소문으로만 돌 뿐, 이걸 보도한 신문사나 방송국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사회에 아주 제대로 자리를 잡았군.”

삼원 그룹이 걸어온 길을 보니 명지광이 만만치 않은 자란 게 느껴졌다.

만약 자신이 먼저 던전과 만났다면 명지광처럼 잘 해낼 수 있었을까?

약속 시간이 다 되어 가자 경일은 차를 몰고 약속 장소로 갔다.

그의 어깨에는 영체화 된 네로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아무런 말이 없었다.

명지광이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했지만, 그들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늦은 시간이라 공원에는 아무런 인적이 없었다.

혹시나 명지광이 자신의 사람을 숨겨 놓은 것이 아닌가 신중하게 주위를 살폈지만, 경일의 기감에 걸리는 이는 없었다.

명지광은 먼저 와 경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던전의 주인을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명지광은 웃음을 띤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경일은 ‘이 새끼 지금 뭐 하는 거지?’라는 표정으로 가만히 손을 보고만 있었다.

“이거 참 민망하군요. 앉으시죠.”

경일은 명지광이 준비한 캠핑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대며 자연스럽게 다리를 꼬았다.

무례한 태도에 명지광이 얼굴이 살짝 굳었다가 펴졌다.

그렇지만 곧바로 표정을 바꾸고는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음료는 뭐로 하시겠습니까? 혹시 몰라 여러 가지 준비했습니다.”

“이제 그만하죠. 어울리지도 않는 짓한다고 본인도 힘든 거 같은데. 우리가 서로 예의 차릴 사이도 아니고. 그리고 그쪽이 예의 있게 행동한다고 해도 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거든.”

“허 참, 젊은 친구가 화끈하군 그래. 그래 나도 많이 불편하긴 했어. 대한민국에서 나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 설사 대통령이라 해도 말이야.”

사람 좋은 표정을 짓고 있던 명지광의 얼굴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했다.

순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지 못할 만큼 표정 변화가 극적이었다.

“보아하니 생각보다 대단하군. 던전과 만난 지 몇 년이 되지 않은 걸로 아는데, 이만큼이나 성장하다니. 놀라울 따름이야.”

명지광의 말에 경일은 등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은 이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게 하나도 없는데, 명지광은 이미 자신의 뒷조사를 모두 끝낸 듯했다.

만약 이런 자리를 만들지 않고 공격해 왔다면, 제대로 대응도 못 하고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좋은 기회를 그냥 포기하고, 이런 자리를 만든 건지 더욱 궁금해졌다.

“많이 궁금한 표정이군. 뭐, 나라도 궁금할 수밖에 없지. 음, 그럼 어디서부터 이야기해 볼까? 그래, 내가 던전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야기하는 게 좋겠군. 이런 거대한 행운을 잡았는데, 누구에게도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말이야. 이런 얘기를 하기에 너만 한 사람이 없잖아.”

명지광은 경일의 의사는 상관없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대한민국 1호 각성자가 이대호로 알려졌지만, 사실 내가 1호 각성자야. 왜냐하면 난 게이트가 열리기 전에 이미 각성했거든. 크크크.”

명지광의 이야기에 경일은 티를 내려고 하지 않았으나, 얼굴이 어두워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이 던전과 늦게 만난 건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나 차이가 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던전을 소유하고 있었으니, 그가 얼마나 강할지 예상조차 되지 않았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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