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256화 (256/300)

[256화] 넌 내 손바닥 위에 있어

“우리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어. 그렇다고 내가 부모님을 원망하거나 싫어하는 건 아냐. 오히려 참 좋아했지. 우리 부모님은 법 없이도 살 만큼 참 좋은 분이었거든. 어쨌든, 가난한 건 정말 힘들어. 먹는 거, 입는 거도 그렇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주변의 시선에 상처를 많이 받았거든.”

어깨를 으쓱인 명지광이 말을 이었다.

“가난한 게 죄는 아니잖아. 그런데 억울한 일을 당해도 제대로 대응조차 못 하고 빌어야 하고. 어린 나이에 그런 일을 당하다 보니 내가 좀 삐뚤어지더군. 강해지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이 세상은 나 혼자다. 돈이 최고다. 이때의 아픔이 나의 좌우명이 되었지. 크크크크.”

추억에 잠긴 듯 명지관이 눈을 반쯤 감았다.

“그러다 던전을 만났어. 우와~ 정말 죽이더군. 이건 뭐, 천국이 따로 없더란 말이지. 난 이걸 기회라 생각했지. 가난에 너무 지쳐 있었거든.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게이트가 열리고, 각성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지. 나를 위한 세상이 온 거야. 난 먼저 돈을 벌었어.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때가 정말 재미있어. 그때는 세상이 더없이 혼란했거든.”

경일은 명지관의 말을 들으면 주먹을 꽉 쥐었다.

얼마나 삐뚤어져 있는 사람이면 그 혼란스럽던 시기가 재밌었다고 말하는 걸까.

“진짜 돈 몇 푼에 무슨 짓이든 다 하는 사람이 널렸었거든. 진짜 왕이 된 기분이었어. 늘 머리를 조아려야 했는데, 그 반대가 되니 얼마나 짜릿했겠어. 그렇게 생활하다가 벨크스라는 이 세계의 누군가와 연결이 됐지. 각성을 하긴 했지만, 레벨이 오르지 않아 이상했는데 벨크스의 일을 도와주니 레벨이 오르더라고.”

경일은 명지관이 던전에서 겪은 일이 자신과 너무 똑같아 놀랬다.

이건 신의 안배인 건지, 최소한 던전을 만난 시점을 빼고는 둘 다 공평한 환경과 조건이었다.

“무척 기뻤지. 돈의 힘이 막강하긴 했는데, 헌터라는 게 생기니 돈의 힘이 약해지더란 말이야. 아무리 돈이 많아도 당장 내 몸 하나 지키기 힘들었지. 그러던 와중에 레벨이 오르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어.”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난 듯 들뜬 표정을 짓고 있는 명지관을 향해 경일이 물었다.

“분명, 네가 강해지는 조건이 인류를 위협하는 일인 걸 알았을 텐데.”

서늘한 경일의 질문에 명지관은 ‘그걸 내가 왜 신경을 써야 하지?’ 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지. 그때는 몰랐어. 그걸 안 건 던전 수호신을 만난 뒤였지. 사실 뭐, 좀 찝찝한 느낌이 있긴 했지만.”

경일도 이 부분은 이해가 됐다.

자신도 처음에는 스탄다비아가 지구와 연관이 있을지 상상도 못 했으니까.

“그럼, 자신의 행위가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만했어야지.”

“음~ 나도 그래서 약간 고민을 하긴 했어. 돈을 좀 번 상태라서 그때는 내가 좀 너그러웠거든. 그런데 말이야, 일정한 활약을 보이지 않으면 던전과의 유대가 약해지고 연결이 끊어진다는 거야. 그땐 정말 놀랐어. 이런 보물이 그냥 사라진다니. 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던전을 택했지.”

경일이 경멸이 가득한 시선으로 명지관을 노려봤다.

하지만 명지관은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여유롭게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내 행동이 잘했다, 못했다 이런 문제로 토론을 하고 싶지는 않아. 난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던전을 버릴 생각이 전혀 없거든. 내가 던전을 버리더라도 누가 알아 줄 거 같아? 그리고 뭘 좀 착각하는 모양인데, 우리의 활약이 네놈이 생각하는 것처럼 절대적이지 않아.”

“…….”

“우리가 캐스팅보트를 쥔 건 맞지만, 그 힘이 엄청나게 강하고 그런 게 아니야. 오히려 아주 약하지. 몬스터와 인류의 전력이 49대 49라고 했을 때, 내가 쥔 힘은 겨우 1이야. 그러니 내가 힘을 보태도 50대 49가 될 뿐이야. 겨우 1의 차이란 말이지. 그러니 나 때문에 인류가 멸망할 거처럼 말하지 마.”

“그 1이 얼마나 큰지 몰라서 그딴 말을 하는 거야? 어디서 말장난을 하는 거야?”

경일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여차하면 여기서 사생결단을 벌이겠다는 의지를 피워 올렸다.

“하하하, 아직 젊어서 그런지 의기가 충천하군.”

“헛소리하지 마. 나는 너보다 더 어렵게 살았어. 그래도 너 같이 살지는 않아. 마치 환경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핑계를 대는 거 같은데, 개소리는 집에서 혼자 벽보고 해.”

“하하하하하하하!”

명지관은 경일의 신랄한 욕에 오히려 속 시원하다는 크게 웃었다.

“그래, 크크크, 맞아. 인정하지.”

그는 웃는 도중 억지로 말을 했다.

얼마나 신나게 웃는지 눈물을 찔끔 흘릴 정도였다.

경일은 그의 행동에서 자신을 얕잡아 본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자신을 애송이로 대하는 그의 행동에 불쾌감이 더욱 커졌다.

어느 정도 웃음이 진정되었는지 명지관은 표정을 정리하고 말을 이었다.

“맞아. 다 인정하지. 그래. 난 나를 위해 던전을 버리지 않았고, 몬스터 편에 섰어. 지금도 아무리 나에게 양심이나 뭐, 이딴 소리를 해도 난 던전을 버릴 생각이 없어. 내가 이야기했지? 이제는 대통령도 내 앞에서 함부로 하지 못한다고. 이런 세상이 얼마나 재밌는 줄 알아? 하루하루가 짜릿해 미칠 지경이야. 이렇게 좋은데, 내가 미쳤다고 던전을 버려.”

명지관은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정색하고 기세를 피워 올리자 경일의 기세가 힘없이 밀려났다.

지금까지 그는 경일을 가지고 놀고 있던 것이었다.

경일이 화를 내든 말든 그에게는 하찮은 벌레가 발버둥 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만큼 강했다.

경일은 지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저항했다.

그러자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그의 기세가 사라졌다.

“이런, 미안하군. 내가 좀 흥분했어. 요즘 나에게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내 감정이 가끔 주체가 안 될 때가 있어.”

너무도 오만한 말이었다.

사과를 빗대어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스스로를 뿌듯해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그는 사과하면서도 옅은 웃음을 띠고 있었고, 말이 끝날 때쯤에는 그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하여간, 내 인생은 지금 너무 만족스러워.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긴 거야. 몬스터가 강해지는 반면, 헌터들의 전력은 나아지지 않았어. 던전이 처음 나타났을 때만 해도 대승적인 차원에서 똘똘 뭉쳐 몬스터를 압도하던 시기도 있었어. 하지만 어느 순간이 지나자 이것들이 배가 부른 거야. 던전에 익숙해지기 시작하자 몬스터를 막기보다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 살기 시작한 거지.”

명지관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때는 정말 실망했어. 그래도 위기가 계속되면 뭉치지 않을까 하고 지켜봤지만, 오히려 몬스터가 아닌 자기들끼리 싸우기 바쁘더라고. 이대로 가다가는 인류가 멸망하게 빤히 눈에 보이는데, 이거 미쳐 버리겠는 거야.”

경일은 명지관의 말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분명 자신의 적인 헌터들의 이기적인 행실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아이러니한 상황이란 말인가.

“그래서 난 반대쪽 던전의 주인을 기다려 왔어. 이대로 가다가는 인류가 곧 멸망할 거 같았으니까.”

“무슨 헛소리야? 그렇게 인류를 걱정했으면 던전을 버렸어야지.”

경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발끈했다.

그가 인류를 걱정하는 모습이 정말이지 썩은 물을 마신 거처럼 역겨웠다.

마의 구간을 만들고, 헌터들의 레벨을 떨어뜨리고 각성을 방해한 자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하하하하! 이거 내 말을 오해하고 있군. 내가 먼저 말했잖아. 지금의 내 생활에 정말 만족하고 있다고. 이 말이 가장 중요한 거야. 난 이 생활을 계속 누리기를 원해. 그런데 말이야, 인류가 멸망하면 이 좋은 생활을 누릴 수가 없게 된다고.”

“설마…….”

“그래, 인류의 멸망을 위하는 건 던전 수호신의 의지일 뿐, 내 의지는 아냐. 그래서 난 반대쪽 던전의 주인을 기다렸어. 역시 내 예상은 맞았지. 첫 등장부터 파격적이더군. 던전병을 치료하고, 마운티 펀치를 박살 내면서 마의 구간까지 한꺼번에 해결해 버리더군.”

명지관은 아들을 칭찬하는 아버지 같은 대견한 눈길로 경일을 바라봤다.

반면 그 눈빛이 너무 싫었던 경일은 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인류가 멸망하지 않은 이유가 뭐라 생각해? 헌터들이 열심히 몬스터를 막았기 때문에? 물론 그것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내가 던전이 원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아서야. 너는 모르겠지만, 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 왔어. 던전이 원하는 대로 했다가는 인류가 멸망할 테고. 안 그러자니 던전이 나를 떠날 테고. 그래서 난 지금까지 피 말리는 줄다리기를 했다고. 아슬아슬하게 던전이 떠나가지 않은 한도 내에서 던전이 원하는 작업을 말이야.”

명지관은 그때를 생각하면 진저리가 난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약 내가 악한 놈이었다면 마의 구간은 더 지독했을 거야. 아마 수십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던전병에 시달렸을 테지. 이번에 마운틴 펀치를 낸 것도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었다고. 이게 퍼지면 나올 시나리오가 눈에 빤히 보이는데. 그렇다고 안 하면 유대가 약해져 던전이 떠날 수도 있고 말이야. 그건 절대 안 되지. 난 지금의 내 생활을 절대 포기하지 못하거든. 그래서 내가 너를 애타게 기다려 온 거야. 가족보다 더 말이야.”

경일은 이게 무슨 참신한 개소리인가 했다.

말은 길었지만, 결론은 혼자 잘 먹고 살기 위해 인류에게 해가 될 활동을 할 테니, 자신보고 그걸 막으라는 이야기였다.

다른 경우라면 ‘내가 미쳤냐? 내가 그런 짓을 왜 하냐?’라면서 얼마든지 그 역할을 벗어날 수 있을 테지만, 지금 경일의 처지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경일은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꺼내 기습을 한다면 눈앞의 남자를 죽여 버릴 수 있을지 가늠했다..

그의 눈은 투지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워, 워, 워. 릴렉스, 릴렉스.”

명지광은 곧바로 경일의 분위기를 눈치챘고, 두 손을 들어 손바닥이 보이게 흔들면서 말렸다.

“참고로, 지금 싸우면 넌 백 퍼센트 나한테 죽어. 네가 얼마나 강해졌는진 모르지만, 내 눈에 넌 아직 애송이야. 내가 너를 죽이려면 백 번도 더 죽일 수 있었어. 네가 나를 모르는 상태에서 기습했다면, 넌 백이면 백 다 죽었어. 내가 널 살려 준 거랑 마찬가지니 너무 그렇게 까불지 마.”

비릿한 미소를 지은 명지관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지금은 서로 정체를 알아 죽이긴 힘들어도, 네가 게이트로 도망가기까지 약간의 교훈을 주는 것쯤은 눈 감고도 할 수 있어. 그러니 그렇게 건방 떨지 말라고. 네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네가 던전의 주인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던전의 주인이 된 게 사실 네 능력도 아니잖아.”

경일은 피가 나도록 이를 악물었다.

명지관이 펼치는 기세가 너무 강해 움직이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등에선 식은땀이 흐르고 본능은 알아서 머리를 숙이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마치 천적을 만난 동물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머리를 숙일 수는 없었다.

자신은 자존심이 없는 동물이 아니었다.

최소한 자신의 의지는 보여야 했다.

“씨발, 내가 너를 못 죽일 거 같아? 그래, 지금은 모자랄지도 모르지. 하지만 언젠가 넌 내 손에 죽어.”

“하하하하하하!”

명지관은 경일의 협박을 귀엽다는 듯이 화통하게 웃어넘겼다.

“그래. 그건 네 선택이니 말리지는 않을게. 뭐, 내 수명이 다하긴 전에는 힘들 거 같으니 별로 관심도 없지만.”

명지관은 경일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캠핑 의자 옆에 있던 아이스박스를 천천히 열어 그 안을 살폈다.

“음, 뭘 마실까?”

그와 동시와 명지관의 등이 경일을 향해 활짝 열렸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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