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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257화 (257/300)

[257화] 우리 같은 사람들

하지만 경일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명지광이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는 걸 빤히 알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경일의 본능은 이미 패배를 직감하고 있었고, 명지광이 주는 공포에 빠져 있었다.

명지광이 적당해 보이는 와인을 하나 따며 경일을 향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씨익 웃어 보였다.

“자, 이건 한잔하자고. 내가 제안할 게 하나 있어.”

티끌 하나 없는 깨끗한 와인 잔에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와인을 명지광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잔이 넘치도록 부었다.

그는 와인이 그득한 와인 잔을 경일에게 내밀었다.

와인의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경일은 말없이 와인을 받아 마셨다.

“맛 괜찮지? 이게 한 명에 이천만 원이 조금 넘어. 지금 네가 마신 게 오백만 원쯤 될 거야. 우리는 이런 걸 물처럼 마셔도 되는 선택받은 사람들이야. 그런 우리가 서로 반목할 이유가 어디 있어? 서로 도우면서 이대로 사는 거야. 지구에 몬스터가 나타난 게 우리 잘못은 아니잖아. 우리 둘이 협력하면 몬스터와 헌터들이 보다 공평한 싸움을 할 수 있잖아.”

명지광은 말도 되지 않는 궤변을 계속 늘어놓았다.

“난 던전의 혜택만 누리면 돼. 그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좋은 조건이잖아. 너도 괜히 던전의 주인이니, 인류를 구해야 하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고. 네가 좋아하는 분식점 하면서 원하는 대로 살면 돼. 권력자가 되고 싶으면 말만 해. 내가 아주 네 앞길을 꽃길로 깔아 주지. 넌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

명지광이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경일을 설득했다.

언뜻 들으면 그의 제안은 나쁘지 않았다.

서로 협력해 몬스터와 인류의 싸움에서 빠지자는 것.

경일도 네로에게 이 세계의 진실을 듣고 자신의 역할 때문에 얼마나 어깨가 무거웠는가.

한동안 그를 누르는 압박감에 밥을 먹어도 토하기 일쑤였다.

“난 네 제안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어. 그래, 몬스터가 나타난 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너 혼자만 잘 먹고 잘살자고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준 건지 알아? 너의 이기적인 선택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던전병과 마의 구간에 갇혀 고통을 받았어. 이건 모두 너의 결정에 따라 일어난 일이야.”

경일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애써 다스리며 담담히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도 넌 반성조차 없이 너만 잘 먹고 잘살면 된다는 거잖아. 그리고 난 체질적으로 몬스터가 싫어. 우리 부모님은 내가 보는 앞에서 몬스터에 찢겨 돌아가셨지. 난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몬스터가 지구에서 설치는 꼴? 난 절대 못 봐.”

경일은 그의 제의를 거절했다.

지금까지 경일이 보아 온 세상은 너무도 불합리했다.

거기다 어릴 적 몬스터에게 당해 돌아가신 부모님의 모습은 그에게 강렬한 트라우마로 남았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졌다.

그리도 또 하나, 던전병에 고통받는 사람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지 않았는가.

지금은 가족이 된 선호연, 너무나 작고 여린 수아 그리고 비후초가 들어간 죽을 얻으러 온 사람들을 통해 던전병에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을 보았다.

“하하하하! 아직 어리군.”

명지광은 한심하다는 듯이 경일을 내려다봤다.

“네가 내 제의를 거절하든 말든 별 상관없어. 사실 네 의사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거든. 그런데도 내가 너의 의사를 물은 건, 던전을 가진 사람에 대한 단순한 예의였을 뿐이야. 넌 어차피 내 말대로 할 수밖에 없거든. 나를 죽이지 못하는 이상, 넌 내가 하는 행동을 전력으로 막아야 해. 그런데 이거 어쩌나? 나를 죽이는 건 영영 불가능할 거 같은데?”

경일은 명지광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앞으로 내가 할 일들이나, 던전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려 줄 거야. 그럼 넌 좆빠지게 그걸 막아 내면 되고. 그럼 난 계속해서 던전의 혜택을 누리며 기분 좋은 삶을 이어 가면 되는 거지. 이게 앞으로 벌어질 일이야. 그러니 내 앞에서 건방 떨지 말고 네 일이나 열심히 해.”

명진광의 말에 반박할 건덕지가 없었다.

분하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그의 의도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맥박이 빨라지고, 심장이 요동치고 온몸이 덜덜 떨려 왔다.

이 상황이 분하고, 억울한데…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 경일을 보는 명지광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고는 천천히 일어나 부르르 떨고 있는 경일의 어깨를 가볍게 치고 입을 열었다.

“이거,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네. 나 좀 만나 달라는 국회의원들이 줄을 서고 있어서 말이야. 나 같이 별거 아닌 사람이 이렇게 된 걸 보면 인생이 참 재밌고 신나. 이렇게 재미있는 인생이 또 있을까? 하하하하!”

명지광은 돌부처마냥 앉아 있는 경일을 내버려 두고 걸어 나갔다.

“아 참~ 그 아이스박스에 괜찮은 술이 많아. 돈 주고도 구하기 힘든 걸로만 가져왔으니 맛있게 먹어. 동업자를 위한 내 선물이라고 생각해.”

그는 그대로 차를 몰고 사라졌다.

“동업자?’

이가 갈렸다.

“내가 너 같은 놈의 동업자라고?”

명지광이 남기고 간 말에 경일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아이스박스를 그대로 던져 버렸다.

병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붉은 와인이 흘러내렸다.

“미안해. 내가 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이렇게 늦게 던전을 만나지 않았을 텐데. 나 없이 혼자서 이렇게 훌륭하게 해 온 너에게 면목이 없다.”

흥분한 경일을 향해 네로가 사과했다.

그의 사과에 경일은 어느 정도 흥분이 가라앉았다.

경일은 네로가 자신의 사명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닙니다. 네로님의 잘못이 아니에요. 화가 좀 가라앉으니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저런 성격이, 아닌, 다른 이가 암던의 주인이 됐으면 기회조차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건 저놈에게만 유리한 조건이 아닙니다. 나에게 시간을 보장해 준 거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저자에게 농락을 당한 것이 분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시간을 벌었잖습니까. 제가 최선을 다해 저놈과의 격차를 줄이겠습니다. 이대로 당하고 물러서는 건 저랑 안 맞거든요.”

지금까지의 경험이 헛되지 않았는지 경일은 한층 성숙해져 있었다.

빠르게 화를 가라앉힌 경일은 현실을 냉정하게 분석했다.

겉으로 보기에 이 만남은 명지광에게 완전히 주도권을 뺏긴 것처럼 보였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일단 명지광은 자신이 필요했고, 공격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은 것만 해도 큰 수확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수확은 역시 자신을 자유롭게 놔두고 시간을 주었다는 점이다.

‘급하게 생각할 거 없어. 어차피 내 무기는 거북이처럼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거야.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토끼를 잡을 날이 오겠지.’

경일의 눈이 단단하게 빛났다.

* * *

스탄다비아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종이의 생산까지 이루어지면서 스탄다비아는 베르아스 왕국의 폭풍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비누와 염색된 천, 그리고 종이, 마지막으로 제련술의 발달도 왕국에서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강철을 만들어 냈다.

상인은 물론 무기의 구매를 원하는 용병들, 그리고 베르아스 왕국을 떠도는 유민은 물론이고 귀족의 횡포에 견디지 못하고 영지를 탈출한 사람들까지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찾아왔다.

스탄다비아로 오기 위해 굳이 몬스터 숲을 가로질러 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인데.

스탄다비아를 따라 흐르는 강에 배에 타고 있기만 하면 물살이 알아서 데려다주었다.

아무리 재산이 없는 사람도 나무를 베어 뗏목을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이건 모두 자포리자의 의도였다.

그는 첩보장 블라도에게 은밀하게 스탄다비아에 오면 땅과 집을 준다는 소문을 퍼트리도록 명령했고,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스탄다비아로 몰려들었다.

프라인과 아드리온의 영지민들의 대규모 이주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스탄다비아로 들어오면서 크고 작은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일단 가장 시급한 것은 역시 치안이겠지요.”

자포리자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정기 회의로, 스탄다비아의 현안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는 날이었다.

“제가 먼저 보고하겠습니다.”

스탄다비아에 많은 인구가 유입되면서 가장 바빠진 치안 대장 윌커슨이 자리에서 일어나 보고를 시작했다.

“현재 영지의 치안은 매우 불안한 상태입니다. 순식간에 늘어난 인구에 대해 준비한다고 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인구의 증가로 치안대의 역량을 넘어선 상태입니다.”

“음…….”

자포리자가 신음을 흘리며 윌커슨의 보고에 집중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 크고 작은 범죄들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용병, 유민, 종교인, 상인들이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영지에서 작은 소란이라도 일으키면 곧바로 추방이라는 사실을 얘기했는데도 그런단 말이지?”

“몇 명 확실히 본보기로 추방을 한 뒤에는 줄어들긴 했지만, 치안대의 눈이 미치지 못한 곳에서는 끊임없이 범죄가 일어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 피해는 모두 열심히 사는 영지민에게 돌아갈 것이고. 음…….”

자포리자가 골치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엄지로 쿡쿡 눌렀다.

“영주님, 제 의견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카스만이 사람들의 대화가 잠시 끊어진 틈에 조용히 말했다.

“말씀하세요.”

“너무 급박하게 인구가 늘어난 면이 있습니다. 이 이상 사람들이 늘어나면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질 거 같습니다. 이제 속도 조절이 필요한 때라 생각됩니다. 이미 들어온 인구는 어쩔 수 없겠지만, 더 이상의 유입은 막아 영지의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듯합니다.”

카스만의 말이 끝나자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이 사람들이 작게 고개를 끄떡였다.

자포리자도 그의 의견이 틀리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급하게 서두른 일은 반드시 탈이 나기 마련이었다.

스탄다비아는 프라인과 아드리온의 영지민들까지 들어와 있는 상태라 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자포리자가 이렇게 무리해서 스탄다비아로 사람들을 받아들인 건, 인구가 바로 힘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천히 인구를 늘여도 될 만큼 지금 상황이 낙관적이지 않았다.

경일에게 암던의 활동을 들은 터라 마음이 급해진 것도 있었다.

자포리자는 최대한 빨리 스탄다비아를 안정시킬 생각이었다.

이왕 겪어야 할 일, 힘들겠지만 스탄다비아의 저력을 믿었다.

“스탄다비아를 믿고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도로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부분은 조금 더 생각해 보는 걸로 하죠.”

“알겠습니다, 영주님.”

카스만은 자포리자의 의견에 순순히 물러났다.

누구보다 그의 능력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자신의 의견이 전달되었으니 조만간 해결책을 찾을 거라 믿었다.

“인구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프라인과 아드리온의 영지민들이 이주해 온 터라 엄청난 물자가 들어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거기다가 유민들까지 들어오고 있어 앞으로 들어갈 물자가 상상도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다들 열심히 한다고 해도 첫 수확을 하기 전까지는 지원을 해야 하는데, 걱정이 큽니다.”

행정관 사미르는 하루하루 마음을 졸였다.

스탄다비아에서 하루에 소비하는 식량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런 대규모의 지원이 앞으로 몇 달이 더 이어져야 하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올해는 전국적으로 흉년이 들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식량을 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그들이 살 마을을 건설하고 집을 짓는데 들어가는 물자도 만만치 않았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선인님은 누구보다 스탄다비아 상황을 잘 알고 계신다. 이미 모든 영지민이 몇 달은 놀고먹어도 될 만큼의 지원이 도착한 상태다.”

“알겠습니다.”

자포리자의 말에 사미르의 걱정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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