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새로운 일꾼
“좋아. 역시 든든하군.”
자포리자가 하칸을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곤 윌커슨에게 눈길을 주었다.
눈길을 받은 윌커슨이 보고를 다시금 이어 갔다.
“이번에 종이를 판매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른 종교들이 거세게 전쟁 참여 의사를 밝혔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우스 교는 다른 종교의 참여를 더 이상 원하지 않았고, 대신 출병 날짜를 당겼다고 합니다.”
“그럼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나 남은 거지?”
“대군이 움직이는 터라 최소 5개월은 걸릴 듯합니다.”
“5개월이라… 칼튼.”
“네, 영주님.”
기사단 칼튼이 자포리자의 부름에 곧바로 대답했다.
“준비 상황은 어떤가?”
“당장에라도 싸울 수 있을 만큼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스탄다비아로 들어오는 협곡 방벽 공사는 모두 마무리되었고, 방벽 앞의 해자도 건설도 끝난 상태입니다. 현재 해자에 물을 채워 줄 수로를 건설 중인데, 이 또한 며칠 안으로 완공될 예정입니다.”
“이번에 합류한 프라인과 아드리온 병사들은 잘 적응하고 있나?”
“네. 이미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자발적으로 스탄다비아의 병사가 되기를 원하는 자들만 뽑았고, 그들이 안심할 수 있게 그들의 가족을 우선적으로 지원해 정착이 끝난 상태입니다. 다들 힘들게 살아온 터라, 스탄다비아에 정착한 걸 무척이나 기뻐하고 있습니다.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던 차에 좋은 무기와 갑옷, 음식, 기존보다 늘어난 월급에 모두 만족하며 열심히 훈련받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기존의 병력보다는 실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을 텐데, 융합은 잘되고 있나?”
“기존 병사들의 텃세가 없을 수는 없으나, 그리 심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군기가 워낙 확실하고, 무엇보다 영주님이 차별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모두 잘해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좋아. 그래도 더 신경 쓰도록. 만약 군법을 어기는 자가 나오면 일벌백계 차원에서 엄중하게 문책하도록.”
“알겠습니다. 영주님.”
칼튼은 대답 후 보고를 이어 갔다.
“마나 연공법의 보급으로 마나를 깨우친 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동안 몸속에 쌓여 온 마나가 어느 시점에 도달한 것이 그 원인으로 생각됩니다. 모두 기사를 희망했고, 다음 주 내에 서임식을 열 계획입니다.”
스탄다비아의 기사들은 특별했다.
권세 있는 귀족도 구하기 힘든 전설의 금속인 미스릴 검과 갑옷을 지급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나 연공법 하권도 익힐 수 있었다.
병사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던 기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최고의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기사가 되는 것이 어렵지, 기사가 된 뒤 실력을 늘리는 것은 더욱 쉽다는 사실이었다.
일평생 구경도 못할 마나 포션을 공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거 좋은 소식이군. 기사 서임식이 끝나면 오래간만에 잔치를 한 번 열자고. 소속감을 높이는 데에는 그만큼 좋은 거도 없지.”
“알겠습니다, 영주님.”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서 끝내기로 하지.”
다음 날, 각 마을과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게시판이 세워지고, 종교인을 신고하는 자들에게 현상금 100골드를 준다는 벽보가 붙었다.
역시 돈의 효과는 직방이었다.
여기저기서 온갖 제보가 쏟아져 들어왔고, 치안대는 제보의 내용을 토대로 스탄다비아에 숨어 들어온 종교인들을 일망타진했다.
종교인을 신고한 자에게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직접 100골드를 지급했고, 그 모습을 보자 사람들은 눈이 뒤집혀 종교인들을 찾아다녔다.
그들을 감옥에 모두 수용하는 건 불가능해서 내성에 있는 창고로 보내졌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종교인들이 스탄다비아로 들어온 건가?”
잡고 보니 그 수가 수백 명이 넘었다.
자포리자가 그들을 보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간을 찡그렸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요? 감히 종교인들 핍박하다니! 이렇게 죄도 없는 사람을 무작정 잡아 가두다니. 하늘이 두렵지 않으시오! 당신은 신이 내린 벌이 두렵지 않단 말이오!”
제법 대가 센 종교인 한 명이 자포리자를 향해 삿대질하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창고에 갇혀 눈치만 보던 종교인들도 이때다 싶었는지 서로 동조하며 온갖 욕과 저주를 퍼부어 댔다.
퍼억!
“윽!”
타격음과 신음이 동시에 터졌다.
가장 앞장서서 선동하던 종교인이 두툼한 몽둥이를 맞고 날듯이 뒤로 쓰러진 것이다.
급하게 쓰러지는 종교인을 받아 낸 종교인들이 몽둥이를 휘두른 이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노려보지만, 남자는 오히려 그 시선을 즐기는 듯 실실 웃음을 흘렸다.
“이런 것들은 매가 약이지. 또 내가 그런 거에는 일가견이 있거든.”
남자가 하늘 높이 쳐든 아무런 재주가 없는 사람이 만든 듯한 투박하고 튼튼한 몽둥이가 종교인들의 시선을 끌었다.
“뭐, 저런…….”
철의 가격이 비싼 이곳에서 애들 장난처럼 만든 어설픈 몽둥이라니.
그런 몽둥이를 든 남자를 본 종교인들의 입가에 조롱기가 맺혔다.
“이것들이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남자는 종교인들을 향해 몽둥이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아아아아악!”
“허억!”
“으윽.”
“그, 그만!”
그 말대로 남자의 손속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고, 한 대 맞을 때마다 종교인들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악을 쓰듯이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남자의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상대가 완전히 굴복했습니다. 광산으로 이동을 원하십니까? Y / N]
남자의 정체는 경일이었다.
스탄다비아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들어가는 물자도 양도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해성 길드와 손을 잡은 이상 물자를 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문제는 던전에서만 생산되는 물자에 있었다.
스탄다비아의 군대뿐만 아니라 해성 길드에서 원하는 미스릴의 양이 늘어난 것이다.
경일의 입장에서도 헌터들의 전력이 늘어나니 미스릴의 공급을 늘려야 했다.
하지만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의 수가 정해져 있으니 생산량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요즘 경일에게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없어 일할 사람을 구하는 게 힘들었던 것이다.
이에 경일은 고민하다 한 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던전은 지구에만 연결된 것이 아니잖아. 혹시 스탄다비아 사람들도 광산으로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실험은 간단했다.
스탄다비아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한 대 후려치자, 곧바로 경일이 원하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자포리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그는 아예 현상금을 걸고 종교인을 잡아들일 것과 가신들에게 독립을 선언하며 도박장 폐쇄를 명령했다.
거기다 영지민에게 행패를 부르는 깡패들의 소탕까지.
광산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굴복해야 했기에, 오래간만에 경일의 뭉툭한 미스릴 몽둥이가 춤을 추었다.
퍽퍽퍽퍽퍽퍽!
사람이 많은 만큼 매타작은 쉬이 끝나지 않았다.
확실히 스탄다비아 사람들이 지구인과 비교하면 독종이었다.
힘든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지 이들은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이거, 이놈들을 광산에 보내 놓으면 기존의 녀석들은 기도 못 펴겠는걸? 에이, 뭐 알아서들 하겠지.”
광산에 있는 사람들의 걱정을 순식간에 날려 버린 경일의 매타작은 계속됐다.
아무리 독해도 매에는 장사가 없는 법.
시간이 조금 더 걸렸을 뿐이지 결과는 똑같았다.
그렇게 수백 명의 사람이 광산으로 보내졌다.
다음 날은 도박장 폐쇄 과정에서 반항한 이들이 잡혀 왔다.
이미 치안대와 싸우다 기운이 빠졌는지 이들은 보다 쉽게 굴복했다.
경일은 광산에 늘어난 사람만 봐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이들은 암던과의 싸움에서 본의 아니게 큰 역할을 담당할 것이었다.
광산이 범우주적인 노역 현장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또 한 가지의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던전 고유 식물의 생산이었다.
광산은 누군가 대신 일해 준다고 해도 던전 고유 식물 재배는 그럴 수가 없었다.
경일과 이길호가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그들로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마의 구간을 암던이 퍼트렸다는 사실을 안 뒤, 영인초 재배에 온 힘을 집중했다.
그 덕에 대한민국에서 마의 구간을 없애는데 큰 도움이 됐으나, 문제는 수출이었다.
수출까지 생각지 못했던 경일은 부랴부랴 영인초 재배를 늘렸다.
하지만 수출 물량을 맞추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영인초에 모든 시간을 쏟아 붓다 보니 다른 던전 고유 식물 수확이 불가능해질 정도였다.
이에 경일은 고민하다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네로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뭐?”
“혹시 광산에 있는 사람들에게 던전 고유 식물 재배를 시킬 수 있습니까?”
“아직 해 본 적은 없는데, 광물을 캐는 것이 가능하니 될 거 같기는 한데? 하지만 확실히는 모르겠는걸. 그리고 가능하다 해도 광물을 캐는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서 신경이 많이 쓰일 거 같은데…….”
“꽃게 어떻습니까? 거기다 철에 맞는 해산물까지. 이번 달에는 갈치랑 고등어가 맛있을 건데, 특히 고등어는 기름기가 자르르.”
네로가 침을 흐르면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오랜 시간을 살아왔어도 유난히 바다와는 인연이 없던 터라 네로는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을 특히 좋아했다.
“역시 제철 해산물이 최고라니까.”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물을 모두 먹고 난 네로가 만족한 듯 불룩 튀어나온 배를 두들겼다.
그런 그를 경일이 은근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거 다 뇌물인 거 알고 있으니까, 그런 눈으로 바라볼 거 없다. 이 정도 성의를 보였는데 나도 최선을 다해야지.”
그와 동시에 광산이 있는 곳에 지진이 일어났다.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사람들이 놀라 모두 바닥에 엎드렸다.
네로가 힘을 쓰자 광산이 있는 지대가 몇 배로 넓어진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스탄다비아 사람들 일부가 농사를 시작했다.
스탄다비아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농사일을 한 적이 있어 적응이 빨랐던 탓이다.
네로의 교육으로 비닐하우스가 세워지고, 던전 고유 식물 재배가 시작되었다.
앞으로 스탄다비아뿐만 아니라 지구에도 더 많은 포션을 공급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일이 줄어든 경일은 우선 마나 연공법 수련 시간을 대폭 늘렸다.
앞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자신의 무력이라는 것을 여실히 느낀 탓이다.
* * *
암던의 주인과 만난 뒤에도 일상은 변함없었다.
여전히 햇빛은 쨍쨍했고, 분식점은 손님으로 넘쳤다.
게이트는 계속해서 생겨났고, 던전들은 헌터들의 활약 덕분에 그 즉시 폐쇄되었다.
마의 구간을 빠져나온 헌터들이 늘어나면서 헌터 관련 산업은 호황을 누렸다.
모든 게 좋아 보이는 와중, 유난히 걱정이 가득한 이가 있었다.
“여보, 뭐 해요?”
“응?”
“아이, 참. 음식이 나왔는데 멍하니 서 있기만 하면 어떡해요. 음식 식기 전에 얼른 손님에게 가져다주세요.”
“어… 그래.”
손호연의 재촉에 이길호는 그제야 부랴부랴 음식을 날랐다.
요즘 따라 이길호가 좀 이상해서 손호연은 신경이 쓰였다.
“여보, 도저히 안 되겠어요.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어요.”
계속해서 실수하는 이길호를 보다 못한 선호연이 걱정하며 말했다.
“어… 그래…….”
이길호는 매대에서 아이들을 챙겨 주고 있는 경일에게 다가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분식점을 나왔다.
선호연의 말과 달리 그는 집으로 가지 않았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는 목적지 없이 눈앞에 보이는 길을 따라 걷고만 있었다.
이길호는 요즘 한마디로 표현하면, 잘나갔다.
마의 구간을 벗어나고 그는 빠르게 레벨 업을 했다.
경일이 우해수에게 특별히 부탁했고, 그는 해성 길드의 객원 맴버로 던전 폐쇄에 참여했다.
오직 스탄다비아에만 공급되는 기존의 마나 포션의 몇 배의 효과가 있는 키아노티로 만든 마나 포션을 먹고, 마나 연공법까지 익힌 터라 경일을 제외하고 지구에서 가장 빠르게 많은 레벨을 올린 비공식 기록을 가진 헌터가 됐다.
경일이 가진 던전까지 공유하며 남부러운 거 없던 그가 이렇게 심각해진 건, 바로 경일 때문이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