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깜짝 선물
경일은 명지광을 만나고 온 뒤, 유일하게 이길호에게만 지구의 숨겨진 비사를 모두 이야기했다.
몬스터가 지구를 점령하기 위해 인간을 멸종시키려 하고, 그런 몬스터를 돕고 있다는 암던의 주인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 반대편에 선 자신이 인류를 도와야 한다는 사명까지 모든 것을 밝혔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인물이고, 던전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자신의 일을 누구보다 열심히 도와주는 이길호에게 진실을 숨긴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더군다나 이길호가 티를 내진 않았지만, 그도 자신이 모르는 비밀이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마음의 부담을 지우지 않으려 최대한 숨기고 있었지만, 오히려 이런 모습을 보고 서운해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이제는 없어선 안 될 이길호에게 이왕 이렇게 된 거 모든 걸 털어놓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이길호는 이 엄청난 이야기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흔히 볼 수 있는 한 가정의 가장인 그에게 이 세계의 진실은 너무도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인류의 멸망이니, 이런 건 어릴 때 잠자기 전 하는 공상 같은 거였다.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현실이 되었으니, 그가 이렇게 혼란해하는 건 당연했다.
한참 길을 헤매던 이길호는 어느 정도 머릿속을 정리했다.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한 발을 내딛으려 애썼다.
‘사장님이 대단한 인물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그가 내디딘 한 발이 경일에게 오히려 폐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곧바로 걱정을 떨쳐 버렸다.
그는 이미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가 살아온 삶에서 어느 정도 깨달았기 때문이다.
손호연이 아팠을 때, 그는 하늘이 무너진 거 같았고, 사방이 막힌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때 이길호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었다.
괴로워할 시간에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노력했고, 그런 노력이 경일을 만나게 해 줬는지도 몰랐다.
‘더 열심히 하면 되겠지.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거밖에 없으니까.’
이길호는 단단히 결심하며 앞으로 아내와 아들을 더 많이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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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광과 만난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하지만 그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앞으로 어떤 일을 저지를지 궁금해할 무렵, 명지광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경일아, 잘 지냈어?”
명지광은 친한 동생에게 말하듯 반가운 목소리로 안부를 물어 왔다.
순간, 자신을 가볍게 보는 그의 행동에 경일은 욱하고 격한 감정이 일어났다.
“무슨 일이지?”
서리가 내려앉을 만큼 경일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어허, 어른이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말이야. 버릇없이 말이야. 뭐~ 내가 이해해야겠지. 던전을 만나고 세상을 다 가진 줄 알고 행복에 겨워하고 있었을 텐데, 알고 보니 그게 모두 혼자만의 망상이었던 걸 알았으니 속이 상할 만도 하지. 그러게, 내가 내미는 손을 잡았어야지. 그럼 망상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었잖아. 안 그래.”
명지광이 은은한 말투로 경일을 살살 구슬렸다.
“그런 개소리가 나한테 통할 거 같아? 그딴 개소리는 네놈 똥이라도 먹으려고 달라붙어 있는 금붕어 새끼들에게나 해. 알겠어?”
하지만 경일은 그의 꼬드김을 오히려 욕으로 받아쳤다.
“너… 그렇게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면 큰일 난다.”
경일의 무례한 말에 명지광은 이를 갈며 읊조리듯 말했다.
하지만 그의 화난 듯한 목소리가 오히려 경일의 기분을 좋게 했다.
“흥, 어디 한 번 마음대로 해봐.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와 손잡는 일은 없을 거야. 그리고 이런 쓸데없는 소리나 할 거면 전화 끊는다.”
“잠깐만, 잠깐만. 내 말 아직 안 끝났다. 만약 이 전화를 끊으면 크게 후회하게 될 거야.”
명지광의 다급한 목소리에 이어 그의 벌게진 얼굴이 눈앞에 생생하게 보이는 듯했다.
“너, 내가 시간을 줬는데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명지광의 목소리에서 살기등등한 묵직한 압박이 느껴졌다.
더 이상 그를 자극했다가는 무슨 사달이 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
“그래, 그래야 착하지. 아직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힘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거 같아 이번에는 특별히 넘어가지. 하지만 다음번에도 이러면 재미없을 줄 알아.”
경일이 전화를 끊지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자, 그의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졌다.
“…….”
명지광의 협박에도 경일은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더 이상 이야기해 봤자 소용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지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어른으로서 한 번 더 기회를 주려고 했는데, 너는 말로는 안 되는 아이구나? 그래서 너를 위한 깜짝 선물을 하나 준비했어. 너의 처지를 확실히 알려 주려고 말이야. 지금까지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는 거니까, 기대해도 좋을 거야. 아마 이 일을 겪고 나면 너의 그 뻣뻣한 목에서 힘이 좀 빠지겠지. 그럼 잘해 보라고. 크크크.”
명지광의 목소리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이를 듣고 있던 경일은 반대로 짜증이 밀려들었다.
알듯 모를 듯한 말을 남기고 명지광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깜짝 선물이라니, 뭘 말하는 거지? 분명 좋은 게 아니라는 건 확실한데…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건 별론데…….”
하지만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가슴에 묵직한 바위가 들어찬 듯 무척 답답했다.
“네로님.”
경일은 조금 전 명지광과의 통화 내용을 알렸다.
“이거, 좋지 않은걸.”
네로의 얼굴이 심각하게 바뀌었다.
“그날 봤던 암던의 주인은 무척 오만해 보이던 자더군. 지금까지 적수가 없었으니 그런 성격이 된 게 무리가 아니지. 그러다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나타났으니… 말은 안 했지만, 신경이 많이 쓰일 게 틀림없어.”
“그건 그렇죠.”
“지금까지 네가 등장하지 않았던 만큼, 모아 둔 힘이 상당할 거야. 너에게 경고를 할 만큼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무리하는 한이 있더라도 보여 주려고 할 거야. 따라서 이번 일은 심상치 않을 거야.”
“이거, 큰일인데요.”
공격 예고를 받았는데, 어떤 공격이 들어올지는 모르는 상황.
더군다나 공격하는 주체가 무리할 정도로 큰 공격이 예상되는 지금.
그저 손을 놓고만 있어야 하는 게 너무 답답했다.
경일은 오래간만에 스킬을 실행했다.
인벤토리 다음으로 큰 도움을 주었던 사람 찾기 스킬을.
어떻게 보면 경일의 비장의 한 수기도 했다.
곧이어 그가 있는 곳이 어딘지 느낌이 왔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달려가 그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건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경일보다 강하기도 했고, 어디서든 게이트를 열 수 있는 그를 죽이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만약 공격이 실패한다면 어떤 분풀이를 할지도 몰랐다.
괜히 성질을 건드렸다가 그가 폭발하면 피해를 보는 건 자신뿐만 아니라 애꿎은 사람들이었다.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인질로 잡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참고 인내하며 때를 기다려야 했다.
앞으로 모든 일을 이길호에게 공유하기로 약속한 만큼, 그에게도 이야기해 주자 사색이 되었다.
안 그래도 이 세계의 비밀을 알고 혼란스러워하던 터라, 실제로 공격이 시작된다고 하니 이길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제가 무슨 일을 하면 됩니까?”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심한 정신적인 압박을 받으면서도 이길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물었다.
“솔직히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공격은 분명히 시작될 거고, 그때 형님이 판단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해 주세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무리하지 않는 겁니다. 이번 공격은 시작일 뿐이니, 길게 보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니 안전을 가장 먼저 생각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창백한 얼굴과 달리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이길호의 내면의 빛을 발산하듯 환한 눈망울은 그의 굳은 의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듯했다.
‘형님이 옆에 있어 정말 다행이야. 이렇게 힘들 때 나를 무조건 믿어 주고 도와주려는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불안했던 마음이 한결 안정되는구나.’
이길호가 경일을 위해 뭔가 큰 도움을 주진 못하겠지만, 서로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좋은 시너지가 발생했다.
그 일이 있고, 경일은 분식점을 닫았다.
위험은 자신을 따라 생겨날 테니, 최대한 사람들과 떨어져 있어야 했다.
문을 닫는 일이 거의 없던 동네 분식이 문을 닫자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닌 만큼, 경일은 모른 척하고 오래간만에 옥탑방으로 돌아왔다.
자신이 던전에 있으면 명지광의 공격을 피할 수 있을 테지만, 그건 한시적인 일이었다.
그러다 만약 약이 오른 명지광이 자신이 아닌 불특정 다수를 겨냥할 수도 있었다.
아니, 자신이 나타나지 않으면 죄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화를 풀어낼 게 뻔했다.
자신을 대신해 애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꼴만큼은 절대 볼 수 없었다.
“휴~ 게이트를 마음대로 열게 된 이후로는 이곳에 올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경일은 곧바로 청소에 들어갔다.
워낙 방이 작아서 그런지 구석구석 꼼꼼히 청소했는데도 금방 깨끗해졌다.
주방의 싱크대부터 화장실의 변기까지 반짝반짝 광이 났다.
계속 이용할 것도 아니었는데, 경일의 청소는 과하다 싶을 정도였다.
청소를 마치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오래된 컴퓨터는 여전히 느리긴 해도 여전히 화면이 나왔다.
이것 저것 검색도 해 보고 재밌는 동영상도 찾아보지만,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휴식인데, 마음이 불안하니 전혀 편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니 쓸데없는 망상만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한다는 거지?”
암던이 가진 힘을 모르니 짐작이 가는 바도 없었다.
“이거, 좀이 쑤셔 죽겠는걸.”
늘 바쁘게 살아오던 경일에겐 오히려 가만히 있는 게 고역이었다.
“가만히 좀 있어. 정 심심하면 내가 한 번도 못 먹어 본 새로운 요리나 하던가.”
좁은 방을 이리저리 뒹굴뒹굴해 보지만, 네로의 눈만 어지럽게 할 뿐이었다.
“사장님, 네로님.”
그때, 이길호가 경일과 같이 지내기 위해 짐을 싸 들고 찾아왔다.
그도 이제 싸움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사실 경일이 이길호와 함께하기로 한 건, 그와 함께 싸우려 하기보다는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는데.
어떤 방식의 공격인진 모르지만, 자신은 그 공격을 막기 위해 묶여 있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이길호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클 거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명지광은 자신을 죽이려는 것보다는 자신의 위력을 과시하고, 버릇을 잡기 위해서라는 걸 알고 있는 만큼, 그리 위험하지는 않을 거라 예상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분식점을 닫은 이틀 뒤 그 징후가 나타났다.
경일이 있는 옥탑방 근처에 에너지가 모이는 것을 네로가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