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만남
“당신, 지금 어디서 함부로 말을 하는 거야! 이분이 누군지 몰라? 헌터 협회 회장님이라고!”
경일의 무례한 태도에 수행원이 먼저 발끈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그래서 어쩌라고?”
“당신 미쳤어? 지금 몬스터 한 마리 잡았다고 눈에 보이는 게 없어?”
수행원이 대뜸 목에 핏대를 세우고 경일에게 으르렁거렸다.
그와 함께 우선우의 얼굴도 차츰 벌겋게 달아올랐다.
“험, 험.”
감히 자신의 면전에서 무례하게 굴다니.
우선우는 헛기침으로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
대한민국의 모든 게이트를 독점하고 있는 헌터 협회의 힘은 엄청났다.
그 어떤 대형 길드라도 헌터 협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절대 권력 앞에서 경일이 꿋꿋이 고개를 쳐들고 있으니, 이들로서는 어이가 없을 수밖에.
“당신, 이런 식이면 곤란해. 우리에게 찍히고 헌터 생활이 가능할 거 같아?”
수행원은 기자를 의식했는지 재빨리 화난 표정을 풀더니, 억지웃음을 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어디서 협박질이야? 그리고 내가 당신들 때문이라도 더러워서 헌터 때려치운다!”
경일이 현장에 있는 모든 이들이 들으라는 듯이 더욱 큰 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경일의 폭탄 발언에 헌터 협회 사람들은 사색이 되었고, 축제 분위기이던 현장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옆 사람이 숨 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무거운 정적이 찾아왔다.
조금 전 대한민국 영웅으로 떠오른 헌터가 곧바로 헌터를 때려치운다니.
기자들과 이 모습을 생방송으로 보고 있던 시민들은 경악했다.
이제야 사태를 파악한 우선우의 붉은 얼굴이 순간 악마라도 본 듯 새하얘졌다.
아무리 생각 없는 헌터라도 설마 자신 앞에서 이따위 발언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건 망신 중의 망신, 개망신이었다.
이 장면은 사람들의 뇌리에 인식되어 평생 자신을 따라다닐 게 분명했다.
우선우는 대한민국 어떤 길드나 헌터든 간에 자신에게 밉보이면 한 방에 날려 버릴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놈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지금 뭐…….”
수행원이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그의 행동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우선우가 재빨리 분위기를 읽고 그를 말렸기 때문이다.
“수고했네. 대단한 일을 했으니 그 공에 맞는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걸세.”
우선우는 그 말을 남기고 곧바로 등을 돌리고 걸어 나갔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사이클롭스를 잡은 헌터와 헌터 협회 간의 트러블이 있는 겁니까?”
“협회장님! 한마디 해 주시죠!”
자리를 뜨는 우선우를 향해 기자들이 벌떼처럼 달려들며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수행원들이 재빨리 기자들을 막으며 길을 열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따로 기자회견을 열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우는 굳은 표정으로 차를 타곤 곧바로 사라져 버렸다.
그가 떠나자 기자들이 경일에게 몰려들었다.
“사이클롭스를 어떻게 잡으신 겁니까?”
“레벨이 어떻게 되십니까?”
“헌터님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국내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해외에서 활동하셨나요?”
“인터뷰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국민분들이 헌터님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어디 소속인지 밝혀 주십시오.”
“방금 헌터 협회와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경일을 둘러싼 기자들은 그를 향해 끊임없이 질문을 퍼부어 댔다.
“조금 전 추락한 헬기를 타고 있던 기자분이 소속된 곳은 어디입니까?”
“MBS입니다.”
경일의 질문에 해당 방송사 기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인터뷰는 MBS하고만 하겠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경일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기자들이 달라붙어 걸어가는 그를 막으려 했지만, 사이클롭스를 잡은 경일이 기세를 올리자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옆으로 물러났다.
다음 날, 경일의 정체는 온 국민에게 알려졌다.
예전에 무등급 거대 던전에 참석한 이력이 있던 터라 누구인지 드러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분식점은 그야말로 동네 사람들과 기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동네 사람들은 충격과 함께 기쁨에 휩싸였다.
자신의 이웃이 이런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자연스레 어깨가 으쓱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뻐한 건 역시 동네 아이들이었다.
언제나 자신들을 돌봐 주고 사랑해 주는 아저씨가 대한민국 최고의 영웅이니 기쁠 수밖에.
아이들은 서로 자신이 경일과 더 친하다고 자랑하기 바빴다.
분식점은 오픈 시간이 됐지만 열리지 않았다.
아니, 열 수가 없었다.
경일은 사이클롭스와의 싸움이 끝나고 정말 많은 연락을 받았다.
지금 자신이 들고 있는 핸드폰이 내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평소와 다른 과한 업무량에 지친 듯 뜨거워진 핸드폰이 힘들다며 호소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황당한 건, 자신을 자른 몬스터 처리 공장의 사장 아들이 친한 듯 문자를 보내온 것이었다.
하긴, 머리 한 번 숙이고 자신과 연결이 되기만 하면 떼돈을 벌 수 있을 테니 사업가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당장 사이클롭스의 사체를 구매할 수만 있다면, 수백억의 광고를 공짜로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 이런 미친 돼지 새끼. 안 그래도 사이클롭스와 싸울 때 잠시 생각이 나더니만… 설마 연락까지 해 올 줄은 몰랐네. 확 그냥 망하게 해 버려?”
경일은 농담조로 이야기했지만, 지금 그의 힘이라면 그런 작은 공장 정도는 순식간에 망하게 할 수도 있었다.
같은 시간, 문자를 보내고 희희낙락하고 있던 사장 아들이 순간 오싹하는 소름을 느낀 건 우연이 아니었으리라.
핸드폰은 지치지도 않는지 또다시 울어 댔다.
경일은 아예 핸드폰을 끌 생각이었는데, 화면을 본 순간 생각을 바꾸고 전화를 받았다.
다른 전화는 몰라도 이 전화는 꼭 받아야 했다.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오, 동업자. 정말 대단했어.”
명지광이었다.
그는 무척이나 밝은 목소리로 경일을 친근하게 불렀다.
“오래간만에 아주 신나는 시간을 가졌어. 안 그래도 요즘은 뭘 해도 흥미가 없었는데 말이지. 정말 재밌었어. 모든 역정과 고난을 이기고 결국엔 승리한다. 캬~ 이게 정말 뻔한 스토리인데, 그래서 그런지 더 감동적이더라고. 그렇다고 내가 마냥 재밌어 한 것만은 아냐. 보면서도 정말 걱정 많이 했어. 혹시라도 동업자가 죽으면 곤란해지잖아.”
가만히 그의 말을 듣던 경일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 무슨 참신한 개소리인지.
목숨을 건 싸움을 한 사람에게 신이 난 목소리로 재밌다고 말하며 마지막에는 걱정했다니.
무엇보다 명지광은 이 모든 사태를 일으킨 당사자가 아닌가.
‘이 미친 새끼가 나를 죽이려고 해 놓고 걱정했다니, 이게 무슨 개소리야? 너 때문에 진짜 죽을 뻔했어. 이 싸움에서 죽은 사람들은 모두 네놈 때문에 죽은 거야. 넌 산 채로 사이클롭스에게 먹힌 사람을 보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
따지고 싶은 말은 너무도 많았지만, 경일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명지광은 자신이 약한 소리를 하면 오히려 더욱 즐거워할 인간이었기에.
경일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명지광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뭐, 어쨌든 충분히 교훈이 된 거 같네. 사실 내 생각보다 결과가 더 잘 나와서 아주 기분이 좋아. 이제 너와 나의 차이를 여실히 느꼈을 거야. 그러니 서로 반목해 봐야 너만 손해야. 다시 한번 말하지. 나와 사이좋게 손잡고 이 세상을 누리자고. 괜히 몬스터를 없애야 하니 어쩌니 그런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말고. 내가 이런 이벤트를 언제든지 열 수 있다는 걸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굳이 몬스터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너를 징치할 수 있는 방법은 많아.”
“이번에 헌터 협회의 지원이 늦어진 건, 모두 네 짓이었나?”
“이거 눈치가 꽤 빠르군. 맞아, 내 입김이 들어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니 좋군. 난 눈치 없고 멍청한 인간은 딱 질색인데, 우리 동업자는 그렇지 않아 다행이야. 그리고 저번에 내가 얘기했었나? 이거 기억이 안 나네. 뭐, 한 번 더 이야기하면 되니까. 이제부터 몬스터의 힘이 더 강해질 거야. 너도 던전의 주인이니 이게 무슨 말인지 잘 알겠지? 그러니 딴 생각하지 말고 몬스터 막는 것에나 최선을 다하라고.”
명지광은 자신의 할 말만 하고 곧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사실 몬스터가 강해진다는 의미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이가 바로 경일이었다.
그는 스탄다비아에서 몬스터와 직접 싸워 봤기 때문이다.
경일은 네로를 만나기 전부터 같은 종이라도 스탄다비아의 몬스터가 지구보다 훨씬 강한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네로를 만나면서 몬스터 숲에 서식하는 몬스터가 지구에 나타나는 몬스터와 같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고, 차원을 통과하면서 몬스터의 힘이 약해진다는 걸 들었다.
“그럼 이제 차원을 통과하면서 얻는 페널티가 사라진다는 이야기인데… 후우…….”
한숨이 절로 나오는 이야기였다.
사이클롭스를 죽이는 데 성공했지만, 이겼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명지광의 힘은 너무나 거대했다.
그가 거리를 밝히는 환한 등이라면, 자신은 아주 작은 불빛만을 내는 반딧불이나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어떡해야 하지? 몬스터는 점점 강해질 텐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어. 이런 상태라면 명지광의 발끝도 건드리지 못해. 정말로 그의 협력을 받으며 몬스터와 인류가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어 가는 데 집중을 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그건…….”
경일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생각만으로도 자존심이 너무 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명지광과 손을 잡더라도 인류는 그의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잠깐의 시간을 버는 게 고작일 터.
결국 인류의 멸망이라는 기차는 레일을 따라 아무런 방해 없이 착실하게 목적지에 도달할 게 분명했다.
그동안 명지광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인생을 즐기고, 자신은 그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삶.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차라리 싸우다 죽는 게 더 속이 편할 것이었다.
네로와도 의논해 봤지만, 그도 뚜렷한 답이 있는 게 아니었다.
경일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밤새도록 고민했다.
그러고 나서 그가 처음으로 한 일은 우해수를 만나는 것이었다.
경일의 연락에 우해수는 한달음에 달려왔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인물의 연락인데, 모든 일을 제쳐 두고서라도 만나는 게 당연했다.
“안녕하세요.”
경일이 이제 막 들어오는 우해수를 보며 인사를 건넸다.
“제가 늦은 건 아니죠?”
“아닙니다. 제가 일찍 나왔습니다. 급하게 약속을 잡은 건데, 이렇게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나와야죠. 우리 회사 VIP 거래처 사장님에다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한 헌터이신데요. 지금 사장님 한마디면 대통령도 벌벌 떨걸요?”
“안 그래도 청와대에서 계속 연락이 오는데 안 받고 있습니다.”
경일이 적당히 농담 섞인 진담을 던져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호호호.”
우해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사장님이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강할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사이클롭스를 혼자 사냥하다니… 그 정도면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하신 거 아니에요? 아니지, 전 세계 헌터 중에 사이클롭스랑 일대일로 맞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사장님이 제일 강한 게 맞네요. 그리고 이건 제 짐작인데… 진짜 사장님의 실력은 아직도 숨겨져 있을 거란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우해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경일을 살폈다.
그녀의 추측에 경일은 조금 놀랐다.
큰 조직을 이끄는 사람답게 확실히 날카로운 면이 보였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