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
“사실 사이클롭스는 혼자 잡은 게 아닙니다. 길호 형님과 헬기에 있던 분들의 희생이 아니었으면 당한 건 아마 제가 됐을 겁니다.”
“그분들의 희생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솔직히 사장님이 다 하신 건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죠. 물론 이길호 씨에게도 많이 놀랐습니다. 객원 길드원으로 활약해서 그분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하고 용감한 분이시더군요. 사장님을 맨몸으로 받아 낼 때는 정말 감동했다니까요?”
“길호 형님은 제가 가장 믿는 분이죠.”
경일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본론을 꺼냈다.
“사실 오늘 만나자고 한 건, 삼원 그룹의 회장에 대해 알고 싶어서입니다. 아무래도 저 같은 사람보다는 훨씬 많이 알고 계실 거 같아서요.”
명지광의 이야기가 나오자 우해수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녀는 망설이듯 입술을 깨물었지만, 이내 결심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말하기가 좀 그런데, 사장님이 궁금하시다니 말씀드릴게요. 대신 이 이야기의 출처가 저라는 건 발설하지 말아 주세요.”
“알겠습니다.”
경일은 필요 이상으로 반응하는 우해수를 보고 명지광의 그림자가 대단히 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지광 회장은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신비스러운 인물이에요. 게다가 지금은 무소불위의 권력자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리겠네요. 일단 그의 과거부터 이야기하자면, 정말 보잘것없는 인물이었다고 알려져 있어요. 학생 때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고, 특출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둔재에 가까운 인물이었죠.”
우해수는 혹시나 남들이 들을까 봐 주위를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작은 회사도 아니고 해성 그룹의 후계자인 그녀가 이만큼이나 눈치를 보는 것이 사회에서 명지광이 가진 힘을 단편적으로나마 알 수 있는 힌트가 되었다.
“그런 인물이 어느 순간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더니,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빠르게 대기업으로 성장시킨 사람이 되었죠. 너무 빠른 성장 속도에 처음에는 재계에서 견제가 굉장히 심했어요. 원래 기득권들은 자신들의 사회에 누군가 새롭게 들어오는 것을 꺼리거든요.”
그녀는 목이 타는지 얼음물을 한 모금 들이키고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삼원 그룹에 압력을 가한 기업들에게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작게는 암살을 당하기도 하고, 크게는 중요한 공장 근처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기도 해서 큰 타격을 받았죠. 그리고 지금은 아니지만, 그 당시에 삼원 그룹이 초히트 상품을 꾸준히 시중에 내놓았어요. 대부분 음식과 관련됐는데… 여기서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었어요.”
그녀는 상체를 숙이며 경일에게만 들릴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다른 기업에서도 당연히 삼원 그룹이 내놓은 상품과 같은 걸 만들어 팔려고 시도했어요. 하지만 그 어떤 기업도 삼원 그룹이 내놓은 히트 상품을 구현하는데 성공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지금이야 던전 부산물의 연구가 활발하니 던전과 관련되어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지만, 그때는 생각조차 못했죠. 어쨌든 말 그대로 돈을 갈퀴로 끌어모았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경일은 우해수의 이야기에서 명지광이 어떤 식으로 활동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던전의 주인이 된 후, 거기서 나온 자원으로 기업을 세우고 수호신에게 교육을 받아 꾸준히 성장했으리라.
“그리고 그 사람은 그때 벌어들인 천문학적인 돈을 모두 사람에게 투자했어요. 좋게 말하면 투자고, 사실 뇌물이죠. 보통의 기업들은 신제품을 개발한다거나 기업을 확장하는데 쓸 돈이었겠지만, 그 사람은 그런 게 없었어요. 삼원 그룹이 지금보다 몇 배나 더 커질 기회가 있었는데도 어느 순간부터 그룹에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더군요. 대신 버는 족족 고위급 인물과 인연을 맺거나, 싹수가 보이는 사람에게 장학금 형식으로 지원했어요. 보다 못한 재계의 한 사람이 이를 공론화시키려고 했지만… 실패했죠. 증거 자료도 충분했고, 이제 터뜨리기만 하면 되는데, 그때 이상한 일이 발생했어요.”
우해수는 속이 타는지 잠시 대화를 끊고 얼음물을 가지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일은 그녀에게 이야기를 들을수록 표정이 어두워졌다.
명지광의 그늘이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짙다는 것이 우해수의 말로 증명이 되고 있었다.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는데, 경일은 명지광을 알수록 오히려 덤빌 의욕이 깎일 판이었다.
얼음물을 들고 온 우해수가 자리에 앉았다.
“방금 제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명지광이 뇌물을 살포했고, 그를 고발하려는데 일이 터졌다고…….”
“아, 네.”
그녀가 조용히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때 갑자기 게이트의 발생 빈도가 높아진 거예요. 당연히 국민의 목숨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게이트에 모든 시선이 집중됐고, 명지광에 대한 고발이 사람들에게 알려질 턱이 없었죠. 말 그대로 게이트가 모든 이슈를 빨아 당긴 셈이었어요. 그 사건이 조금 잠잠해지자 알 수 없는 이유로 증거가 하나둘 사라지고, 효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바람에 재판은 흐지부지하게 끝이 났어요. 문제는 그다음인데… 명지광이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자신을 고발한 기업을 몰락시켜 버렸어요. 검찰을 마치 제 수족처럼 움직여 기업가를 구속하고, 기업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마치 사실인 양 흘렸죠.”
우해수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공기가 무거워졌다.
“그 뒤로는 아무도 그를 건들지 않았어요. 그리고 지금은 건드는 게 아예 불가능해졌죠. 삼원 그룹의 사외 이사가 몇 명인지 아세요? 알려진 바로는 거의 200명이 넘어요. 이들은 모두 정부에서 높은 자리에 있던 은퇴한 관료들이에요. 그들의 힘만으로도 엄청난데, 현직에 있는 사람들까지 관리하고 있으니… 소문으로는 대통령도 그의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는데, 알 만한 사람들은 이게 진실이라는 걸 알고 있죠.”
“대단하군요.”
경일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비록 적이지만 지금까지 들은 명지광의 행보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던전을 가지고 있으니 종잣돈을 만드는 것은 쉬웠을 터.
그러나 그곳에서 나온 기술을 사회에 녹여 낸 방식은 감탄만 나올 뿐이었다.
“지금은 삼원 그룹이라면 알아서 한 수 접어주는 분위기예요. 그 어떤 기업도 그들과 부딪치기를 꺼리죠.”
“…만약에 제가 그 일을 하려고 한다면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우해수의 눈이 왕방울 같이 커졌고, 목소리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삼원 그룹과 싸우겠다는 거예요?”
그러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다시금 물었다.
“네. 삼원 그룹을 무너뜨리고 명지광을 죽일 생각입니다. 그는 사회의 해악과 같은 자니까요.”
경일의 단호한 말에 우해수가 곤란한 듯 말했다.
“방금 명지광의 힘이 어떤지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아무리 사장님이라도 해도 그건 불가능해요. 대한민국에서 그자에게 맞설 수 있는 만한 힘을 가진 존재는 없어요.”
“과연 그럴까요?”
경일이 우해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아직 그자를 잘 모르는…….”
그녀는 말을 하다 멈췄다.
눈앞의 경일이라는 존재가 차츰 커지기 시작하더니 마치 거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게 진짜가 맞는 거야?”
우해수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고는 다시 한번 경일을 바라봤지만, 거인 같은 존재감은 그대로였다.
그녀의 마음속 깊이 잠들어 있던 명지광에 대한 두려움이 차츰 엷어졌다.
‘만약, 이 사람이라면…….’
무조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믿음에 금이 가는 기분이 들었다.
사이클롭스와 혼자 맞설 수 있는 헌터.
거기다가 말도 안 되는 인벤토리 스킬을 가졌고, 엄청난 자원이 있는 던전을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는 헌터.
그리고 또 하나의 사실이 그녀의 뇌리를 강하게 때렸다.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자, 그가 가진 힐링 포션.
무등급 거대 던전에서 죽을 뻔한 자신을 살려 주었고, 그때 직접 체험한 상식을 넘어서는 힐링 포션의 효능.
그녀도 헌터이기에 그때 입은 상처를 힐링 포션으로 치료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런데 경일이 꺼낸 힐링 포션은 그 상식을 깨트렸다.
기적에 가까운 힐링 포션을 가진 헌터.
과연 그가 가진 게 고작 힐링 포션 하나로 끝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사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경일이 가진 능력을 모두 보여 주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경일이 숨기고 있는 게 훨씬 더 대단하고 크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경험한 게 물에 떠 있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거대한 비밀을 가지고 있는 헌터.
더군다나 이 남자는 마운틴 펀치의 해악을 알아냈고, 훌륭하게 그것을 무찌르지 않았는가.
또한 한술 더 떠 헌터들의 숙명이나 마찬가지인 마의 구간 문제도 해결했다.
‘내가 삼원이라는 이름에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과연 이 남자의 끝은 어딜까?’
그러다 경일에게 구원받은 목숨, 그 끝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만약 이 남자와 손을 잡는다면 해성 그룹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로 뻗어 나갈 수도 있을 터.
물론 실패하면 해성 그룹은 사라지고 없을 테지만, 위험한 만큼 성공했을 때의 과실도 너무나 크고 달콤할 것이다.
점점 긍정의 빛을 띠어 가던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우해수에게는 이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선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오빠인 우성범에 대한 것이었다.
아무리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지만, 그렇다고 같은 아버지를 둔 사람으로서 그를 죽인 사람과 손을 잡을 수는 없는 노릇.
사실 우성범이 사라진 것과 경일이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녀는 분명 그가 관련되었을 거라 믿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도 복수할 자격이 충분했고, 우성범이 자신까지 죽이려고 했으니 마음속에 모든 의문을 묻고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운명 공동체가 될 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서로를 믿고 끝까지 가야 하는데, 마음속에 티끌만 한 의심이라도 있다면…….
이것이 덩치를 불려 나중에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모르니, 확실한 대답을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문제는 이 질문을 던졌을 때, 경일이 어떻게 대답할지 뻔히 보인다는 점이었다.
차라리 거짓말을 해 주기를 원하지만, 그건 자신의 바람일 뿐.
그가 우성범을 죽인 것을 인정한다면 지금의 관계도 깨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우해수는 문제를 말하지 않고 관계를 유지하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녀의 직감도 계속 경일과 함께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피하기만 해서는 결국 지금 하는 고민의 반복일 뿐이었다.
결국 우해수는 무겁게 한숨을 한 번 내쉬곤 무언가 결심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손을 잡든 아니든, 그에 앞서 해결할 문제가 하나 있어요. 저로서는 이걸 해결하지 못하면 사장님과 단 한 발짝도 함께 나아갈 수가 없어요.”
경일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거라 생각한 그녀에게서 의외의 말을 듣자 긴장했다.
진지한 태도로 보아 매우 심각한 이야기가 나올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사장님이라면 분명 솔직하게 이야기하겠지만, 그래도 솔직하게 이야기해 준다고 맹세하세요.”
경일은 조금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계획에서 그녀의 역할은 중요했고, 그런 만큼 자신도 믿음을 보여야 하는 건 당연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