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종교 연합군
지금까지 많은 헌터들에게 비슷한 맥락의 질문을 했지만, 경일처럼 이야기하는 헌터는 처음이었다.
“네. 외로움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사이클롭스는 너무나 강한데…….”
경일은 이 부분에서 잠깐 말을 끊었다.
기자뿐만 아니라 함께 지켜보던 시청자들의 관심도 더욱 집중되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느껴 보지 못한,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강력한 고독감을 맛보았습니다. 분명 이곳은 내가 사는 세계가 맞는데, 저 혼자만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요. 혼자서는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었고,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습니다. 심지어는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기에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경일은 당시의 심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건 의도된 이야기이기도 했다.
지금 대한민국의 영웅으로 여겨지는 만큼, 경일은 자신의 말이 어떤 무게감을 가질지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결코 일반 시민들과 동떨어진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됐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감정을 느끼는 히어로, 경일이 노리는 포지션이었다.
“아, 지금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얼마 전, 무등급 거대 던전 공략에 참여한 경력이 있고, 실제로 던전 폐쇄를 한 주체가 헌터님이라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기자의 눈이 반짝였다.
인터뷰를 하면 할수록 경일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알 수 있었고, 단독 인터뷰를 하고 있는 자신까지 자랑스러울 정도였다.
아마 시청자들도 지금 자신의 생각과 크게 다를 게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뜬금없이 나타난 헌터가 세계에서 가장 강한 존재라니.
그런 이가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점에 자랑스러움을 느낄 게 분명하리라.
“네. 제가 한 게 맞습니다.”
아마 그때 자신과 같이 있던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헌터들이 제보를 한 듯했다.
경일은 순순히 그 사실을 인정했다.
다행히 기자는 눈치가 있는지, 그때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영웅과 인터뷰하는 자리에서 그런 질문을 하기엔 곤란하기도 했고.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이제부터 시민의 안전을 위해 본격적으로 헌터로서 활동을 시작할 생각입니다. 저번의 무등급 거대 던전처럼 위험한 게이트가 열리면, 최대한 지원을 할 생각입니다.”
“시민들이 무척 기뻐할 소식인데요. 김경일 헌터님 같은 분이 앞장서 주신다니, 한 명의 시민으로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앞으로 이런 이상 현상이 또 다시 생길 수 있을 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일례로 몬스터가 더 강해진다든지 하는 것 말이죠. 그러니 이에 대해서 확실한 대비가 있어야 할 겁니다.”
“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김경일 헌터님과의 인터뷰를 마칩니다.”
기자의 마무리 멘트를 끝으로 카메라의 불이 꺼졌다.
“이렇게 인터뷰를 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네, 기자님도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이만.”
다음 날, 모든 언론은 경일의 인터뷰를 보도했고, 경일이 던진 화두에도 발 빠르게 응답했다.
― 헌터 협회, 이대로 괜찮은가?
― 사이클롭스와의 싸움에서 헌터도, 군대도 출동하지 않은 이유는?
― 헌터 협회는 이런 긴급 상황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나?
― 헌터 협회 긴급 설명 발표 ‘매뉴얼에 따랐을 뿐이다’.
― 매뉴얼에 따른 게 무슨 문제인가?
― 매뉴얼 보수 작업이 신속히 필요해 보인다.
― 매뉴얼 분석, 사이클롭스 등장에 관한 것은 없었다.
― 긴급 상황 대처 수칙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
시민들은 이번 사이클롭스 사태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 헌터 협회를 성토했다.
친헌터 협회 성향 매체들은 처음엔 어떻게든 옹호하려다가 시민들의 거센 항의를 받자 정정 보도를 내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리고 경일이라는 상식을 뛰어넘은 헌터의 탄생에 눈치를 보는 언론도 있었다.
이건 경일이라는 개인을 국가급 힘을 가진 존재로 인정한 것과 다름없었다.
헌터가 국력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만큼, 경일의 사회적 지위는 순식간에 바닥에서 천상계로 뻗어 나간 셈이었다.
이 모든 게 경일의 계획이었다.
앞으로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는 그였지만, 명지광의 등장 이후로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을 음지에서 지배하는 최고의 권력자가 명지광이라면, 자신은 양지에서 최고가 되어야 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모두 우해수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질 터.
자신의 세력을 늘리고 명지광의 권력을 하나하나 잘라 내는 게 우선이었다.
드디어 경일은 궁극적인 목표인 명지광의 제거를 달성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 * *
무려 2만의 대군이 움직였다.
종교 연합군이 발을 맞추어 평원을 진군했다.
깨끗한 갑옷을 입고 있는데다가 다들 영양 상태가 좋은 듯, 얼굴의 혈색도 밝고 살이 올라 토실토실했다.
힘들게 사는 평민들과 비교하면 무척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들이 한 걸음씩 움직일 때마다 땅이 울리고 흙먼지가 일었으며, 보는 것만으로도 그 위용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들이 진군하는 방향에 사는 사람들은 혹시라도 무슨 일을 당하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군대가 모두 지나갈 때까지 집 안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에 나가는 이들 치고는 지나치게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마치 소풍을 나가는 아이들의 모습과 비슷할 정도였다.
스탄다비아라는 작은 영지와의 전쟁이라는 것을 아는 만큼, 종교 연합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한편, 종교 연합군의 가장 앞에는 한 대의 마차가 있었다.
마차를 끄는 열 마리의 말이 번쩍이는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을 자아냈다.
그곳에는 이번 전쟁을 지휘하는 세 명의 대주교가 타고 있었다.
“이렇게 출병하니 그동안 고생했던 게 모두 보상받는 기분입니다. 신의 행사에 어떻게든 한발 걸치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진땀 뺐습니다.”
가우스 교의 대신관, 이데카른이 긴 의자에 있는 커다란 쿠션에 뒤룩뒤룩 살찐 몸을 기대며 말했다.
“하하하, 고생하셨습니다. 이번 신의 징벌을 내릴 명분이 가우스 교에 있다 보니, 아무래도 귀찮은 일이 많았을 겁니다. 우리에게도 수많은 압력이 들어왔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타르다스 교의 대신관, 쉐올이 테이블 위의 과일을 우아하게 집어 입에 갖다 댔다.
“이제 좋은 일만 남지 않았습니까? 앞으로도 우리가 이렇게 협력하면, 왕국 내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고개를 들지 못할 겁니다.”
“그럼요. 하하하하!”
엘리시움 교의 대신관, 켈레우스의 말에 기분이 좋은 듯 그들은 다 같이 웃었다.
“이데카른 님, 스탄다비아까지는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음… 워낙 대군이 움직이는 거라 적어도 3개월은 걸릴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변방에 위치한 영지다 보니, 꽤 멀군요. 이럴 줄 알았다면 여자를 몇 명 데려올 걸 그랬나 봅니다.”
“저런…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으셨나 보군요. 이렇게 먼 길을 떠나는데 말입니다.”
켈레우스의 말에 쉐올이 안타까운 듯한 미소를 지었다.
“쉐올 님은 준비를 해 오셨나 보군요.”
“그럼요. 여자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좀 챙겨 왔습니다. 그동안 교단의 일로 바빴는데, 가는 동안이라도 휴식을 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데카른 님도 준비를 해 오신 걸로 압니다만.”
“네, 저도 준비를 좀 해 왔습니다. 충분히 준비했으니, 쉐올 님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것 참… 곤란했는데 감사합니다. 저도 들어간 비용에 얼마 정도는 내겠습니다.”
“우리 사이에 뭐 그런 걸 따지고 그러십니까? 앞으로 이 정도 돈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 텐데 말입니다.”
“하하하, 듣고 보니 그것 또 그렇군요.”
이들의 행태는 전쟁을 앞둔 사람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정도의 병력이면 왕국의 수도 방위군과 싸워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고작 변방의 자작령인 스탄다비아를 치러 가는데 긴장할 리가 없었다.
이들은 3개월 동안의 긴 여정을 거쳐 몬스터 숲에 도착했다.
그동안 스탄다비아의 병력이 꾸준히 몬스터를 사냥한 터라 이제는 평범한 숲에 더 가까워져 있었다.
물론 남아 있는 몬스터가 일부 있긴 했지만, 아무리 흉포한 녀석이라도 2만의 군대에 덤벼들 깜냥은 없었다.
이번 전쟁의 총책임자로 임명된 이는 칼리스 오웬 백작이었는데.
그는 왕국의 군단장 출신으로, 가우스 교에 귀의하면서 교단의 군대를 맡게 된 자였다.
칼리스 역시 세 명의 대신관과 마찬가지로 여유로웠다.
그는 이곳에서 가장 전쟁 경험이 가장 많은 터라, 이번 출병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병력 낭비인지 잘 알고 있었다.
고작 이런 작은 영지에 2만의 병력이라니.
아무리 과시하는 것을 좋아하는 가우스 교라지만,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격이었다.
“음… 지대가 아주 험하군.”
몬스터 숲에 들어선 칼리스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는 혹시나 있을 매복에 대비하기 위해 정찰대를 조직했다.
그런 행동에 대신관들은 고작 스탄다비아를 상대하면서 무슨 쓸데없는 짓이냐고 짜증을 냈다.
하지만 전장에서 잔뼈가 굵어진 그는, 아무리 쉬운 전쟁이라고 해도 최소한의 병법은 지키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3일 뒤, 돌아온 정찰대는 매복이 없음을 알렸다.
칼리스는 그제야 군대를 출발시켰다.
몬스터 숲을 지나 스탄다비아로 가는 유일한 길인 거대한 협곡으로 들어서고.
이미 매복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터라 이들의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한편, 칼리스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작은 병력이 큰 병력을 상대로 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 바로 지형을 이용한 매복이었다.
자신이 봤을 때, 몬스터 숲은 매복하기에 최적의 장소가 많았다.
그런데도 적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게다가 가장 효과적으로 매복할 수 있는 협곡에서조차 움직임이 없자, 칼리스의 머릿속에 의문이 들었다.
‘절벽 위에서 돌을 굴리기만 해도 엄청난 성과를 올릴 수 있을 텐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라… 이상한데. 내가 듣기론 프라인, 그리고 아드리온과의 영지전에서 승리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제법 머리가 굴러 가는 자일 텐데… 과연 자신감인가, 그냥 포기한 것인가.’
협곡의 끝에 도달한 순간, 칼리스는 자신이 품고 있던 의문이 한 방에 사라지는 걸 느꼈다.
“이런…….”
협곡의 끝에 설치된 거대한 방벽.
그는 스탄다비아와의 싸움이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어려워질 것을 직감했다.
“허~ 몬스터 숲으로 들어가는 선택을 내려서 미친놈인 줄 알았더니, 이런 꼼수를 숨기고 있었군.”
거대한 방벽은 매우 튼튼하고 견고해 지휘관 출신인 칼리스로서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서 걱정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방벽이 아무리 튼튼하더라도 2만이나 되는 병력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자신들은 수성전을 할 때 최악의 상대인 전투 마법사까지 데려왔다.
헬파이어를 방벽의 한 지점에 집중하면, 그 아무리 튼튼한 방벽이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자리는 정말 잘 잡았군요. 스탄다비아의 기술만 빼 갈 생각이었는데, 영지를 통째로 접수하는 것도 한 번 생각을 해 봐야겠습니다. 여기라면 우리만의 성지를 세우는 것도 가능해 보이네요.”
쉐올은 이곳이 천혜의 요새인 것을 확인하고는 이제 스탄다비아의 모든 것에 욕심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