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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271화 (271/300)

[271화] 전쟁

켈레우스 역시 꿈에 부풀어 오른 표정이었다.

대신관들의 망상을 뒤로하고, 칼리스는 우선 군대를 정비했다.

처음 예상과는 다른 양상이 펼쳐졌지만, 이 정도는 그가 지금껏 겪은 전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병력의 수는 물론이고 그 질도 뛰어났다.

마법사에 소드마스터까지 있는데 저런 방벽쯤은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오늘은 푹 쉬고, 공격은 내일 아침을 먹고 시작하겠다.”

칼리스의 명령에 병사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세 달 간의 행군으로 인해 진지를 차리는 건 숨 쉬는 것보다 쉬웠다.

병사들은 배불리 먹고 내일을 대비해 푹 쉬었는데, 수뇌부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얼굴에서도 긴장감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 * *

한편, 방벽 위에서 그들의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는 그림자가 있었다.

바로 자포리자와 그의 병사들이었다.

“칼튼, 모든 준비는 끝났는가?”

“네, 영주님. 준비는 완벽합니다.”

자포리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칼튼의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설렘이 가득했다.

목숨을 건 전쟁을 눈앞에 둔 기사치고는 무척이나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래도 모르니 다시 한번 점검하도록. 병사들도 꼼꼼히 살펴보고, 혹시 힘들어 하는 병사들이 있으면 잘 다독이도록.”

“알겠습니다. 영주님.”

완전무장을 한 칼튼이 주먹을 쥔 손을 가슴에 올리며 절도 있는 동작으로 경례했다.

혼자 남은 자포리자는 종교 연합군을 내려다보았고, 그의 눈동자에서는 수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처음 가우스 교가 스탄다비아로 들어왔을 때, 자포리자는 그들의 횡포에 절망을 겪었다.

그들이 가진 힘이 두려워 계속해서 당하기만 하는 날들.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고,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 가슴속으로 피눈물만 흘렸다.

그때, 선인이 직접 스탄다비아에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을 위로해 주는 건 물론이고, 복수의 기회까지 주었다.

이전까지 싸움에 있어서는 적이라고 해도 최대한 명예를 존중하던 자포리자조차 가우스 교의 수석 사제를 산 채로 불에 던져 버리지 않았는가.

그 당시에 그는 너무나 분노해 있었고, 사실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벌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 가우스 교에서 쳐들어올까 봐 매일같이 가슴을 졸였다.

그만큼 종교 연합군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는 상대였으니 말이다.

만일 혼자의 몸이었다면 적과 수십 수백 번은 싸웠을 터였다.

하지만 자신은 수만의 사람들의 생사를 책임지고 있는 몸.

가벼운 행동은 용납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도 기댈 언덕이 존재했다.

선인이 샤벨 타이거를 제거해 줌으로써 스탄다비아의 숨통을 틔워 주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시작된 엄청난 지원 덕분에 선조의 땅에 무사히 정착할 수 있었고, 적이 눈치채지 못하게 쥐 죽은 듯 조용히, 하지만 빠르게 발전해 나갔다.

그리고 스탄다비아가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 처음 배가 출항했을 때, 그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다시 태어난 스탄다비아는 주변의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던 옛날의 힘없고 나약했던 곳이 아니었다.

몬스터 숲을 정복한 야수.

그것이 스탄다비아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이제는 적에게 분노의 철퇴를 내릴 것이며, 다시는 덤비지 못하도록 그 싹을 제거해 버릴 것이었다.

* * *

어두웠던 전장에 해가 고개를 내밀었다.

햇빛을 받은 나뭇잎마다 맑은 초록빛이 감돌고, 푸른 하늘엔 솜처럼 포근한 뭉게구름들이 지나갔다.

근래에 보기 드물 정도로 좋은 날씨.

덥지도 춥지도 않고, 집안에 처박혀 지내는 은둔자도 밖으로 나오고 싶어질 정도였다.

그래서 종교 연합군은 다들 기분이 들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승리 수당으로 약탈을 약속받았기에 더더욱 기세가 오른 상태였다.

스탄다비아는 길에 지나가는 개도 금화를 물고 간다는 소문이 있는 만큼, 이들은 단단히 한몫 챙길 생각이었다.

덤으로 여자를 안아 묵혀 두었던 욕구를 풀고, 어린아이들을 잡아다 노예 상인에게 팔면 제법 짭짤한 수익을 얻을 수 있을 터.

어린 소년 소녀들은 특히 인기가 많으니, 이제 손을 뻗어 잡을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도저히 종교 연합군의 일원이라고는 보기 힘든 행태였다.

거대한 방벽조차 그들의 욕망을 가로막을 순 없었다.

식사를 끝내고 약간의 휴식 후, 2만 명의 종교 연합군이 도열했다.

진정한 전쟁의 시작이었다.

“전투 마법사들은 앞으로 나서라!”

칼리스가 선택한 건, 공성전의 가장 기본적인 전략이었다.

먼저, 전투 마법사들이 헬파이어를 쏟아부어 방벽을 무너뜨린 후, 기사와 병사들이 난입해 길을 연다.

원래 기초적인 것이 가장 효과적인 공략인 법.

이윽고 전투 마법사들이 화살의 사정거리 밖에서 캐스팅을 시작했다.

주위의 공기가 일렁이며 옷이 펄럭거리더니, 손에서 작은 불덩이가 생겨나 점점 커져 갔다.

그 화끈한 열기에 주변에 있던 병사들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씩 물러나기도 했다.

“헬파이어.”

영창이 끝난 전투 마법사들의 몸이 서서히 허공에 떠오르더니, 웬만한 집만큼 커진 헬파이어 여러 개를 날려 보냈다.

그 순간, 동시에 수백 개의 화살이 하늘을 뒤덮으며 날아들었다.

헬파이어와 화살이 서로 엇갈린 순간, 종교 연합군은 스탄다비아의 공격을 비웃었다.

“푸하하핫! 저런 멍청한 놈들. 화살이 여기까지 닿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게다가 화살 한 발이 얼마나 비싼데, 저따위 되지도 않을 일에 수백 수천 개의 화살을 버리다니!”

철이 귀한 만큼 화살촉 역시 비쌀 수밖에 없었다.

영지전에 화살이 잘 등장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는데.

“아예 화살을 알아서 갖다 바치는군. 정말 멍청한 지휘관이 아닐 수 없어. 자기들이 날린 화살로 죽는 기분이 어떨까? 조금 있다가 반격할 때 속이 뒤집어지겠지? 으하하핫!”

“하하하하!”

종교 연합군은 여유롭게 웃으며 결과를 기다렸다.

분명 화살은 자신들에게 닿지도 못하고 그대로 땅에 처박힐 것이고, 헬파이어가 허무하리만큼 손쉽게 방벽을 쳐부수리라.

“어, 어, 어……?”

처음 이상을 감지한 건 한 기사였다.

분명 화살은 힘을 잃고 땅으로 떨어져야 하는데, 아직 힘차게 날아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화살이 자신들에게 명중할 것만 같았다.

그는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화살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는 만큼, 화살에 신경 쓰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헬파이어가 방벽에 부딪혀 폭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쐐애엑!

화살촉이 눈에 보일 정도가 되어서야 종교 연합군은 이상을 알아차렸다.

“바, 방패! 방패를 들어라!”

“모두 피해!”

“어, 어떻게?”

누군가는 급하게 방패를 찾았고, 또 누군가는 몸을 날렸다.

하지만 이미 눈앞에 도달한 화살을 피하기에는 너무 늦어 버린 뒤였다.

그중 한 병사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했다.

퍼억! 퍽!

결국 그는 화살에 몸통이 꿰뚫린 이후에야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아아아아악!”

“살려 줘!”

“제기랄…….”

화살은 방심하고 있던 종교 연합군에게 그대로 명중했다.

반면, 그들이 기대하던 헬파이어는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다.

무서운 기세로 날아가 방벽에 격돌하기 직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투명한 막이 나타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여러 개의 마법진이 나타나 정교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처럼 유기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퍼엉! 펑! 펑!

투명한 막과 부딪친 헬파이어가 터지며 불꽃놀이처럼 화려한 불꽃이 허공에 흩날렸다.

물론 마법진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투명한 막은 헬파이어의 강대한 공격력을 버티지 못하고, 접지 상태가 불량한 전구처럼 불규칙하게 깜박이다가 사라졌다.

그러고도 완전히 충격을 해소하지 못해 방벽 위에 서 있던 스탄다비아의 병사들은 발밑이 흔들리는 것을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애초에 종교 연합군이 기대한 결과는 일어나지 않았다.

헬파이어를 맞은 방벽은 멀쩡했고, 다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모든 건 연구 마법사 하칸과 돈의 위력 덕분이었다.

비누와 염색된 천이 불티나게 팔려 나가며 스탄다비아는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었다.

자포리자는 이 돈으로 자연의 마나가 깃든 마정석을 사들였다.

마법진을 구동시키는 핵심 재료인 마정석.

하칸은 마정석을 이용해 거대한 방어 마법진을 그렸고, 그것은 훌륭하게 헬파이어를 막아 냈다.

대신관들은 이 어처구니없는 결과에 혼이 빠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들의 예상보다 사정거리가 길었던 이유는 바로 쇠뇌에 있었다.

경일은 쇠뇌의 원리를 자포리자에게 가르쳐 주었는데, 활보다 더 멀리 쏠 수 있음에도 만드는 방법은 간단했다.

활줄을 고정하는 방아쇠의 구조만 알면 누구나 만들 수 있었다.

게다가 스탄다비아는 화살촉을 만들 철도 풍족하고, 수성하는 위치에 있으니 공성전에서 활용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데카른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화살을 하나 주웠다.

기존의 활보다 짧은 화살.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짧은 화살이 어떻게 여기까지 날아올 수 있는 거지?”

화살을 더 멀리 쏘기 위해서는 활시위를 더 강하게 당겨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화살이 긴 게 유리했다.

대신관들이 그저 멍한 얼굴로 방벽만 바라볼 때, 칼리스는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였다.

전장에서 이런 의외의 상황은 부지기수였다.

적의 함정에 빠지거나, 약속된 지원군이 오지 않거나, 적의 정보가 잘못 전달되어 적은 수로 수많은 적을 상대하는 등 변수는 늘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지휘관은 흥분하지 않고 최대한 이성적이고 빠르게 상황에 대처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모든 방패병들은 앞으로 나서 적의 공격에 대비하라. 그리고 전군, 이대로 천 보 뒤로 물러난다!”

칼리스의 명령에 재빨리 방패병들이 앞으로 나아가 방패를 들었고, 거대한 벽이 만들어졌다.

연합군은 혹시 모를 스탄다비아의 공격에 대비하며 뒤로 물러났다.

충분히 거리를 벌렸다는 생각이 들자, 각각의 기사들이 병력의 피해를 보고하며 군의 정비에 들어갔다.

단 한 번의 공격에 100명의 사상자.

2만 명이라는 숫자와 날아온 화살의 양에 비하면 그리 큰 피해는 아니었다.

하지만 칼리스의 얼굴은 더없이 굳어져 있었다.

“이런 약은 놈들. 전투 마법사를 노리다니…….”

그랬다.

이번 스탄다비아의 공격은 전투 마법사가 목적이었다.

헬파이어를 만들어 방벽을 위협할 수 있는 그들은 최우선 표적이었다.

모든 쇠뇌가 마법사들을 노렸고, 열 명의 마법사 중 무려 일곱 명을 잡아내는 쾌거를 이루어 냈다.

멍청하다고 비웃은 이들에게 스탄다비아가 멋있게 한 방 먹인 셈이었다.

대신관들이 급하게 칼리스에게 다가왔다.

“칼리스 경,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데카른이 조금 전 주운 화살을 손에 꽉 쥔 채로 물었다.

칼리스의 눈길이 화살을 스쳤다.

“사상자는 많지 않으나, 마법사를 일곱 명이나 잃었습니다. 적은 전투 마법사를 향해 집중적으로 활을 쏜 듯합니다. 이거… 솔직히 생각도 못했는데, 제대로 한 방 맞았습니다.”

생각지 못한 피해였으나, 칼리스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전투 마법사 중 일곱 명이 죽었지만, 아직은 자신들이 훨씬 유리했다.

급하게 출병하느라 방벽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했고, 또 스탄다비아의 병력도 조사하지 않았지만, 일개 자작령의 정규 병력이 2천을 넘기기는 힘들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방벽이 튼튼하더라도 열 배의 병력을 가진 우리들이 질 이유는 없다.’

그는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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