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설마… 너도 소드마스터?
“이건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이데카른이 손에 쥔 화살을 펼쳐 보이며 물었다.
“화살의 길이도 짧고 가벼운 것이 새로운 무기인 듯합니다. 아마 스탄다비아가 이번 전쟁을 대비해 준비한 비장의 한 수이겠지요.”
“그럼 큰일이 아닌가?”
“이미 한 번 알려진 이상, 무서울 건 없습니다. 사정거리와 위력도 확인했고, 두 번 당할 이유가 없지요. 대신… 전투 마법사들이 대거 당한 만큼, 예상보다 병력의 손실은 커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건 전혀 문제될 게 없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스탄다비아의 정복! 칼리스 경은 오로지 승리하는 데에만 신경 쓰시면 됩니다.”
대주교란 사람들이 할 말은 아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도 좋으니, 자신들의 목적만 이루면 된다니.
2만이라는 군대를 고작 자신의 도구로 생각하는 그들의 모습은 가히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한번 마음껏 기량을 펼쳐 보지요.”
하지만 대답하는 칼리스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2만의 군세를 마음껏 운용할 수 있으리란 기대감이 서린 얼굴로 봐선 그 역시 대주교와 똑같은 부류의 인간이었다.
“헤싱크.”
“네!”
칼리스의 부름에 그의 부관이 곧바로 대답했다.
“마법사를 잃은 이상, 전통적인 방법으로 공성전을 치르겠다. 그에 맞게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헤싱크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곧바로 반격 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가장 먼저 방벽 위에 한 번에 닿을 수 있는 길이의 사다리를 만들었다.
그 사다리는 각 폭의 길이를 다르게 함으로써 최대한 많은 병력들이 올라갈 수 있는 형태였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방벽 너머에 공격을 할 수 있는 투석기, 성문을 부수기 위한 공성 추, 병사를 성벽 너머로 올려 보내기 위한 이동식 탑형 구조물인 공성 탑도 만들어졌다.
울창한 몬스터 숲에는 곧고 긴 나무가 많았으며, 그 덕에 종교 연합군은 빠른 속도로 여러 개의 공성 병기를 만들 수 있었다.
스탄다비아 군대는 방벽 위에서 그들의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영주님, 사다리에 공성 탑까지 만드는 걸로 봐서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공격해 올 듯합니다.”
칼튼이 방벽의 높이만큼 올라간 공성 탑을 보고 말했다.
“전투 마법사를 잃은 그들에겐 이 방법밖에 없겠지. 준비는 잘되고 있는가?”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대로 적이 공격해 온다면 지옥을 볼 것입니다.”
칼튼의 눈에 서늘한 기운이 맺혔다.
스탄다비아는 이미 공성전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방벽 곳곳에는 기름과 사람 머리만 한 돌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또한 사다리를 밀어낼 수 있는 Y자 모양의 긴 장대도 보였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투석기만 한 거대 쇠뇌였다.
거대한 화살을 언제라도 날려 보낼 수 있는 쇠뇌가 일정 간격마다 설치되어 있었다.
* * *
종교 연합군은 일주일간의 준비 끝에 공격을 개시했다.
전쟁의 재시작을 알린 건, 이번에 큰돈을 주고 초빙한 소드마스터 피츠 하머였다.
피츠는 성큼 앞으로 나와 방벽을 향해 걸었다.
그는 만면에 거만한 웃음을 띠고, 스탄다비아 따위는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는 듯이 검조차 뽑지 않고 건들거리며 다가갔다.
전장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렸음에도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이미 쇠뇌를 보여 줬는데도 저렇게 여유롭다는 건, 화살이 두렵지 않다는 이야기겠지. 보아하니 일기토를 신청하러 온 거 같은데, 두고 보자고.”
건방진 모습에 화가 난 몇몇 병사들이 쇠뇌를 쏘려고 했지만, 자포리자가 만류했다.
2만이나 되는 종교 연합군의 대표로 나온 만큼, 보통 인물은 아닐 터.
피츠가 방벽과 거리를 둔 채 삐딱하게 고개를 들어 노려봤다.
확실히 예를 중시하는 기사의 모습은 아니었다.
“스탄다비아의 촌놈들은 들어라! 난 피츠 하머라는 어르신이다. 너희에게 진정한 하늘이 어떤 것인지 손수 보여 주겠다. 나랑 맞설 용기가 있는 자는 나서라!”
피츠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마나를 실은 그의 목소리는 방벽 위까지 또렷이 전달되었다.
조금 전까지 만만히 보고 쇠뇌를 쏘려 한 병사들은 살짝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그가 뽑은 검에서 오러가 일렁거리거니 기다란 검기가 형성됐다.
“크하하핫!”
피츠의 입에서 억누를 수 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이 순간이 너무나 좋았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과 기대를 받으며 자신이 쌓아 올린 경지를 자랑할 때의 그 짜릿함이란…….
정말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피츠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거만한 표정으로 방벽 위를 보았다.
‘뭐, 이 정도면 돈값은 했겠지.’
그는 이대로 아군의 진지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자신이 소드마스터라고 밝혔는데 이런 변방의 작은 영지에서 누가 맞서려고 하겠는가.
마지막으로 크게 비웃음을 날려 주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
드드드드드드!
거대한 성문이 열리는 소음이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완전히 열린 성문 사이로 한 사내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후후후…….”
피츠의 입에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꼴에 기사라고 자존심은 있다는 건가? 쯧쯧, 그 자존심도 죽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피츠의 비웃음을 받으며 등장한 이는 바로 자포리자였다.
상대가 소드마스터인 이상, 그만이 상대할 수 있었다.
“넌 누구냐?”
피츠는 상대를 깔보는 듯한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넌 기본적인 예의도 없는 놈이군. 그럼 나도 예의를 갖출 이유는 없겠지. 난 스탄다비아의 영주 자포리자 보일이다.”
자포리자가 피츠를 꾸짖고는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오호~”
피츠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영주가 직접 나올 줄은 몰랐다.
영주가 죽는다면 이 전쟁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직접 나온다라…….
이런 경우는 단 하나.
적어도 상대가 자신과 맞설 자신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문제는 자신과 맞서기 위해서는 당연히 소드마스터라는 경지에 이른 기사여야 하는데, 피츠는 설마 그럴 일은 없다고 판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는 고작해야 변방의 자작.
그런 이가 소드마스터라니…….
아무리 고민해도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정말로 소드마스터라면 왕국에서 최소한 백작 이상의 지위를 보장받았을 터.
돈으로도 살 수 있을 만큼 하찮은 게 자작 위인데, 그런 자가 소드마스터일 리가 없었다.
“이거 완전히 미친놈이거나, 가슴속에 허세가 가득 찬 놈이거나 둘 중 하나겠네. 뭐, 어느 쪽이든 너의 목이 달아난다는 건 변하지 않을 사실이야. 내 검에 너 같은 인간의 피를 묻혀야 한다니… 아무리 내가 용병이라지만 짜증이 치미는군. 그렇지만 이미 돈을 받은 만큼, 돈값은 해야겠지?
피츠는 상대를 깎아내렸다.
자포리자가 소드마스터일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자신 있게 나선 만큼 무언가 숨긴 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대의 평정심을 흔들기 위해 아무 말이나 던졌는데, 자포리자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마치 개가 짖든 말든 신경도 안 쓴다는 태도였다.
“이런 잡놈이… 감히 내 말을 무시해?”
그 때문에 도리어 피츠가 화를 참지 못하고 자포리자의 목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챙!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자포리자가 너무나 쉽게 검을 막아 낸 것이다.
“뭐지?”
순간, 피츠는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설마… 지금 내 검을 막은 건가?’
아무리 두 눈을 깜박여 봐도 자신의 검은 자포리자의 검에 막힌 상태였다.
그제야 그의 머릿속에 애써 무시하고 있던 하나의 가능성이 맴돌았다.
피츠의 얼굴에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지고, 그는 허둥대며 빠르게 자포리자와의 거리를 벌렸다.
“너, 너, 너 설마… 소드마스터?”
소드마스터인 자신의 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 내려면, 상대도 소드마스터일 수밖에 없었다.
“넌 싸움을 입으로 하느냐? 가진 실력에 비해 입과 행동이 너무 가볍군.”
자포리자의 말에 피츠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허세를 부린 게 자포리자가 아니라 자신이 되어 버렸다.
같은 경지의 실력자 앞에서 온갖 개폼을 잡았으니 부끄러울 수밖에.
피츠는 순간 이대로 돌아가 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이번 의뢰 내용에 소드마스터의 존재는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꽤 큰돈을 받기는 했지만, 소드마스터와 싸우기에는 수지가 맞지 않는 금액이었다.
처음 계약과 다른 내용이니 위약금을 물어 줄 필요성도 없으리라.
‘…용병인 내가 이런 손해 보는 거래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자신에게 개망신을 준 자포리자.
같은 소드마스터라지만 이런 변방 영지 출신이라면 충분히 싸워 이길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일었다.
자신은 소드마스터가 된 지 10년이 넘었다.
반면 자포리자는 아무리 빨라도 1년은 넘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자신이 들은 정보로는 얼마 전까지 프라인과 아드리온에게 시달린 곳이 스탄다비아 아닌가.
만약 그때도 자포리자가 소드마스터였다면, 애초에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터.
‘어떻게 생각하면 아주 좋은 기회이긴 한데… 소드마스터와의 대결이 흔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이제 막 소드마스터가 된 애송이는 평생 만나기 힘들겠지.’
피츠는 요즘 벽에 막혀 있었다.
뭔가 실마리만 잡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실마리가 그렇게 쉽게 잡히지는 않았다.
이런 와중에 소드마스터와의 대결은 큰 도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용병이라고 해도 검을 수련하는 사람.
평생 다시 만나지 못할 소중한 기회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뭐, 일단 싸우고 돈은 나중에 더 받아 내면 되겠지. 계약서에 소드마스터의 존재를 밝히지 않은 이상, 교단 놈들도 무조건 발뺌하지는 못할 거야. 만약… 입을 싹 닦는다면, 전부 목을 베어 버려야지.’
피츠가 싸우기로 마음을 굳히자 분위기가 급변했다.
싸늘한 눈빛에 이어 숨 막히는 공기, 그리고 목을 조여 오는 살기.
조금 전까지 껄렁거리던 남자와 같은 사람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자포리자에게 덤벼들었다.
넘실거리는 마나가 피츠의 검을 감싸고 검기를 뿜어냈다.
마치 이게 진정한 소드마스터라고 온몸으로 외치는 듯한 광경이었다.
부웅!
피츠는 자포리자를 자신보다 한 수 아래로 여겨 처음부터 큰 공격을 넣었다.
실패하면 빈틈이 큰 동작이었지만, 마나를 듬뿍 담은 만큼 위력적이었다.
그에 맞서 자포리자는 다리를 단단히 땅에 고정하고, 거대한 힘이 실린 피츠의 검을 맞받아쳤다.
콰앙!
두 개의 검이 충돌하자, 굉음이 울리면서 마나의 잔재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한참 떨어져 있던 종교 연합군의 귀까지 뚜렷이 들릴 정도로 울려 퍼지는 소리에 대주교와 칼리스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들은 설마 피츠와 맞설 인물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검을 맞댄 채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중간에서 맞부딪친 검은 한 몸인 듯 붙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힘을 쓰고 있는지, 피츠와 자포리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였다.
어느 순간, 둘은 약속이나 한 듯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제법인데 그래. 너도 꼴에 소드마스터다 이거지? 그런데 말이야… 같은 경지라도 너와 나는 차원이 달라. 경험이라는 것은 절대 무시하지 못하거든.”
피츠가 자랑하듯 내뱉는 말에 자포리자가 피식 웃었다.
경험이 부족하다?
자포리자의 옆에는 경일이 있었다.
그는 자신보다 강한 경일과 실전에 버금가는 대련을 매일같이 해 왔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피츠는 자포리자의 여유로운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인상을 썼다.
싸움에서 패한 자는 목숨으로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저토록 여유로운 태도라니.
피츠는 자포리자의 평온한 얼굴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 전 나눈 한 수로 피츠는 자신의 생각이 들어맞았음을 직감했다.
비록 그 차이가 자신이 예상보다 훨씬 작긴 했지만, 자신이 더 강하다는 것을.
경지가 높은 사람끼리의 대결에서는 종이 한 장 차이로 승부가 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에 실망 따위는 하지 않았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