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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273화 (273/300)

[273화] 일기토

‘…혹시 숨겨진 한 수라도 있다면?’

일평생 전쟁터를 전전해 온 용병답게, 피츠는 불길한 느낌을 무시하지 않았다.

신중하게 변한 그의 몸놀림은 이전과는 다르게 간소했다.

자포리자를 바라보는 눈빛 역시 혹시 모를 변수를 대비하기 위해 날카롭게 변한 상태였다.

챙, 챙, 챙!

두 소드마스터의 검격은 평범한 병사들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검이 부딪치며 생기는 불꽃만이 보일 뿐.

지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순간이 이어졌다.

그러나 자포리자는 자신이 피츠보다 한 수 아래의 실력이라는 걸 확실히 느꼈다.

검술은 비슷해도 마나의 운용에서 차이가 났다.

아무래도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10년이나 머물고 있던 피츠가 유리할 수밖에 없는 분야였다.

그 증거로 피츠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의 색이 더욱 짙었다.

결국 자포리자는 더욱 많은 마나를 사용해 피츠의 공격을 막아야만 했다.

이대로 간다면 자포리자의 마나가 더 빨리 고갈될 것은 당연한 일.

피츠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 비릿한 미소를 띠고 연격을 퍼부었다.

무시무시한 기세의 공격을 막을 때마다 묵직한 충격이 자포리자의 손에 전해졌다.

“크하핫! 제법 한 수 있는 놈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시시하군. 이것보다는 오래 버텨 주길 바라지. 아무리 나라도 소드마스터와 목숨을 걸고 싸울 기회가 많지는 않거든. 내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 되어라!”

피츠는 상대를 깔보는 말투를 사용하면서도 계속해서 자포리자를 살폈다.

궁지에 몰린 쥐새끼는 고양이를 무는 법.

소드마스터의 비장의 기술에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자포리자를 자신보다 약하다고 결론 내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 과연 누가 마지막에 웃을지 한번 두고 보자고.”

자포리자도 기세에 밀리지 않고 힘 있는 목소리로 받아쳤다.

이 싸움이 새로운 성장의 밑거름이 되리라는 것은 피차 같았다.

지금껏 살아오며 유리한 상황에서 싸운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가.

그의 인생은 투쟁의 연속이었으며, 매일같이 닥쳐오는 고비를 어떻게 넘길지 고민하며 살아왔다.

이 정도 위기는 오히려 투지를 불러일으킬 뿐.

“아직 기가 안 죽었군. 그럼 나야 더 좋지.”

그와 동시에 피츠가 맹렬한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다시 한번 무시무시한 연격이 자포리자에게 쏟아졌다.

자신이 한 수 위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공격은 충분히 매서웠다.

챙! 챙! 챙! 챙!

두 검이 부딪치며 나는 날카로운 소리가 방벽 앞을 가득 채웠다.

자포리자는 피츠의 공세를 막을 때마다 조금씩 손목이 저려 오는 것을 느꼈지만, 여유 있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거 아주 짜릿한데.”

“흥! 꼴에 허세를 부리는구나!”

피츠는 바닥을 박차고 뛰어오른 뒤, 공중에서 몸을 활처럼 휘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자포리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콰앙!

피츠의 검을 막은 자포리자가 두어 걸음 뒤로 밀려났다.

한편, 두 소드마스터의 화려한 싸움에 전장의 모든 시선이 쏠렸다.

양측의 병사들은 마치 신의 싸움을 바라보는 듯한 경외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마나를 깨우친 기사들은 두 사람의 몸짓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눈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소드마스터 간의 싸움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뜨이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방벽 위에 서 있던 칼튼 역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스탄다비아에서 두 번째로 강한 칼튼은 자신도 저런 싸움을 경험하고 싶어 조바심이 날 지경이었다.

정말 약간, 약간의 깨달음만 있으면 소드마스터로 올라설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더 그럴지도 몰랐다.

칼튼과 반대로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는 이도 있었는데, 바로 대신관들이었다.

그들은 자포리자가 소드마스터란 사실에 경악했다.

직접 눈으로 지켜보고 있음에도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으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일개 자작이 소드마스터라니요?”

쉐올이 이데카른에게 강하게 따졌다.

어떻게 2만이라는 큰 군세를 일으켰음에도 기본적인 적의 정보도 파악하지 못했냐는 책망이 담겨 있었다.

“맞습니다. 이런 중요한 사실을 모르다니, 처음부터 계획을 잘못 세운 거 아닙니까? 마법사를 잃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사태입니다!”

켈레우스 역시 언쟁에 끼어들었다.

그들로서는 이번 전쟁의 책임자인 이데카른의 실수를 부각한다면, 자신들이 더 큰 몫을 차지할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뻔한 수작에 이데카른은 혀를 찼다.

조금 전까지 총사령관 칼리스와의 대화에서 사소한 인명 피해 따위는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말했으면서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두 사람이었으니까.

물론 자포리자가 소드마스터라는 사실에 놀라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피츠가 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행동이 이해되기도 했다.

분명 자신이 저들의 입장이더라도 이런 기회는 놓치지 않았을 테니.

“두 분 다 진정하시죠. 고작 소드마스터 한 명이 추가되었다고 전쟁의 승패가 바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 피츠 경이 싸우는 중 아닙니까? 이미 드높은 경지에 오른 지 10년이 넘은 사람과 얼마 되지 않은 사람, 누가 이길지는 뻔한 일이지요. 오히려 제가 피츠 경을 준비시킨 덕분에 갑자기 튀어나온 변수를 제거하기 쉬워진 셈입니다.”

이데카른은 피츠를 들먹이며 자신의 공적을 내세웠다.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긴 하지만, 어쨌든 소드마스터를 준비시킨 건 맞았기에 쉐올과 켈레우스는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낙관적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피츠가 자포리자를 간단히 제압할 거라 여겼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싸움이 끝나질 않는 것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피츠 놈이 지는 건 아니겠지? 아냐, 그건 말도 안 돼.’

사실 지금 가장 기겁한 사람은 자포리자와 직접 싸우고 있는 피츠였다.

분명 상대보다 자신의 실력이 더 높았다.

그리고 연격을 막아 내느라 마나 소모량도 상당할 터.

지금쯤이면 마나 고갈로 인해 힘들어해야 할 텐데, 자포리자는 여전히 거뜬해 보였다.

‘대체 뭐냐! 정말 소드마스터에 오른 지 1년도 안 된 애송이가 맞나? 저놈은 마나가 무한정이라도 된단 말인가!’

피츠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나약한 생각을 검을 휘둘러 떨쳐 냈다.

그러나 가슴 한 귀퉁이의 알 수 없는 찝찝함은 가시지 않았다.

사실 자포리자는 마나의 양만 따지면 소드마스터에 오른 지 1년도 안 된 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경일이 보내 준 마나 포션을 꾸준히 복용한 그는 이미 평범한 소드마스터가 아니었다.

아무리 피츠가 소드마스터가 된 지 훨씬 더 오래되었다고는 해도, 마나 연공법과 포션을 병행해서 수련한 자포리자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물론 그는 지금까지 뛰어난 마나 운용 능력으로 적재적소에 마나를 사용했지만, 기초적인 자원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의미 없는 행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소드마스터로서 쌓아 온 경험이 월등히 많았기에 우세한 전투를 이어 가고는 있으나, 이대로 가면 먼저 지칠 게 뻔했다.

‘제기랄, 이제 빼도 박도 못하는데… 내가 먼저 승부수를 띄우게 될 줄이야.’

피츠는 여전히 힘차게 뿜어져 나오는 자포리자의 마나 줄기를 보곤 한 방에 상황을 역전시킬 도박을 시도하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왼쪽을 공격할 것처럼 시선을 보낸 뒤 자포리자의 눈동자가 움직인 순간, 반대편을 노리며 검을 휘둘렀다.

동시에 이번이 마지막 일격인 것처럼 아껴 오던 마나를 힘차게 밀어 넣었다.

오랫동안 전쟁터를 굴러다닌 용병다운 멋진 페이크 공격이 아닐 수 없었다.

휘익, 콰앙!

검이 부딪치며 헬파이어가 마법진에 부딪치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피츠의 페이크에 당한 자포리자는 다급히 공격을 막았지만, 자세가 무너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결정적인 기회를 잡은 피츠는 재빨리 후속타를 날렸다.

꽝!

자포리자는 어떻게든 스텝을 밟으며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소드마스터의 검을 피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전신에 마나를 일으켜 몸을 보호하기 위해 더욱 많은 양의 마나를 사용해야 했다.

‘…이런. 단전이 조금 뻐근한데.’

하지만 먼저 한계를 드러낸 건 피츠 쪽이었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해서 위력이 강한 공격을 쏟아 내다 보니, 그 역시 마나 소모가 클 수밖에 없었다.

피츠는 속에서 올라오는 쓴 물을 삼키며 천천히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가만히 두고 보기만 할 자포리자가 아니었다.

“하아아압!”

쾅! 콰앙! 카가가각!

자포리자는 누가 보더라도 무리라고 느낄 만큼 위험한 공격을 시도했다.

그의 공격은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마나 줄기의 위력만큼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런 미친놈이!”

피츠는 본능적으로 자포리자가 승부수를 걸었음을 직감했다.

마치 지금이 아니면 이길 수 없다는 듯이 모든 힘을 끌어모아 공격하는 모양새였으니까.

피츠는 이를 꽉 깨물면서도 자포리자의 마지막 발악만 막아 내면 승리할 것이라 판단했다.

피츠도 많은 마나를 소모할 수밖에 없긴 했지만, 자포리자 만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 조금만 더 그렇게 발악해라. 네놈의 마나가 완전히 말라 버리는 순간, 지옥의 고통이 너를 덮칠 테니까. 그리고… 크큭.’

사실 그는 처음 싸울 때부터 한 가지 함정을 파 둔 상태였다.

그것은 바로 상대의 무기를 무력화시키는 것.

피츠는 강자와 싸울 때면 항상 상대가 휘두르는 무기의 한 점을 타격하곤 했다.

그 어떠한 무기라도 특정한 부분에 계속해서 충격이 가해진다면 부러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지금처럼 상대가 큰 공격을 해 오면 똑같은 점에 맞추기가 더욱 쉬웠다.

지금까지 그의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 준 비장의 수단인 것이다.

‘씨발… 단전이 이렇게 뻐근해진 건 오랜만이네. 이만하면 저놈이 마나 결핍을 일으키거나, 검이 부러질 때가 됐는데…….’

물론 개인차가 있겠지만, 자포리자처럼 소드마스터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이라면 지금쯤 마나 운용에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자포리자는 여전히 죽지 않은 기세로 무지막지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콰앙! 퍼엉! 카드드득!

이 정도의 격돌이 여러 번 이어졌으니, 서로의 무기가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피츠의 검은 일반 강철로 만든 것이 아니라, 왕국에서도 몇 개 없는 신의 금속으로 만든 명검이었다.

‘빌어먹을 놈, 무기만 부러지면 진짜 끝이다. 내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라 곱게 죽이려고 했는데, 이렇게 고생시키다니… 편하게 죽이진 않으마!’

그는 당연히 자포리자의 검이 평범한 강철로 만든 검이라 생각했다.

지금까진 마나가 검을 보호하고 있어 견딜 수 있었겠지만, 이제 슬슬 한계가 찾아올 때였다.

자신이 아까부터 계속 검의 한 지점을 타격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피츠의 생각을 비웃듯 자포리자는 마나 결핍을 일으키지도 않았으며, 검도 멀쩡했다.

이제 그는 자신의 명검이 타격을 입을까 불안할 지경에 이르렀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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