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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276화 (276/300)

[276화] 떨어진 보급품

“이렇게 일을 시키고도 설마 내일 아침 일찍부터 전투를 시작하는 건 아니겠지?”

“에이, 아닐 거야. 지금 우리 밥도 못 먹었다고. 시킨 일을 전부 끝내면 한밤중일 텐데, 그때 밥 먹고 나면 새벽이잖아? 아무리 급해도 곧바로 전투를 하지는 않겠지.”

병사들은 오늘 밤만 고생하면 내일은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몸이 힘들어도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산산이 부서졌다.

떨어져 가는 식량에 부담을 느낀 칼리스가 아침부터 전투를 명령했기 때문이다.

“이건 너무한 거 아냐? 어제 밤새도록 일을 시켜 놓고 밥은 쥐꼬리만큼 주면서 아침부터 공격하라니! 잠이라도 제대로 재워야 하는 거 아냐?”

병사들도 식사량이 줄어드는 걸 보고 보급품이 떨어지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아니, 식량이 부족하면 지금이라도 보충하면 되잖아. 이런 식으로 전투를 이어 가면 우리보고 죽으라는 소리밖에 더 돼? 아무리 전쟁에서 병사들이 소모품 취급을 당한다고 해도 이건 너무하잖아!”

병사들에게 조금씩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지만, 그나마 아직 이틀째라 명령에 불복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러나 이튿날의 양상도 첫날과 똑같이 흘러갔다.

의미 없는 투석기와 공성추의 공격.

계속해서 희생되는 병사들까지.

셋밖에 남지 않은 전투 마법사들이 마나를 쥐어짜 방벽을 공격했으나, 견고한 성벽은 도대체 무너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지? 왜 안 무너지는 거냐고! 어제, 그리고 오늘은 마법진이 사라지기까지 했는데, 대체 왜 방벽이 멀쩡한 거냐고!”

칼리스는 애가 타는지 발을 동동 굴렀다.

“부관! 투석기 중 몇몇은 성문을 공격하라고 일러라!”

전쟁의 경험이 많은 칼리스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쿵! 쿠쿵! 쿵!

투석기는 재배치되어 성문을 향해 돌덩이를 날렸다.

공성추와 동시에 날아오는 돌덩이는 꽤 위협적으로 보였다.

게다가 공성추 역시 어제보다 더 숫자가 많아졌고, 또한 바닥의 해자가 단단하게 메워지며 위력이 더욱 올랐다.

이제는 병사들이 흙을 부을 필요조차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뚫리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지만.

“어!”

한참 동안 낑낑대며 공성추를 밀던 병사 중 하나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드디어 성문의 두꺼운 나무가 움푹 패여 곧 뚫리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안에 있던 강철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잠, 잠깐만! 멈춰 봐!”

함께 공성추를 밀던 동료들은 다급한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뭐, 뭐야?”

그러자 방패 뒤에 숨어서 지시를 내리던 기사도 소리쳤다.

“성문에 이상한 게 보입니다!”

“뭐?”

“성문에 붙은 나무가 떨어져 나간 자리 안에 시커먼 게 보입니다.”

병사의 보고를 받은 기사도 궁금했는지 공성추 공격을 잠시 멈추게 했다.

“저게 뭔지 가서 확인해 봐.”

기사가 바로 옆의 병사에게 지시를 내리자, 그는 방패를 머리에 이고 급히 성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시커먼 것을 만져 본 순간, 병사의 얼굴은 떫은 감을 씹은 것처럼 구겨졌다.

“설마…….”

병사는 자신이 생각한 것이 맞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주먹으로 성문을 때렸다.

터엉!

병사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자,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씨발. 이러니까 그렇게 성문을 때리는데도 안 뚫리지.”

완전히 흙빛이 된 얼굴로 변한 병사는 고개만 빼꼼 내밀어 상황을 살피는 기사에게 돌아가 이 사실을 보고했다.

“뭐라고? 성문이 철로 돼 있단 말이야? 그게 말이 돼?”

“정말입니다. 분명 철이 맞습니다. 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병사는 억울하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며 기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네놈이 나를 가지고 장난친 거라면 곧바로 목을 베어 버리겠다!”

기사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병사를 윽박질렀다.

성문이 철로 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지금껏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제가 몇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분명 성문 안쪽이 철로 되어 있습니다.”

꽈악.

기사는 두 손을 불끈 쥐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보통 큰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전황이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지금까지 한 공격이 무용지물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종교 연합군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질 게 뻔했다.

기사는 안전한 곳에서 계속 버티고 싶었지만, 이런 것까지 대충 넘겼다가는 자신의 목이 날아갈 게 당연했기에 직접 확인하기 위해 나섰다.

방패를 머리에 완전히 뒤집어쓰고 몇 걸음을 내딛는 순간, 화살이 날아와 방패를 관통했다.

“제기랄, 화살대도 짧은 게 힘은 왜 이리 좋지?”

화살촉에 손을 살짝 찔린 기사는 깜짝 놀랐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병사들은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몰래 비웃었다.

“진, 진짜잖아.”

성문에 도착한 기사는 나무 사이로 보이는 철의 존재를 확인했다.

심지어 마나를 담아 강하게 내려치기까지 했지만, 차갑고 단단한 강철은 미동도 없었다.

그는 곧바로 돌아가 이 사실을 칼리스에게 알렸다.

“뭐라고? 성문이 철로 되어 있다고? 확실한 거냐?”

칼리스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기사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마나를 담아 두들겼는데도 멀쩡한 게, 그 두께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제기랄! 스탄다비아는 도대체 정체가 뭐란 말인가?”

가볍게 산보하듯 나온 전쟁인데, 지금은 헤어날 수 없는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거대한 방벽의 등장부터 마법사의 공격을 막아 낸 마법진, 보통 활보다 훨씬 위력이 강한데다가 대체 몇 개나 있는지 짐작도 안 가는 화살, 마지막으로 철로 만들어진 성문이라니…….

‘이건 우리가 숫자가 많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다. 풍부한 보급품을 가지고 넉넉하게 시간을 두고 싸운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이기는 게 불가능해.’

결국 칼리스는 스탄다비아 공략이 실패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을 비웃을 것이었다.

그들은 과정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직 2만이라는 병력을 데리고 갔다가 스탄다비아에 졌다는 사실만 기억할 테니까.

그리고 칼리스, 자신은 베르아스 왕국 역사상 가장 멍청한 사령관으로 기록되겠지.

하지만 그는 불명예를 안더라도 이길 수 없는 전쟁에 더 이상 병력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칼리스는 심란한 마음으로 부관을 불러 퇴각 나팔을 불도록 했다.

뿌우우우! 뿌우우우!

퇴각 나팔 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이데카른이었다.

그는 대신관이란 체면도 잊은 채 헐레벌떡 칼리스에게 뛰어왔다.

“칼리스 경, 지금 퇴각을 명령한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아직 한참 싸우는 도중에 퇴각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이 전쟁은 우리가 이길 수 없습니다.”

칼리스는 전쟁의 진행 상황과 결정적으로 후퇴하게 된 이유인 성문까지 전부 설명했다.

하지만 이데카른은 물론이고, 나머지 대신관들 역시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군대를 일으키기 위해 들어간 비용은 천문학적이었다.

각자 종교의 기둥뿌리를 뽑은 것은 물론이고, 엄청난 빚까지 지고 진행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세 종교를 제외한 다른 이들의 참전을 철저히 막았기에, 이대로 물러난다면 그 누구도 자신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게 뻔한 상황.

이데카른의 눈에 평생을 바쳐 이룬 종교가 망하는 장면이 아른거렸다.

그 상상은 결국 자신의 목이 잘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결코 이대로 질 수는 없었다.

“안 돼! 무조건 이겨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스탄다비아를 정복하란 말이야! 알아들었어?”

불길한 상상이 현실이 될 상황에 이데카른은 눈이 완전히 뒤집혀 지금까지 차리던 예의를 벗어던지고 칼리스를 강하게 압박했다.

늘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눈에는 자애로운 기운을 띠고 있던 그가 아니었다.

가면이 벗겨지고 눈이 광기로 번들거리는 이데카른은 더 이상 종교인이라고는 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게… 어렵습니다. 보급품이라도 넉넉하면 모르겠는데, 지금은 방법이 없습니다. 이미 가진 식량도 다 떨어졌고, 병사들이 배를 곯아 가며 싸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후우.

갑작스럽게 이데카른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방금까지 소리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안 된다는 말만 하지 말고 방법을 얘기하라고. 이대로 물러서면 우리는 끝장이야, 끝장. 알아들었어? 혹시 너는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내가 어떻게 해서든 물귀신처럼 같이 끌고 들어가 너와 너희 가족 모두를 지옥으로 인도할 테니까.”

그는 고함을 지르지도 않았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그저 조곤조곤하게 말할 뿐.

그러나 그 말 안에는 진득한 광기가 담겨 있어 사람을 위축시키는 힘이 있었다.

칼리스는 오랜 시간을 전장에서 보낸 자신까지 오싹하게 만드는 이데카른의 협박에 침을 꿀꺽 삼켰다.

이번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분명 이데카른은 저 협박을 현실로 옮기리라.

빈손에서 시작해 가우스 교를 왕국의 3대 종교로 성장시킬 만큼 지독한 사내.

설령 죽더라도 자신이 한 말은 무조건 지킬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칼리스는 후퇴하는 병사들을 한 번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잠시 후, 그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마지막 남은 방법은 방벽에 사다리를 걸어 위로 올라가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성문까지 가는 길을 제외하면 아직 해자를 다 메우지 못해서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며칠을 쏟아야 할 텐데, 과연 밥도 제대로 못 먹은 병사들이 말을 들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데카른은 칼리스의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

솔직히 그가 생각하기에도 남은 방법은 그것밖에 없는데, 정석적으로 공략하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때, 바깥에 널린 병사들의 시신이 보였다.

아직 공성전을 시작하고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죽은 병사가 벌써 몇천 명이었다.

“…그래. 시체, 시체를 이용해. 흙도 날라 오고, 저기 있는 병사들의 시체도 전부 해자에 집어넣어. 그러면 순식간에 해자를 메울 수 있을 거야.”

“아니, 아무리 병사의 피해를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지만… 우리를 위해 싸우다 죽은 시신을 모독하다니요. 그건…….”

칼리스는 이데카른의 미치광이 같은 소리에 곤란함을 느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에게도 전우애라는 것이 있었다.

목표를 공략하기 위해서 발생한 피해는 어쩔 수 없지만, 자신의 명령에 목숨을 걸고 뛰어든 병사들의 시신에 그런 몹쓸 짓을 한다니.

인간의 도리마저 저버리라는 이데카른의 잔혹한 말은 결코 납득할 수 없었다.

“어차피 저 시체들을 방치하면 병이 생길 테니, 모아서 태울 거 아닌가? 그럴 바에야 해자에 넣어 한꺼번에 매장하는 편이 훨씬 나을 텐데?”

“그건 경우가 다르지 않습니까. 아무리 영혼이 떠난 시체라고는 하나, 대함에 있어 절차와 예의가 있는 법입니다.”

“시끄러워! 당장 내가 죽게 생겼는데, 무슨 절차와 예의를 따져?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당장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알겠어?”

이데카른은 칼리스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자기 뜻에 따를 것을 명령했다.

칼리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한 번 흔들고 부관에게 물었다.

“남은 식량은 얼마나 있지?”

“아껴 먹는다면 이틀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오후에 공격을 다시 재개한다. 그리고 기사들을 지금 당장 내 막사로 부르도록.”

“…알겠습니다.”

둘의 대화를 들은 부관이니만큼, 그 역시 망설였지만 명령에 불복종하지는 않았다.

칼리스는 단 한 번의 공격에 모든 걸 걸기로 했다.

지금도 배고픔을 느끼는 병사들에게 식량을 아끼며 싸우라고 했다간 패배할 게 뻔했다.

그래서 남은 보급품을 탈탈 털어 배불리 먹이고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마지막 공격을 실행할 생각이었다.

그가 막사에 모인 기사들에게 대신관의 뜻을 전달하자, 종교에 귀의한 이들답게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오랜만에 배부르게 먹고 일찍 잘 수 있어서 좋아했고, 다음 날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공성추와 투석기는 운용하지 않았다.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방벽과 성문에 목숨을 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남은 병력은 모두 허리춤에 무기를 차고 흙은 짊어진 뒤, 방패병을 따라 뛰었다.

병사들이 해자에 도착한 순간, 기사들이 소리쳤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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