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기자회견
“시체도 모두 해자에 넣는다. 빨리 움직여!”
“네?”
목숨이 오가는 전장임에도 순간적으로 병사들의 몸이 굳을 만큼 어처구니없는 명령이었다.
함께 싸우다 죽은 동료의 시신을 마치 쓰레기를 버리듯 해자에 넣으라니.
“빨리 움직이지 않고 뭣들 하는 거야?”
기사는 검을 뽑아 들고 오러를 내뿜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단번에 목을 치겠다는 듯이.
서걱!
실제로 성질 급한 몇몇 기사는 머뭇거리는 병사의 목을 베어 버렸다.
더러운 흙바닥에 머리가 뒹굴자, 겁을 먹은 병사들이 동료의 시신을 해자에 집어 던졌다.
죽은 병사들은 아군의 손에 의해 눈조차 감지 못한 셈이었다.
첨벙! 첨벙!
여기저기서 시체가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런 정신 나간 놈들… 대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자포리자가 동료의 시신으로 해자를 메우는 것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도저히 인간이라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아무리 전쟁이라지만 지켜야 할 선이 있는 법.
더군다나 종교 연합군이라고 이름 붙은 자들이 하는 짓이라 더더욱 충격적이었다.
“인신 공양을 하는 모습을 보고 저들의 추악함의 끝을 봤다고 여겼는데… 나의 성급한 생각이었구나. 몬스터보다 못한 놈들에게 살 가치는 없다. 네놈들의 목을 베어 간악한 행동의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자포리자의 두 눈이 분노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 * *
대한민국은 헌터 협회의 어설픈 대응으로 인해 떠들썩했다.
일부 언론이 헌터 협회와 우선우를 감싸며 여론 조작을 시도했지만, 워낙에 큰일이라 여론이 좋지 않았다.
정부는 여론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국정조사까지 열었지만, 출석한 우선우는 앵무새처럼 위기 대응 매뉴얼에 따랐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의 뒤에는 명지광이 있었고,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정치권에서도 감싸 주었기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우선우가 생각하기에 지금 당장은 여론이 좋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거나 또 다른 이슈에 묻힐 게 뻔했다.
하지만 그걸 용납하지 않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경일이었다.
그는 이번 사건을 끊임없이 언급했고, 이슈에서 내려오지 않도록 계속해서 기삿거리를 만들었다.
퍼억!
우선우는 경일의 인터뷰 기사가 실린 신문을 보고는 구겨서 던져 버렸다.
날아간 신문은 비서실장의 얼굴에 맞고 바닥에 떨어졌다.
“이런 제기랄! 이 새끼는 대체 뭘 믿고 이리 뻗대는 거지? 비서실장, 너 이놈 만나서 제대로 이야기한 거 맞아? 우리한테 밉보이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전달했는데도 이딴 식으로 나오는 게 말이 돼?”
“예. 직접 만나서 조용히 있으라고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하, 우리한테 찍히면 대한민국에서 헌터로 살기 힘들다고 말했는데도 그랬단 말이지?”
“…그자는 오히려 누가 한번 이길지 두고 보자는 식이었습니다.”
“어디서 이런 미친놈이 튀어나와서는…….”
우선우의 찌푸린 얼굴은 도무지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무언가 방도를 떠올렸는지 아는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김 기자. 나야.”
[네, 협회장님.]
“내가 요즘 머리 아픈 거 알지?”
[그럼요.]
기자는 입안의 혀처럼 살살거리면서 대답했다.
“잘 안다니까 바로 본론부터 말하지. 요즘 새로운 이슈 없어? 국민들의 눈길이 확 쏠릴 만한 그런 거 말이야.”
[그게… 있기는 한데, 협회장님이 원하는 효과를 거두기는 힘들 겁니다. 그 김경일이라는 놈, 오늘 기자회견을 연다고 해서 모든 언론사들이 모일 예정입니다.]
“뭐, 뭐라고? 기자회견?”
우선우는 안 그래도 미칠 지경인데 기자회견이라는 말을 듣자 더욱 미간을 찌푸렸다.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김 기자, 뭐 좀 아는 거 있어?”
[워낙 신출귀몰하게 출현한 인물이라… 정보를 모을 만한 루트가 없습니다.]
“일단 알았어.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사소한 거라도 알려 줘.”
[알겠습니다, 협회장님.]
전화를 끊은 우선우는 끙끙대며 의자에 체중을 실었다.
“대체 어디서 이런 놈이 나와서…….”
비서실장은 우선우가 흐린 뒷말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분명 경일에게 온갖 욕과 저주를 퍼부었으리라.
같은 날 오후, 여러 언론사의 기자들이 한 호텔의 연회장으로 모였다.
“제법 좋은 곳에서 기자회견을 여네.”
“그러게. 개인이 기자회견 할 때 이렇게 큰 호텔에서 한 적이 있던가?”
기자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기자회견이 열리는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연회장 안쪽의 단상에는 여러 테이블과 의자가 준비되어 있어서 기자들의 궁금증을 일으켰다.
“의자가 많은데? 김경일 씨 말고 새로운 인물들도 등장하려나 봐.”
정확히 네 시가 되자, 문이 열리며 경일이 들어왔다.
기자들의 예상대로 그는 혼자가 아니었고, 몇 명의 사람들과 같이 들어왔다.
그중 눈에 띄는 인물이 있었는데, 우해수였다.
“저 사람은 해성 길드 부회장이잖아. 해성 길드가 여기 무슨 일이지?”
기자들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받으며 경일과 우해수,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이 착석했다.
“어, 그러고 보니… 전부 해성 길드 사람들이네.”
기자회견이 시작되기 전부터 카메라의 플래시가 여기저기서 번쩍였다.
처음 마이크를 잡은 건 우해수였다.
“바쁘신 와중에도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녀는 능숙하게 인사를 하고 연회장을 한 번 훑었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해성 그룹은 김경일 씨와 손을 잡고 함께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김경일 씨는 조만간 해성 길드의 길드장으로 취임할 예정입니다. 앞으로 해성 길드는 국민의 안전을 위해 현재 헌터들이 외면하는 고등급 던전 위주로 공략할 것을 밝힙니다. 또한 헌터 협회의 적극적인 협조를 공식적으로 요청하는 바입니다.”
우해수의 말이 끝나자 순간적으로 기자회견장이 조용해졌다.
오직 기자들이 정신없이 노트북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그럼 질문 받겠습니다.”
테이블 옆에 서 있던 진행자의 말에 기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
“네. 앞쪽에 흰색 티를 입으신 기자분?”
진행자의 선택을 받은 기자가 마이크를 잡고 입을 열었다.
“MK일보 이채린 기자입니다. 방금 하신 말씀 중에 여러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했는데, 구체적인 설명 부탁드립니다.”
기자의 질문이 끝나자 다시 우해수가 마이크를 잡았다.
“네, 이채린 기자님. 최근 인터넷에서 던전병 치료 포션이 팔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기자는 갑자기 동문서답하는 우해수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갑자기 등장한 던전병 치료 포션.
믿을 수 없이 저렴한 가격인 건 물론이고, 기존에 섭취하던 던전 고유 식물보다 효과도 훨씬 뛰어났다.
덕분에 죽음만을 기다리던 던전병 환자들이 삶에 대한 희망을 찾았고, 언제 불치병에 걸릴지 몰라 벌벌 떨던 국민들도 모두들 박수쳤다.
하지만 던전병 치료 포션을 누가 만들고, 공급했는지는 아직 베일에 싸여 있었다.
사실 경일은 손유찬에게 그의 이름으로 던전병 치료 포션을 시장에 내도 괜찮다고 했지만, 손유찬이 거절했다.
분명 포션의 개발자는 그가 맞지만, 엄청난 성과를 낼 수 있던 건 전부 경일의 무한대에 가까운 지원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직 할 연구가 산더미인데, 하찮은 명예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빼고 포션만 시장에 공급했다.
경일 역시 손유찬의 의견을 존중했지만, 명지광의 등장으로 상황이 바뀐 만큼 유명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명지광이 대한민국을 뒤에서 움직이는 흑막이라면, 경일은 자신을 드러내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 낼 생각이었다.
해성 그룹과 손을 잡은 것 역시 삼원 그룹과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그 포션이 사장님… 아니, 이제 길드장님이네요. 길드장님이 세우신 포션 연구소에서 제작된 겁니다. 길드장님은 이미 사이클롭스와 싸우기 전부터 사람들을 돕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해성 그룹에서 사용한 최상급 마나 포션과 미스릴 무기와 방어구 역시 길드장님이 제공한 재료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기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포션을 제작하는 것은 연금술사의 영역.
그런데 미스릴을 제공했다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 충격은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마의 구간… 그것을 해결해 주는 음료수 역시 길드장님이 만드신 겁니다.”
우해수가 웃으며 말한 이야기에 장내는 폭탄이 떨어진 듯한 분위기로 변했다.
“우와…….”
“이게 사실이라면……?”
“던전병 치료 포션의 개발자가 김경일 헌터라…….”
“게다가 마의 구간까지 해결했다고 하잖아?”
대부분의 기자들은 환호했으나, 몇몇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중 하나만 진실이라도 엄청난 일인데, 그 모든 일을 한 명의 개인이 주도했다니.
당연히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이어지는 우해수의 발언에 그들의 머릿속은 백지장이 되었다.
“또 하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마운틴 펀치 음료수 사건, 다들 기억하시죠? 마운틴 펀치가 헌터의 레벨을 떨어뜨리고 각성에도 지장을 준다는 소문… 다들 들어 보셨으리라 믿습니다.”
방금까지 시끌벅적하던 기자회견장의 분위기는 갑자기 싸늘해졌다.
다른 건 몰라도 삼원 그룹 이야기를 공식 석상에서 꺼내는 건 금기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삼원 그룹에 밉보여 사라진 회사와 사람들의 이야기는 기자인 그들이 더 잘 알았다.
“마운틴 펀치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공식적으로 해가 될 물질은 없다는 발표가 나오며 사건은 흐지부지 묻혔죠. 그러나 마운틴 펀치를 먹고 피해를 입은 헌터들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저희 해성 그룹은 그 피해를 회복할 수 있는 음료수도 개발했었죠. 사실 그걸 개발한 사람 역시 길드장님입니다.”
몇몇 기자들이 우해수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급히 손을 들었다.
우해수가 그중 한 기자를 지목했다.
“마운틴 펀치에 대한 소문이 많지만, 이미 거짓으로 밝혀졌습니다. 마운틴 펀치는 국가가 인정하는 연구소에서 인체에 아무런 해가 없다고 발표했습니다. 지금 공식 석상에서 국가의 발표를 부인하는 듯한 발언은 문제의 소지가 다분해 보이는데요. 이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기자의 말에 우해수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기자를 주시했다.
“기자분은 마치 삼원 그룹의 대변인 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 당시에는 아직 던전 식물들에 대한 분석이 부족해 원인을 제대로 찾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요. 게다가 실제로 마운틴 펀치를 마시고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증언은 수백 명도 더 모을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거짓이라고 생각하시는데, 저희가 어떤 대답을 해도 납득하실 수 있을까요?”
우해수는 던전 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공격적으로 대응했다.
“이건 삼원 그룹과 공식적으로 척지겠다는 이야기로 들리는데요. 해성 그룹의 공식 입장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또 다른 기자의 질문에 우해수는 거침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지금 이 순간, 해성 그룹이 삼원 그룹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자회견장은 침묵에 휩싸였다.
그때, 한 기자가 허탈해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도저히 상식 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