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네가 나에게 놀아난 거야
해성 그룹도 이런 결정을 내린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요즘 그 어떤 기업보다 잘나가고 있는 와중에 이런 결정은 내리는 건, 더욱 뼈아플 수밖에 없었다.
그들도 억울한 부분이 있었고, 기업의 첫 번째 덕목은 이익 창출인 만큼, 이번 일로 발생할 천문학적인 손해는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벌금보다 해성 그룹이 더욱 두려워하는 건 잘못하다가 경일과의 관계가 끊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당연한 것이, 해성 그룹은 경일의 지원 덕분에 엄청난 발전을 이뤘고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만약 그가 해성 그룹에 등을 돌린다면, 지금의 손해는 아무것도 아니리라.
그로 인해 이들은 경일의 뜻대로 순순히 사과하고, 책임진 뒤 모든 벌금을 완납했다.
해성 그룹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헌터 협회장이 쫓겨난 일로 인해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고 생각한 삼원 그룹의 이미지가 깨졌다.
해성 그룹은 삼원 그룹에게 불만을 가진 이들을 지원했고, 많은 비리를 제보받을 수 있었다.
그동안 아무도 건들지 못한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삼원 그룹이라 그런지, 한 꺼풀 벗겨 보니 온갖 악취가 들끓었고.
해성 그룹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비리 의혹이 매일같이 터져 나왔다.
물론 우선우라는 수족이 잘렸음에도 명지광이 정재계에 미치는 힘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 덕분에 공권력의 개입은 막을 수 있었지만, 이대로 나쁜 여론이 계속 확산된다면 분명 임계점이 넘는 순간이 올 수밖에 없었다.
[두고 보자구. 지금은 네놈이 이긴 거 같지? 하지만 삼원 그룹이 그리 쉽게 무너질 것 같아? 그리고 네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삼원 그룹 같은 건 내가 가진 진정한 힘에 비하면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야. 이제부터 내가 가진 진정한 힘을 보여 주지.]
명지광은 경일에게 전화를 걸어와 광분했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명지광이 가진 진정한 힘은 몬스터였고, 돈과 권력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경일은 굉장히 통쾌했다.
명지광은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며 권력을 누리는 걸 가장 좋아하는 사람.
그가 가진 진정한 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삼원 그룹을 잃은 건 어찌 보면 모든 것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하하, 그런 것 치고는 너무 흥분하는데?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어. 삼원 그룹을 공중분해시키는 게 내 목표야. 그럼 넌 대한민국에서 얼굴 들고 다니기 힘들어지겠지. 고로 너의 취미 생활은 끝났다고 보는 게 맞을 거야.”
[그 입 닥치지 못해? 네 이빨을 모조리 뽑아서 목구멍 속으로 쑤셔 넣기 전에!]
“그러게 시간 있을 때 열심히 좀 하지 그랬어? 난 너와 달리 지금까지 무척 열심히 살아왔거든. 앞으로도 열심히 살 거고. 넌 나를 너무 만만하게 봤어. 그리고 말이야, 네가 아무 생각 없이 나에게 내뱉은 말들이 도움이 많이 됐어. 앞으로도 기대하라고.”
경일이 이 계획을 세울 수 있던 건, 사실 모두 명지광과의 대화 덕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명지광에게 경일은 자신과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던전에 관한 이야기를 아무에게나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경일처럼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있지도 않았고.
그런 와중에 같은 비밀을 가진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자, 자신도 모르게 말이 많아진 것이다.
명지광은 마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에서 갈대밭에 온갖 이야기를 하듯 경일에게 온갖 비밀을 떠벌렸다.
어차피 경일은 자신의 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고, 하기 싫어도 평생 뒤치다꺼리나 할 수밖에 없다고 여겼으니까.
“넌 지금까지 나를 놀리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나에게 놀아난 거나 마찬가지야. 멍청하게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더군.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난 지금도 빠르게 강해지고 있지. 그러니 언젠가는 네놈의 목을 따고 말 거야.”
말을 하는 경일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퍼져 나갔다.
“그리고 또 하나, 넌 나에게 아주 중요한 사실까지 알려 줬지. 바로 몬스터를 관리하고 이곳으로 보내는 자의 존재를 나에게 이야기했잖아? 벨크스라는 이름까지 아주 친절히 알려 주고 말이야. 그런 역할을 하는 자의 존재와 이름을 확인했으니, 이제 죽이러 가는 일만 남은 거 아니겠어? 네 덕분에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 확실히 알 수 있게 돼서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고마워.”
[이 개새…….]
악을 쓰며 욕을 하던 명지광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할 말을 끝낸 경일이 곧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기 때문이다.
경일은 이번 일로 커다란 자신감을 얻었다.
절대 닿을 수 없을 거라고 느낀 상대가 이제 눈앞에 보였으니까.
그를 응원하 듯 스탯이 늘어났다는 메시지가 계속해서 눈앞에 떠올랐다.
이제는 사이클롭스가 나타나도 혼자서 죽일 자신이 생겼다.
그는 해성 길드의 일 때문에 바빠서 한동안 가지 못한 분식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래간만에 동네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자, 그의 얼굴에 서린 살기가 사라지고 밝은 기운이 밀려들었다.
이 아이들에게 지금과 같은 세상이 아니라, 몬스터가 사라진 멋진 미래를 선물하고 싶었다.
* * *
해자는 아군의 시신으로 메워졌다.
병사들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작업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도 이런 짓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병사들의 바로 뒤에서 기사들이 명을 따르지 않는 자는 목을 베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으니 살기 위해서라도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또 하나, 기사들의 협박을 제외하고도 지금까지 스탄다비아에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해서 악이 받친 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해자만 채워지면 이까짓 방벽은 금방 타고 올라갈 수 있어. 그럼 스탄다비아에 사는 인간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이 손으로 죽여 버릴 테다!”
병사들은 이 모든 책임을 스탄다비아에 돌렸다.
증오심으로 치켜 올라간 눈에 광기가 번득였다.
병사들이 한참 동안 해자를 메우는 사이, 이데카른은 피츠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피츠 경, 제발 도와주시오. 이제 곧 해자가 메워질 것이고, 피츠 경이 활약해 준다면 금방 스탄다비아를 점령할 수 있습니다.”
“흥, 내가 왜 그래야 하지요? 난 이미 받은 돈의 몇 배에 달하는 활약을 했습니다. 그에 따른 보상도 다 하지 않고서 막무가내로 도와 달라니.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소리는 그만하십시오!”
“지금 당장 어디서 돈을 마련하란 말이오? 그러지 말고 이번만 도와주시지요. 원래 계약금에서 이천 골드를 더 드리겠습니다.”
“이천 골드라…….”
지금까지 전혀 관심이 없던 피츠조차 혹하고도 남을 만큼 엄청난 액수였다.
이데카른은 공수표라도 무조건 지르고 봤다.
어차피 이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미래가 사라질 판인데, 저런 말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스탄다비아만 정복한다면, 이천 골드 정도는 충분히 만들 자신이 있었다.
피츠는 곰곰이 생각했다.
사실 그는 이곳의 그 누구보다 먼저 종교 연합군이 전쟁에서 질 거라고 예상했다.
아무리 종교 연합군의 병력이 많다고는 하지만, 저 튼튼한 방벽과 성문만 봐도 스탄다비아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이데카른은 방벽만 올라가면 이길 수 있다는 희망에 차 있는 것 같았지만, 스탄다비아에 또 어떤 변수가 숨어 있을지 몰랐다.
더군다나 자신과 손을 섞은 자포리자를 생각하자, 그 밑의 기사단 또한 만만치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맹장 밑에 약졸 없다고, 소드마스터의 밑에는 소드 익스퍼트 상급 수준의 기사도 존재할 가능성이 컸다.
‘종교 연합군 소속 기사들의 수준은 그렇게 높지 않아. 뭐, 그러니까 나를 초청한 거겠지만. 자포리자 놈 옆에 소드 익스퍼트 중급 이상의 기사가 있기라도 한다면, 이번엔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겠지. 그리고 외상 거래라니, 절대 안 될 말이지. 아무리 액수가 커도 외상 거래에 목숨을 걸다니, 그건 완전히 미친 짓이야. 더군다나 내가 위험한 짓을 할 만큼 돈이 급한 것도 아니고…….’
“난 여기서 돌아가겠소.”
생각을 끝낸 피츠는 이 전쟁에서 자신이 빠질 것임을 밝혔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한창 싸우고 있는 도중에 빠지다니… 당신은 명예도 없소? 어떻게 이런 후안무치한 짓을 한단 말이오!”
이데카른이 눈을 무섭게 부라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이건 자기 신도들에게나 통하지, 소드마스터인 피츠 앞에서는 같잖은 행동일 수밖에 없었다.
“흥! 명예? 난 용병이야. 돈이 바로 명예지. 더군다나 이미 난 돈값을 넘치도록 했어! 벌써 잊은 모양인데, 처음 맺은 계약서 내용을 다시 읊어 줄까? 소드마스터와 싸운다는 내용 따윈 전혀 없었지. 나를 계속 고용하고 싶으면 지금 당장 돈을 가지고 오라고. 그리고 그 잘난 주둥이로 한 번 더 나를 모욕하면… 내가 여기서 네놈의 목을 벨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말라고.”
피츠는 이데카른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내려다보며 기세를 흘렸다.
이데카른이 꼬리를 만 건 순식간이었다.
애초에 일반인이 소드마스터를 기세로 압박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생각이었다.
“아, 참. 그리고 말이야, 돈값 이상으로 싸운 건 꼭 받아 낼 테니, 준비해 놓으라고. 아니다, 포기하지. 그게 가능할 것 같으면 내가 이렇게 떠날 마음을 먹지 않았겠지.”
피츠는 대신관들을 노려보고는 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떠났다.
빠른 판단이 그의 목숨을 살린 것과 다름없었다.
“이런 개자식… 두고 보자. 감히 우리에게 이런 짓을 하고도 이 나라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아니, 다른 용병을 고용해서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
이데카른은 피츠의 모습이 눈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의 찌질한 모습에 다른 대신관들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 * *
해자가 전부 메워지자, 준비해 둔 수백 개의 사다리가 옮겨졌다.
그리고 거대한 공성탑이 방벽을 향해 다가갔다.
수백 명의 병사들이 공성탑을 벽 가까이 붙이기 위해 직접 끌고 있었다.
키이이익!
바퀴가 공성탑의 무게에 눌려 비명을 지르면서도 조금씩 굴러갔다.
방벽의 높이와 같은 높이로 제작된 공성탑은 네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각각의 층에 병사들과 기사들이 타고 있었다.
꼭대기 층에 설치된 다리가 방벽에 연결되기만 하면, 계속해서 병력을 밀어 넣을 수 있었다.
계단을 이용하기에 사다리보다 훨씬 이동성이 좋고, 벽이 있어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동안 적의 화살도 막을 수 있었다.
시간이 없어 하나밖에 만들지 못했지만, 공성탑만 연결된다면 방벽을 점령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전군, 총력을 기울여 일거에 적을 모두 죽여라!”
칼리스의 목소리가 전장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와아아아아아!”
“빠르게 사다리를 놓아라! 더 빨리 움직여!”
칼리스의 명령에 따라 동료의 시신을 디디고 수십 개의 사다리가 방벽에 놓였다.
병사가 사다리에 올라서자, 그 무게로 인해 사다리가 시신의 몸을 뚫고 들어갔다.
그러자 진득하고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병사들은 망설이지 않고 사다리에 달라붙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방벽 위의 스탄다비아 병사들도 바빠졌다.
“마지막 발악을 하는군요. 여기가 자신들의 무덤이 될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칼튼이 공격하는 종교 연합군을 보며 혀를 찼다.
“이제 지긋지긋한 종교와의 악연은 여기서 끝내야지. 앞으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저런 인간 같지도 않은 놈들을 상대할 시간은 없어.”
자포리자 역시 얼굴이 구겨지긴 마찬가지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 종교와 얽힐 일은 없을 겁니다. 오늘의 패배로 스탄다비아란 말만 들어도 오줌을 지리게 만들어 놓겠습니다.”
“그래, 칼튼. 자네만 믿겠네.”
“네, 영주님.”
칼튼은 자포리자에게 경례한 후, 적을 향해 달렸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