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기우는 승부의 추
스탄다비아에서 이번 전투에 투입된 인원은 모두 삼천 명이었다.
병사는 물론이고, 스탄다비아를 지키고 싶다며 자발적으로 참여한 영지민들로 채워진 숫자였다.
훈련받은 병사들이 방벽 위에서 적을 상대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돌이나 기름 등 필요한 물자를 나르는 역할을 했다.
종교 연합군이 사다리에 기어오르는 순간부터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으아아아!”
“뜨거워!”
“살려 줘, 살려 줘!”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지는 돌 세례에 종교 연합군 병사들이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작은 방패를 왼팔에 끼고 올라가며 돌을 막아 봤지만, 방패에 전달되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가장 최악은 기름이었다.
방벽 위에 설치된 기름 솥에는 몬스터의 지방이 끓고 있었다.
적의 모습이 가까워지자, 병사들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기름을 부어 버렸다.
“어, 어, 어… 안 돼! 안 된다고! 붓지 마! 제발 붓지 말라고!”
당황한 종교 연합군의 병사가 큰 소리로 애원해 봤지만, 이를 들어줄 리가 없었다.
“으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얼굴에 온통 화상을 입은 병사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는 높은 사다리에서 떨어지고도 죽지 않았다.
해자를 가득 채운 동료의 시신이 완충 작용을 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건 병사에게 엄청난 불행이었다.
뜨거운 기름을 뒤집어쓴 얼굴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과 추락하며 다친 상처로 인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은 고통을 겪게 된 것이다.
또한 척추가 부러졌는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이 모든 건 동료의 시신을 함부로 훼손했기 때문에 벌을 받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병사는 동료의 시신 위에서 오랫동안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었다.
“멈추지 마라! 돌은 이제 곧 떨어질 것이다!”
칼리스는 악을 쓰며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려 애썼다.
공성전이라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건 짐작했지만, 이건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피해가 아닐 수 없었다.
다른 곳이었다면 이런 무리한 공격은 절대 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로서도 더 이상의 방법이 없었다.
이것이 승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슈슈슈슈슉!
그러나 도저히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화살 세례를 보자, 그의 가슴속에서 화가 일었다.
“수천 발… 아니, 수만 발은 쏜 거 같은데, 도대체 얼마나 많은 화살을 가지고 있는 거지?”
칼리스는 병사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화살 비를 보며 이를 갈았다.
병사들의 피해가 너무 컸다.
정상적인 전쟁이라면 이쯤에서 후퇴를 한 뒤 전열을 가다듬어 다음 날 공격을 이어 가야 했지만, 보급이 없는 이상 그건 불가능했다.
갈수록 병사들의 사기가 눈에 띄게 떨어지는 게 보였다.
반면, 스탄다비아의 군대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그때, 칼리스의 눈에 사다리 하나가 방벽에서 밀려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저런 바보 같은…….”
급한 마음에 사다리를 방벽의 너머까지 세워 버려, 방벽 위에 있던 병사가 장대로 밀어 버린 것이다.
기우뚱.
사다리가 뒤로 넘어가며, 달라붙어 있던 열 명의 병사들이 추락하며 등에 큰 충격을 입었다.
그리고 추락한 병사들의 위로 무거운 사다리가 떨어졌다.
“커억!”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충격에 병사는 피 분수를 토해 냈다.
암울한 전황이었지만, 시간이 길어지자 종교 연합군의 장점인 숫자의 유리함이 드러났다.
수십 개의 사다리 중, 미처 막지 못한 몇몇 사다리를 타고 여러 명의 기사와 병사들이 방벽 위로 올라가는데 성공한 것이다.
얼마나 힘들게 올라왔는지, 그들의 눈은 마치 독사처럼 독기가 가득 찬 상태였다.
“이야아아압!”
그들은 곧바로 눈에 띄는 모든 것을 베었다.
“아아악!”
등 뒤에서 갑자기 날아온 검에 스탄다비아 병사들은 미처 대응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런!”
비명을 들은 스탄다비아 병사들이 재빨리 달려와 그들의 앞을 막았다.
“이 새끼들아! 잘도 안전한 곳에 숨어서 우리를 공격했겠다! 이제 우리가 너희의 목을 베어 주마!”
종교 연합군의 기사는 핏발이 가득한 붉은 눈으로 맹수가 먹잇감을 노려보듯 스탄다비아 병사들을 위협했다.
하지만 그 정도 위협으로는 일평생 몬스터와 싸워 온 스탄다비아 병사들의 기를 누르기에 부족했다.
“크크크크.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한참 동안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지 않아서 내 속이 답답할 지경이었어. 이러다 검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전쟁이 끝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지 뭐야?”
스탄다비아 병사 중 한 명이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로 기사의 말을 받아쳤다.
그의 현란한 혓바닥 솜씨를 겪은 기사는 터지기 직전의 폭탄처럼 흥분한 얼굴이 되었다.
“감히 일개 병사 따위가!”
눈이 돌아간 기사가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그것을 신호로 두 진영이 처음으로 검을 맞대고 붙었다.
여러 개의 검과 창이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종교 연합군의 기사들은 마음이 급했다.
자신들이 빠르게 스탄다비아 병사들을 제압하고 이 구역을 차지해야,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병력이 방벽 위로 올라올 수 있을 터.
하지만 그들의 급한 마음과 달리, 스탄다비아의 병사들은 쉽게 뚫리지 않았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전부 창을 들고 기사들의 검을 상대했다.
일정한 폭의 방벽 위에서 서로 마주 보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기사 한 명이 빠르게 스탄다비아 병사를 향해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이 놀라며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돌격한 순간, 스탄다비아의 병사들이 동시에 그를 향해서 창을 내지른 것이다.
좁은 공간에서 한 번에 여러 개의 창이 자신의 몸을 노리고 오자,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고 해도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종교 연합군의 기사들은 모두 앞으로 나와 일렬로 스탄다비아 병사들과 마주 섰다.
일대일의 싸움을 만들어 단번에 자신들을 막고 있는 스탄다비아 병사들을 뚫을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첫 공격 이후, 자신들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검은 휘두르는데 특화된 무기였다.
그러다 보니, 스탄다비아의 병사가 찔러 오는 창을 막으려고 하다 보면 바로 옆에서 싸우고 있는 다른 기사와 얽히는 경우가 허다했다.
결국 창을 피하기 위해선 뒤로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에게는 그런 공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이미 스탄다비아 병사들이 앞뒤로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기랄……!”
종교 연합군의 기사 중 하나가 자신을 향해 찔러 오는 창을 막기 위해 검을 휘두르다 옆에 있는 동료의 팔과 얽혀 버렸다.
기사는 눈에 뻔히 보이는 창에 그대로 몸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몸을 틀어 급소를 피한 덕에 큰 상처는 입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일개 병사에게 공격을 허용한 만큼, 그의 자존심은 몸에 입은 상처보다 훨씬 큰 상처를 입었다.
반면, 공격을 성공시킨 스탄다비아 병사는 기쁜 듯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병사인 자신이 기사에게 부상을 입혔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겠는가.
기사들이 찌르기로 공격을 변환한다고 해도, 검이 창의 리치를 극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제야 겨우 기회를 잡았는데, 이러고 있을 시간은 없다.’
기사들은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스탄다비아 병사들은 미리 훈련받은 듯 한 몸처럼 움직이며 수비적인 태세를 이어 갔다.
작정하고 적이 수비적으로 나오자, 도저히 뚫을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제기랄, 어떻게 좀 해봐!”
종교 연합군 기사 중 한 명이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게 뭐야? 일개 병사들이 왜 이렇게 강한 거지?”
진을 짜고 마치 태엽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스탄다비아 병사들의 기량에 기사가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 새끼들아. 덤벼, 덤비라고! 이 겁쟁이들아, 쫄았어? 쫄았냐고! 스탄다비아 병사들은 모두 너희 같은 겁쟁이야?”
기사 한 명이 스탄다비아 병사들을 도발하기 위해 연신 욕을 내뱉었으나,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리를 지르는 기사를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봤다.
잠시 후, 병사들이 방어만 하며 시간을 끈 이유가 밝혀졌다.
칼튼이 도착한 것이다.
“수고했다.”
칼튼은 기사를 막은 병사들을 칭찬하고 앞으로 나섰다.
“네놈은 또 뭐야?”
종교 연합군의 기사는 새롭게 등장한 칼튼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입이 거친 놈이군.”
칼튼은 바닥을 박차며 상체를 숙였다.
마치 제비가 바닥을 스치고 날 듯, 그는 몸을 바닥에 바짝 붙이고 달려 나갔다.
“헉!”
순간, 기사는 자신의 시야에서 칼튼의 모습을 놓쳤다.
그가 칼튼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자신의 품으로 파고든 뒤였다.
‘대체 언제?’
그의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커억…….”
스탄다비아에서 자포리자 다음으로 가장 강한 칼튼을 종교 연합군의 일개 기사 따위가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기사는 힘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죽은 그의 얼굴은 이 순간을 믿을 수 없는지, 동공이 커다란 알사탕처럼 커진 상태였다.
나름대로 어딜 가든 큰소리칠 수준의 실력이 있는 자인지, 주변에 있던 기사들 역시 놀라서 웅성거렸다.
마치 어린아이 손목 비틀 듯 간단하게 기사를 쓰러트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공성전을 시작하고 계속 당하기만 했으면서 스탄다비아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종교 연합군의 기사들은 급히 칼튼을 에워쌌다.
그러나 그는 포위당한 상태임에도 웃고 있었다.
자포리자가 싸우는 모습을 본 뒤로 그의 피는 누구보다 뜨거워져 있었다.
이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식힐 수 있는 건, 적의 피밖에 없었다.
그가 이토록 무리하게 공격을 감행한 이유였다.
순간, 여러 개의 검이 자신을 향해 동시에 날아왔다.
모든 방위를 점령한 적의 공격에서 죽음의 기운이 느껴지자, 칼튼은 오히려 기쁜 마음이었다.
‘이게 진정한 전투지.’
정신을 극한으로 집중하자 시간이 느려졌다.
자신의 노리는 검의 원초적인 살기가 하나하나 그대로 느껴졌다.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닌데, 어느 검이 가장 먼저 자신에게 도착할 것인지 그 짧은 시간에 모두 알아낼 수 있었다.
발가락 끝에서부터 시작된 짜릿한 무언가가 순식간에 그의 온몸을 돌고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그의 몸과 검이 동시에 움직였다.
모든 방위를 점령하고, 도저히 피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 공격을 그는 힘으로 뚫어 냈다.
좁은 공간을 자신의 순수한 힘으로 찢어발기며 활로를 열었다.
그와 함께 커다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칼튼이 가른 공간에 있던 검의 주인들이 말 그대로 난자당한 것이다.
살아남은 종교 연합군 기사들의 눈동자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모습이었다.
이제야 자신들이 기를 쓰고 스스로 사지로 들어온 것을 알았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 얼마나 많은 희생을 딛고 이곳까지 왔는데…….’
단 한 번의 공격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모두 싸울 의욕을 잃어버렸다.
칼튼은 물 만난 물고기 같았고.
그는 순식간에 종교 연합군의 기사들을 모두 베어 버렸다.
이와 같은 일은 이곳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종교 연합군은 죽을힘을 다해 방벽 위로 올라왔으나, 스탄다비아의 병사들은 공격을 하지 않고 시간만 끌 뿐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기사들은 오러를 일으켜 병사들의 창을 잘라 내려 했지만, 통짜 철로 된 창은 그렇게 쉽게 잘리지 않았다.
억지로 잘라 낸다고 해도 창은 하나가 아니었다.
또 다른 창이 기사의 발걸음을 막았다.
그렇다 보면 스탄다비아 기사들이 빠르게 현장으로 달려왔다.
종교 연합군 기사들이 마나 연공법과 마나 포션으로 실력을 닦은 스탄다비아 기사들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