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281화 (281/300)

[281화] 끝난 전쟁

칼리스는 속이 시커멓게 타올랐다.

그의 눈에 제법 많은 인원이 방벽에 올라간 게 보였다.

저 정도 인원이라면 한 구역 정도는 점령하고도 남았어야 했다.

하지만 스탄다비아의 방벽은 여전히 견고했다.

그때, 드디어 공성탑이 성공적으로 안착하여 방벽과 연결되었다.

스탄다비아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공성탑을 방벽과 붙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공성탑 꼭대기에 설치된 다리가 내려가며 방벽 위로 직행하는 통로를 만들어 냈다.

“됐다!”

칼리스의 초조한 눈빛에 한 줄기 희망이 떠올랐다.

어째서인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병력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상, 이제 공성탑이 마지막 희망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공성탑은 전쟁의 승부를 결정지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스탄다비아의 가장 큰 무기인 방벽을 무력화시킬 존재였기 때문이다.

수많은 기사와 병사들이 방벽 위로 올라가기 위해 공성탑에 들어갔다.

이제 방벽 위를 점령하는데 필요한 건, 시간뿐이었다.

쐐에엑!

그때, 공기를 찢어발기는 거대한 파공성이 들렸다.

수많은 전장을 다닌 칼리스조차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는 의아해하며 소리의 정체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때, 그의 눈에 거대한 화살이 들어왔다.

대형 쇠뇌에서 발사된 거대한 화살이 그대로 공성탑에 박혔다.

퍼억!

화살은 너무나 쉽게 공성탑을 뚫고 들어갔다.

그 위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화살촉이 반대쪽 벽을 관통했을 정도였다.

“으아아아아악!”

누군가 공성탑을 뚫고 들어간 거대한 화살에 맞은 듯, 처절한 비명이 들렸다.

칼리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저건 또 뭐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거대한 화살에 온몸의 힘이 빠졌다.

그리고 또 다시 들리는 파공성.

거대한 화살은 하나가 아니었다.

퍼억! 퍼억! 퍽! 퍽! 퍽!

과녁이 큰 만큼, 화살은 하나도 빗나가지 않고 공성탑에 박혔다.

화살 중 하나가 공성탑의 기둥을 때렸는지, 큰 탑이 휘청거렸다.

그리고 쏟아지는 기름.

방벽과 연결된 공성탑의 다리를 통해 기름이 쏟아져 내렸다.

“아아아아악!”

다리 위를 뛰어가던 병사들이 미끄러졌다.

수십 명의 병사가 흩날리는 눈처럼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칼리스는 지금 보고 있는 광경에서 현실감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벗어날 수 없는 악몽을 꾸는 듯했다.

‘그래. 이건 꿈이야, 꿈이라고!’

하지만 그의 무의식은 그의 귓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이 처절한 모든 것이 전부 현실이라고.

“아닐 거야, 아닐 거야!”

그는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듯이 뒷걸음치며 머리를 흔들고,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런 그를 비웃듯 절망적인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화악!

불이 붙은 화살 하나가 기름에 젖은 공성탑에 정확히 박혔다.

거대한 탑은 순식간에 거대한 횃불처럼 타올랐다.

“아아아아아악!”

“살려 줘!”

공성탑 안에서 대기하던 기사와 병사들의 비명이 그의 귓가를 때렸다.

“하하하, 이건 아니야.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는 거지? 도대체 스탄다비아는 뭐란 말이냐! 이건…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야. 겨우 2만의 병력으로는 이곳의 발끝도 건드리지 못해. 왜지? 난 이렇게 강한 적을 어째서 만만하다고 생각한 거지? 전쟁의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적의 정보 하나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다니… 아니, 정보가 있어도 이길 수 있는 적이 아니야. 이건 전쟁이 아니라 학살이라고! 지금이라도 패배를 인정하고 후퇴해야 해!”

칼리스는 마음이 꺾였다.

그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칼리스의 이런 모습에 가장 당황한 건 바로 이데카른이었다.

“안 돼! 일어나, 일어서라고! 이렇게는 안 돼, 안 된다고!”

이데카른은 칼리스의 멱살을 쥐고 어떻게든 일으켜 세우려 했다.

이대로 총사령관이 전쟁을 포기하는 건 패배를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근력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피둥피둥 살찐 몸으로는 무리였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덩치 큰 기사는 꼼짝도 하지 않았으니까.

“뭐 하는 거야? 와서 돕지 않고!”

이데카른이 칼리스와 마찬가지로 반쯤 정신이 나가 버린 대신관들을 향해 찢어지는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쉐올과 켈레우스 역시 급하게 달라붙어 칼리스의 팔을 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세 명의 대신관들은 칼리스의 몸을 잡은 채로 땀을 뻘뻘 흘렸다.

갑옷으로 전신 무장을 한 기사를 일으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힘겹게 일으켜 세웠음에도 칼리스는 제대로 서지 못했다.

“뭐 해?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해!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려, 지시를 내리라고!”

이데카른이 다시 한번 윽박지르자, 칼리스의 무거운 입이 열렸다.

“대신관님, 인정하시지요. 우리는 졌습니다.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병사들의 목숨이 소중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의 전투는 자살 행위입니다.”

그러고 나서 칼리스는 고개를 돌려 부관을 불렀다.

“부관, 퇴각 신호를 보내라.”

“알겠습니다.”

부관이 나팔을 불려고 하자, 이데카른이 발작하듯 소리쳤다.

“안 돼, 무슨 짓이야! 그 나팔, 당장 내리지 못해? 만약 그 나팔을 불기라도 하면, 절대 네놈을 용서치 않으리라!”

전장의 모든 소음을 뚫고 부관의 귀에 똑똑히 들릴 정도로 이데카른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그러나 다른 때 같았으면 온몸의 소름이 돋을 만큼 절대적인 명령일 테지만, 지금은 포동포동하게 살찐 한 마리 하얀 돼지의 울부짖음일 뿐이었다.

부관은 망설이지 않고 칼리스의 명을 이행했다.

부우우우우우! 부우우우우우!

구슬픈 나팔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병사들은 나팔 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퇴각하기 시작했다.

승산이 없다는 건, 직접 싸운 그들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무려 만오천 명의 병사가 죽었다.

베르아스 왕국 역사상 처음 있는 대승이었다.

“영주님, 이겼습니다! 우리가 승리했습니다!”

“우리가 이겼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칼튼의 기쁨에 찬 목소리와 함께 병사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무려 2만의 군대와 싸워 이긴 것이다.

가슴속에서 기쁨과 함께 자부심이 터져 나왔다.

“영주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저놈들의 목을 모두 베어 버리겠습니다!”

자포리자는 후퇴하는 종교 연합군을 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쟁은 이것으로 끝낸다.”

“영주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적들을 이대로 보내다니요!”

“우리의 강함은 이미 증명했다. 굳이 쫓아가 목을 베어 본들 그게 의미가 있단 말인가?”

“물론 의미는 없겠지만, 이대로 적을 살려 보내는 건…….”

칼튼의 자포리자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말끝을 흐렸다.

적에게 자비를 베풀다니.

이런 건 들어 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이 세계의 상식으로는 칼튼의 생각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지구의 역사를 공부한 자포리자는 굳이 도망가는 적을 쫓아가면서까지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굳이 철혈을 숭상하는 지도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진짜 적이 인간이 아니라 몬스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래.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다네. 하지만 말이지… 과연 저들이 다시 한번 우리를 치기 위해 이곳에 돌아올 거 같지는 않아.”

“확실히… 우리의 힘을 제대로 겪었으니, 다시는 덤비지 못할 것입니다.”

칼튼이 자포리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칼튼, 난 말이야… 승리가 하고 싶지, 사람 잡는 살인마가 되고 싶지는 않다네.”

“영주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병사들은 살려 준다고 해도, 대신관들은 잡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들이 있었지. 그 일은 자네에게 맡기지.”

“알겠습니다, 영주님.”

육중한 성문이 열리고 칼튼과 그의 휘하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 잘 먹어서 힘이 좋은 말은 거침없이 땅을 박차며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다.

대신관들은 얼마 가지 못해 잡혔다.

함께 도망치던 병사들은 그들을 챙기지 않았다.

이미 스탄다비아의 힘을 뼛속 깊이 느낀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챙기기에도 바빴다.

“아악! 이거 놔라.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이냐? 난 너희같이 하찮은 놈들이 함부로 할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이데카른은 끌려가면서도 끝까지 큰소리를 쳤다.

그 모습에 쉐올과 켈레우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금은 큰소리를 칠 때가 아니었다.

머리를 조아려도 살아나기 힘들 텐데, 저런 막무가내라니.

짜악!

찰진 소리와 함께 이데카른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기사 중 한 명이 참지 못하고 그의 뺨을 사정없이 때린 것이다.

“그 입 닥치지 못해? 한마디만 더 떠들면 입을 찢어 버릴 테다!”

“히익…….”

이데카른은 기사의 무시무시한 눈빛에 겁을 먹었다.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퉁퉁 부어오른 뺨의 고통도 순간 잊을 정도였다.

“넌 네놈들이 숭배하는 활활 타오르는 불에 던져질 거야. 내가 직접 널 불 속에 집어 던져 주지. 어디 네놈이 내세우는 교리처럼 살아날 수 있는지 한번 보자고.”

기사의 목소리에는 깊은 한이 묻어 있었다.

그는 바로 가우스 교가 인신 공양이라는 명분으로 불에 태워 죽인 사내의 아들이었다.

그는 사건이 생긴 이후, 가우스 교에게 복수하기 위해 누구보다 노력했고, 마나를 깨우쳐 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안 돼, 그건 절대 안 돼! 살려 줘, 제발 살려 달라고…….”

이데카른은 자신의 미래를 떠올렸는지 눈물을 흘리며 기사에게 빌었다.

그는 지금껏 가우스 교의 그 누구보다도 죄 없는 사람들을 신벌이라는 이름 아래 불 속으로 집어 던졌다.

그렇기에 불에 타 죽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입 닥쳐! 지금부터 입을 열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부러뜨려 주마!”

기사의 살벌한 기세에 기가 죽은 이데카른은 그 뒤로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짐승처럼 끌려갔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이 났다.

자포리자는 마음 한편이 시원해졌다.

“영주님, 축하드립니다!”

전쟁이 끝나고 들린 경일이 자포리자에게 축하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이 모든 게 선인의 덕입니다.”

“아닙니다. 실제로 싸운 건 영주님인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의 스탄다비아를 건설한 건 모두 영주님의 힘입니다. 저는 그저 약간의 도움을 드렸을 뿐이죠.”

“하하하! 무슨 그런 겸손의 말씀을. 자, 한잔하시죠.”

술을 잘 마시지 않는 자포리자도 오늘의 승리가 기쁜지 술상을 차렸다.

경일은 밤새도록 자포리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평소 말이 없던 그도 승리가 기쁜지, 유난히 말이 많았다.

보기 좋은 모습에 경일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찬찬히 자포리자의 웃는 얼굴을 살펴보니, 처음 만났을 때와 많이 달라진 상태였다.

어느새 자포리자의 얼굴에는 못 보던 주름이 생기고 나이가 들어 있었다.

지구보다 훨씬 시간의 흐름이 빠르니 어쩔 수 없었지만, 왠지 쓸쓸한 마음이 밀려들었다.

아직은 같이 보낸 날보다 앞으로 함께할 날이 훨씬 더 많이 남아 있지만, 더 오래 지내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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