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너와 나, 둘 중의 하나는…
“조만간 다시 화려하게 복귀하면 돼. 내 성질을 건드렸으니, 어디 한번 두고 보자.”
“이제야 제대로 할 마음이 생긴 거야?”
이를 뿌드득 가는 명지광에게 말을 거는 존재가 있었다.
암던의 수호신 엘사였다.
털이 복슬복슬한 귀여운 강아지 모습의 엘사가 비꼬듯이 말했다.
“닥쳐!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넌 그냥 입 닥치고 있어!”
명지광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멍청한 놈.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도 모르는 놈이 어디서 큰소리야?”
“이런 개새끼가… 어디서 함부로 입을 놀려!”
명지광은 눈을 부릅뜨더니 그대로 엘사를 걷어차 버렸다.
“어이쿠!”
작은 덩치의 엘사가 방망이에 맞은 야구공처럼 날아가 나무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명지광의 갑작스러운 기습에 영체화를 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걷어차인 것이다.
“내가 어쩌다 저런 놈을 만나서… 이번에는 져도 좋으니, 제발 저놈을 내 눈앞에서 치워 달라고.”
흙바닥을 심하게 구른 엘사의 하얀 털은 흙이 묻어 엉망이 되었다.
둘은 던전의 주인과 수호신의 관계이지만,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다.
던전에서 깨어난 엘사는 그 어느 때보다 쉽게 지구를 정복할 수 있으리라고 예상했다.
지금까지 계속 승리를 거뒀기에 상대 던전은 페널티를 받아 훨씬 늦게 등장할 것이고, 자신은 그 사이에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의외의 변수가 나타났다.
바로 명지광이었다.
던전과 연결될 인간을 고를 수 없다는 사실이 이토록 큰 변수가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던전과 연결된 인간들은 모두 수호신인 자신의 말에 당연하게 복종했다.
하지만 문명이 발전한 지구인에게 수호신 같은 말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과학적인 사고를 하는 그들에게 신의 명령이니, 사명이니, 그런 고리타분한 건 관심을 끌지 못한 것이다.
명지광은 오히려 귀여운 강아지 생김새인 자신을 비웃기까지 했다.
아무리 설득해도 그는 인류를 멸망시키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싸움에서 이기면 인간의 평균 수명보다 몇 배나 길게 살면서 던전을 즐길 수 있다고 말해 봤지만 허사였다.
“이 멍청한 개새끼야. 이런 원시림에서 혼자 살아서 뭐 할 건데? 하루 세 끼 밥 먹는 데만 시간을 보내는 삶이 행복할 것 같아?”
“혼자가 아니야. 너를 진정으로 믿는 이들에겐 게이트가 보여. 그럼 던전으로 데리고 올 수 있고, 함께 살면 돼.”
“멍청한 소리 하고 있네. 고작 사람 몇 명 더 늘어난다고 행복할 거 같냐?”
네로가 지구의 문명을 처음 경험해 봤듯이, 엘사 역시 이렇게 문명이 발전한 사회는 처음이었다.
살다 살다 침략한 행성의 문명이 걸림돌이 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처음에는 엘사도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던전의 의지에 반해서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던전과의 유대가 약해지다가 곧 단절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다시 던전의 주인이 정해지리라.
비록 시간을 조금 낭비하긴 했지만, 상대 던전이 생성되려면 한참 남았으니 문제가 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명지광은 바보가 아니었다.
던전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기회를 주는지 잘 알고 있는 만큼, 순순히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정말 최소한의 유대만을 이어 가며, 던전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자신의 영달을 위해 사용했다.
아무리 엘사가 수호신이라고 해도, 산전수전 다 겪은 현대인인 명지광에 비하면 순진한 편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명지광의 행동 방식을 이해했지만, 그게 그의 행동을 용납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사명을 거스르고 자신의 사리사욕만 채우는 그가 예뻐 보일 리가 없었다.
“기다리면 돼. 아무리 명지광이 던전의 사명을 거부해도 유대를 잇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인류 멸망을 실행에 옮길 수밖에 없어. 원래 계획보다 시간이 오래 걸릴 뿐, 결국은 내가 이기는 거지. 수천 년을 살아온 내게 이 정도 시간은 찰나일 뿐이야.”
엘사는 명지광을 포기하고 그저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상대 던전이 나타났다.
그럼에도 엘사는 그리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상대 던전이 나타났지만, 던전의 주인이 힘을 갖추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수준이니 있으나 마나 한 존재에 불과할 터.
명지광은 던전에 비협조적인 인간이었으나, 오랜 시간을 함께한 만큼 상당히 강했다.
즉,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상대가 힘을 써 보기도 전에 인간은 멸망할 게 분명했다.
그런데 엘사의 상상을 뛰어넘는 일이 발생했다.
바로 명지광이 경일과 손을 잡으려고 한 것이었다.
엘사가 탄생한 이래, 이렇게 화가 나긴 처음이었는데…….
다행히 상대가 명지광의 제안을 거절했다.
안심한 엘사를 다시 한번 놀라게 한 것은 경일의 강함이었다.
‘뭐지? 던전의 주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왜 이렇게 강한 거지?’
느낌이 안 좋았다.
될성부른 떡잎은 자라기 전에 잘라야 했다.
엘사는 자존심을 죽이고 명지광을 살살 꼬셨다.
경일의 거절에 자존심이 상한 명지광은 엘사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기회를 잡은 엘사는 명지광과 힘을 합해 사이클롭스라는 무지막지한 몬스터를 보냈다.
그리고 안심했다.
분명 초보치고는 강하지만, 경일이 이겨 낼 만한 몬스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상대 던전은 사라질 것이고, 시간만 보내면 이번에도 승리할 수 있을 터.
그때, 그의 예상을 깨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경일이 이긴 것이다.
“어… 어, 어, 어?”
엘사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말을 잇지 못했다.
“대체 단기간에 어떻게 저토록 강해진 거지?”
그때 깨달았다.
될성부른 떡잎이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이미 탄탄한 거목이라는 것을.
그리고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최악의 강적이 나타났다는 것을 말이다.
전화위복이었을까, 좋은 일도 하나 생겼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명지광이 처음으로 열심히 활동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신통치 못했다.
경일에게 번번이 깨지기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자신이 명지광의 화풀이로 걷어차여 흙바닥을 구르고 있는 것이고.
“수많은 던전의 주인을 만나 봤지만, 저렇게 꼴 보기 싫은 놈은 처음이야. 사명만 아니었으면… 에휴, 차라리 져도 되니까 저놈에게서 빨리 떠나고 싶어.”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엘사의 귀여운 얼굴에는 깊은 수심이 걸려 있었다.
* * *
던전을 나온 명지광은 변장을 하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결국 여러 죄목으로 인해 수배를 당했기 때문이다.
그는 명예와 권력을 모두 잃었음에도 아직 돈이 남아 있으니, 그리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아쉬운 건 많았지만, 돈으로도 어느 정도의 즐거움을 누리고 갑질을 할 수는 있으니까.
그러나 즐거운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누구도 못 알아보게 변장했음에도, 경찰들이 귀신같이 찾아온 것이다.
매번 게이트를 열고 도망치다 보니,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있었다.
“…이상해. 별장이야 아는 놈이 있다고 쳐도, 지금 내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 거지?”
위치 추적을 의심해서 핸드폰도 몇 번이나 바꿔 보고, 심지어는 아예 놔두고 다녔는데도 경찰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고 자신을 쫓아왔다.
그제야 명지광은 이게 경일의 소행임을 깨달았다.
* * *
평온한 어느 날, 경일의 핸드폰이 미친 듯이 울려 댔다.
몇 번을 끊어도 전화는 다시 걸려 왔다.
이쯤 되면 짜증이 날 법도 한데, 경일은 핸드폰이 울릴 때마다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뭐야? 너 아침에 뭐 잘못 먹었어?”
핸드폰을 보며 실실 웃는 경일을 보며 네로가 물었다.
“아니요. 지금 전화 건 사람이 누군지를 아니까, 저절로 웃음이 나오네요.”
“누군데 그래?”
“암던의 주인이요“
“아하?”
그러자 네로 역시 경일과 마찬가지로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경일은 아예 핸드폰을 꺼 버렸다.
두 시간 쯤 지났을 까, 핸드폰을 켜자 곧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푸하하하! 어지간히 분한 모양이네.”
경일은 이런 짓을 하는 놈들을 많이 봐 왔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약간의 손해도 참지 못하며, 상대에 대한 배려 따위는 전혀 없이 자신의 감정만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인간들.
스탄다비아가 있는 베르아스 왕국의 썩은 귀족들이 전부 이런 행태를 보였다.
역시나 전화를 받자마자 엄청난 욕이 들려왔다.
[야, 이 개자식아! 이거 전부 네 짓이지? 너, 내가 죽여 버릴 테다! 산 채로 소금에 절여 버릴 거라고!]
“너, 한 번만 더 욕하고 소리치면 전화 끊어 버린다.”
[…….]
그제야 명지광은 입을 닫았고, 그저 씨근덕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경일이 큭큭거리며 웃자,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될 텐데? 이런 식으로 나를 대해서 좋을 건 없어. 아직 내 힘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모양인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이래도 되나?]
“그래. 던전이 존재하는 이상, 네 힘이 줄어들지는 않겠지. 하지만 말이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날 위해서 일하라니, 어쩌니 그러던 인간이 보이는 반응이라기엔 너무 재미있군.”
빠드득.
명지광이 이를 가는 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좋아, 인정하지. 지구에서의 생활은 내게 무척 중요하다. 그러니 협상을 하자.]
“협상? 무슨 협상?”
지금까지와는 다른 태도에 경일도 호기심을 보였다.
[지구에서의 생활을 방해만 하지 않으면, 나 역시 지구에 해를 끼치지 않겠다.]
“푸하하하하하!”
경일은 명지광의 말을 듣자마자 폭소했다.
[너, 너, 너… 이 새끼가… 죽고 싶어!]
자존심을 굽히고 한 제안이 무시당하자, 명지광은 버럭 화를 냈다.
경일은 그 목소리를 들으며 휴대폰 너머에서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눈에 선했다.
분명 화산이 터지기 일보 직전처럼 달아올라 있겠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런 짓을 하면 던전과의 유대가 끊어진다는 걸 네가 더 잘 알 텐데? 그리고 내가 너 같은 쓰레기 놈들을 많이 처리해 봐서 하는 말인데, 넌 절대 가만히 있을 놈이 아냐. 입에 감히, 감히, 이런 말을 달고 살면서 나에게 어떻게 해서든 복수를 하고 싶어 하겠지. 사실 넌 몬스터 같은 건 관심도 없을 거야. 복수만 할 수 있다면 말이지. 내 말이 틀려?”
[으으으…….]
정곡을 찔렸는지, 명지광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너와 나, 둘 중 하나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거야. 넌 나를 이용해서 오래도록 권세를 누리고 싶은 모양인데, 절대 그럴 일은 없어. 난 최선을 다해 네놈을 죽일 테니, 너도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지금 그 말, 후회하게 해 주지. 네 결정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을 거다!]
“그따위 말로 날 협박하려는 모양인데, 이젠 안 통해. 나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는다? 그게 말도 안 되는 개소리란 건 네가 더 잘 알 거야. 네 잘못을 나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하다니. 확실히 양심이 없는 새끼들은 어쩔 수가 없네.”
경일은 명지광에게 한마디, 한마디 적나라한 사실을 때려 박았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