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폭풍전야
“이미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앞으로도 죽겠지. 그게 인류에 씌워진 운명이고. 난 최선을 다해 희생을 줄이는데 노력할 거야.”
[너, 잘 생각해. 이 전화가 끊어지면 더 이상의 협상은 없다. 내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면 인류가 멸망한다. 내가 지구에서 설 곳을 없앴다고 해서 힘이 사라진 게 아니야.]
“미련이 많이 남는 모양인데, 그럼 내가 먼저 끊어 주지.”
경일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다음 날, 명지광의 협박 따윈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해성 길드에서 엄청난 발표가 나왔다.
기존의 포션보다 기능이 향상된 포션을 고작 10분의 1의 가격으로 판매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동안 포션 값이 워낙 비싸 레벨이 낮은 헌터들은 웬만해서 사용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돈을 많이 버는 고등급 헌터들은 포션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느냐면, 막상 뚜껑을 열어 보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포션의 가격은 고등급 헌터들에게도 만만하지 않았고, 비싼 물건을 아끼고 싶어 하는 게 사람의 심리였다.
더군다나 마의 구간이 없어지면서 스캐빈저가 사라졌고, 옛날보다 재료 수급이 힘들어져 포션값이 오른 상태라 더 그렇기도 했다.
헌터들은 이 소식에 열광했다.
연금술사들이 무조건 반대를 외쳤지만, 워낙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았던 터라 그들의 목소리는 묻히고 말았다.
이건 모두 광산에 스탄다비아 세계의 사람들이 추가되면서 던전 고유 식물 생산이 늘어나면서 가능해진 것이었다.
기존의 것보다 훨씬 효능이 뛰어난 던전 고유 식물을 네로가 알려 주었고, 거기에 손윤찬의 기술이 만나니 몇 배나 되는 시너지 효과가 발생했다.
경일은 효능이 높아진 포션을 그대로 팔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헌터가 혜택을 볼 수 있게 농도를 희석했다.
그럼에도 기존의 포션을 능가했으니, 손윤찬의 뛰어난 실력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충격적인 소식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경일은 자포리자의 허락을 구한 뒤, 마나 연공법을 풀었다.
이미 이길호가 직접 증명했듯이, 헌터들의 전력은 이것으로 더욱 올라갈 터.
“길드장님 같은 분이 인류의 편이라 정말 다행이에요.”
그동안 워낙 바빠 밥 한 끼 할 시간도 없던 경일과 우해수가 오래간만에 한 테이블에 앉았다.
잘 차려진 밥상 위에는 경일이 좋아하는 갈비와 함께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하하하, 아닙니다. 저도 죽기 싫으니까 열심히 하는 거죠. 과한 칭찬은 부담스럽습니다.”
우해수의 칭찬에 경일이 멋쩍게 웃었다.
“아 참. 그나저나 마나 연공법은 어떤가요? 익히는데 문제는 없습니까?
누가 봐도 급히 화제를 돌리는 모습이었지만, 우해수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 정말 대단해요. 마치 스킬이 하나 더 생긴 기분이랄까? 각성을 두 번 한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안 그래도 요즘 몬스터가 강해져서 어려움이 많았는데, 헌터들도 마나 연공법 덕분에 예전보다 실력이 늘어서 점차 안정을 되찾고 있다고 하네요.”
“마나 연공법은 열심히 하는 만큼 강해지니, 노력을 많이 해야 할 거예요.”
“안 그래도 길드원들에게 뒤처지지 않게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요. 아 참, 그리고 마나 연공법이 알려지고 나서 마나 포션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어요. 여기저기서 마나 포션을 보내 달라고 하는데… 보낼 물량이 없어요.”
“뭐, 어쩔 수 없죠. 생산되는 던전 고유 식물의 양에도 한계가 존재하니까요. 손윤찬 연금술사님이 효능을 더 높인 마나 포션을 개발 중이긴 하지만, 한동안은 이대로 가야 할 듯합니다.”
손윤찬의 이름이 나오자 우해수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분은 정말 천재인 거 같아요.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의 연금술사이고, 더 높은 경지를 바라보다니…….”
“참, 연금술사 하니까, 기존 연금술사 헌터들과의 협의는 잘 되고 있어요?”
이번에 해성 그룹에서 기존 포션보다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가격으로 포션을 대량 풀자, 연금술사들은 모두 실직자가 되었다.
이에 해성 그룹은 그들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포션 생산 라인에 취직할 것을 제의했다.
“아니요. 워낙 대접받고 살아서 그런지 요구가 너무 과해서 진전이 없어요.”
“그럼 이쪽에서 줄 수 있는 마지노선을 제의하고, 그래도 거절하면 없었던 일로 하세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어쩔 수 없죠. 그리고 명분은 우리 쪽에 있으니, 여론도 그렇게 나쁘지 않을 겁니다. 연금술사도 헌터인 건 맞으니까, 사실 남들처럼 던전에서 몬스터 사냥만 해도 먹고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잖아요.”
“알겠어요. 안 그래도 골치 아팠는데 오히려 잘됐네요, 솔직한 심정으로 일할 사람이 넘쳐 나는데, 그런 귀족 마인드를 가진 인력들은 전혀 받고 싶지 않거든요. 휴… 일반 길드원들한테 얼마나 갑질을 해 댈지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고요.”
“하하하, 하긴 그렇기도 하겠네요. 아 참, 손유찬 연금술사님 경호는 잘되고 있죠?”
“네. 최고의 헌터들로 구성해 경호하고 있습니다.”
해성 길드에서 포션 판매를 시작한 뒤, 이 포션을 개발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이목이 쏠렸다.
경일과 해성 길드가 아무리 정보를 차단한다고 해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손윤찬이 개발자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몇 차례 암살 시도가 있었다.
망해 버린 연금술사들이 배후에서 일으킨 사건이었다.
손윤찬의 존재는 몬스터와의 싸움에서 큰 역할을 맡고 있는 터라 미리 경호하고 있었기에 다행이지, 자칫하면 큰일이 날 뻔했다.
경일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실망했다.
지금 자신의 모든 행동은 인류를 위한 길인데, 개인의 이익 때문에 살인까지 서슴없이 저지르다니…….
사실 경일이 필사적으로 명지광의 행보를 막는 이유 중 하나가 이런 것 때문이었다.
만약 자신이 세상에서 몬스터를 완전히 없애겠다고 하면, 분명 명지광에게 동조하는 인간들도 꽤나 많으리라.
던전은 양날의 검이었다.
몬스터를 뿜어내는 던전은 위험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지구의 인간들에게 유용한 자원을 내주기도 했다.
던전의 공포에 떨면서도 막상 완전히 사라진다고 하면, 인류는 절반으로 갈라져 싸울게 분명했다.
“명지광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요?”
명지광이 어떠한 행보도 보이지 않고 조용하자, 우해수가 그의 행방에 대해 궁금해했다.
“그자의 성격을 생각했을 때,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분명 이를 갈면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겠죠. 자신의 힘을 확연히 드러낼 수 있는 커다란 한 방을 말이죠.”
“설마… 또 다시 사이클롭스를 보내는 건 아니겠죠?”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건 사이클롭스보다 더 위험한 일이 벌어질 확률이 높다는 겁니다.”
“이거 참 걱정이네요. 명지광, 그 사람은 분명 미치광이가 틀림없을 거예요. 어떻게 같은 인간이 전 인류를 멸망시키는데 앞장설 수가 있죠?”
“그자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은 전혀 없을 겁니다. 오로지 다친 자존심을 회복할 생각만 가득할 테지요. 오랫동안 암던의 혜택을 누리고 살아오면서 완전히 괴물이 된 거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길드장님은 나이도 적은데 가끔 보면 상황 분석하는 게 엄청 날카로우신 것 같아요. 지금처럼 말이죠. 사람 보는 눈도 그렇고, 깜짝 놀랄 때가 많아요.”
“하하하, 보는 게 많으니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게 무슨?”
경일은 의아하게 바라보는 우해수에게 빙그레 미소를 지어 주었다.
명지광이 암던으로 쫓겨나고 평온한 나날이 이어졌다.
몬스터가 차원을 넘어올 때 소실되는 힘이 약해지면서 몬스터가 강해진 것을 제외하고는 별달리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 이건 폭풍전야나 마찬가지겠지.’
경일은 이 시간이 조금이라도 오래 이어지기를 바랐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자신뿐만 아니라 헌터들 역시 더욱 강해질 테니까.
* * *
스탄다비아의 승리는 근래 최고의 화젯거리였다.
스탄다비아가 이길 거라고 예상한 사람이 하나도 없던 전쟁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으니 말이다.
변방의 아주 작은 영지인 스탄다비아의 이름은 어느새 왕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퍼져 나갔다.
“왕국의 사정은 어떤가?”
스탄다비아가 유명해진 것이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가장 걱정스러운 게 왕국에서 내려오는 직접적인 간섭이었다.
물론 자포리자는 베르아스 왕국에서 독립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종교 연합군과 부딪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다른 강적을 만나는 건 피하고 싶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자포리자의 질문에 첩보장 블라도가 보고를 시작했다.
“국왕의 건강이 매우 나빠져 방에서 나오지 못할 정도라고 합니다. 그에 따라 왕자들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암중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건, 왕위를 노리는 게 왕자들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귀족은 물론이고, 몇몇 장군들까지 왕관을 노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멀쩡한 왕자들이 있는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
“저… 왕자들이 하나같이 함량 미달의 인물이라고 합니다. 멍청한데다가 욕심은 많아, 저들 중 왕이 탄생한다면 나라가 망할 정도라고 하더군요. 이에 귀족과 장군들이 베르아스 왕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새로운 왕이 탄생해야 한다고 부르짖는 중입니다.”
“그럼 왕국에서 견제가 들어올 일은 없겠군.”
“예. 그 말씀이 맞습니다만… 저희에게 협력을 요청할 세력이 나타날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여겨집니다.”
블라도의 보고를 듣고 있던 카스만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이번 전쟁에서 쇠뇌라는 새로운 무기를 보였고, 왕국의 돈을 쓸어 담고 있으니 분명 여러 세력에서 협조 요청이 들어올 겁니다.”
“음…….”
자포리자가 가벼운 신음을 내뱉었다.
“분명 말로만 협조지, 협박을 하는 세력도 분명 나타날 것입니다. 뭐, 그런 건 거부하면 그만이고, 그놈들이 저희에게 실질적으로 압박을 가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됩니다.
자포리자가 카스만의 분석에 신경을 집중했다.
“왕위를 노리고 있는 이상, 우리가 거절한다고 해도 이곳까지 군대를 파견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당장 수도에서 힘을 발휘하기도 모자란 판국에 가진 힘을 나누는 짓을 했다간, 다른 세력에 잡아먹힐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이제야 운이 좀 따라 주는군요. 지금 가장 필요한 게 시간인데… 잘됐군요. 칼튼, 기사들의 육성은 어떻게 되고 있나?”
카스만의 보고를 들은 뒤, 자포리자는 칼튼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무 문제없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대로 쭉 나간다면, 조만간 영주님이 원하는 숫자에 도달할 것으로 보입니다.”
“좋은 소식이군. 하지만… 숫자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개개인의 실력이야. 앞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한 명, 한 명의 실력이 더 중요한 걸 잘 알 거야.”
“명심하고 있습니다.”
자포리자는 자신의 가신들에게 이 세계의 진실을 알렸다.
그리고 언젠가 모든 준비가 끝나면, 몬스터 숲에서 몬스터를 관리하는 벨크스의 목을 베기 위해 출병할 것이다.
명지광, 그리고 그가 경일과 처음 마주한 날 밝힌 벨크스라는 존재.
그 둘이 바로 스탄다비아의 진짜 적이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