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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287화 (287/300)

[287화] 함정

“…뭐지? 여기로는 몬스터들이 한 마리도 안 오네?”

경일이 떠나자, 헌터들을 공격하는 몬스터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던전의 몬스터들은 모두 경일을 공격하는데 동원된 것이다.

물론 경일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덤벼드는 숫자가 많다는 것은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이기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무작정 공격하는 것이 꼭 그의 다리를 잡으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꿀꺽!

경일은 체력 포션을 한 병 비웠다.

3일 밤낮을 쉬지 않고 몬스터를 사냥했더니, 아무리 그라도 피곤이 밀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가 죽인 몬스터가 몇 마리인지 기억도 나질 않을 지경이었다.

이제는 리자드맨의 보호색이 눈에 익어, 숲에 몸을 숨기고 있는 놈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경일은 리자드맨에게 오러가 실린 단검을 선사했다.

보호색이 자신들을 지켜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리자드맨은 아예 육탄전으로 밀고 들어왔다.

“크에에에에엑!”

“캬아아아악!”

리자드맨과 나무 몬스터, 그리고 날아드는 수십 개의 창.

“이런 제길.”

동료가 창에 맞아 죽어 가도 리자드맨은 투창을 멈추지 않았다.

수십 마리가 몰려들자 경일의 시야가 가려졌고, 그때를 노리듯 더 많은 창이 날아왔다.

갑자기 창 몇 개가 리자드맨의 몸을 뚫고 나타났다.

아무리 경일이 강하다 해도, 눈앞에서 갑자기 나타난 창을 피하는 건 무리였다.

“윽.”

물론 갑옷이 창을 막아 냈지만, 충격까지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잠시 멈칫한 사이, 몇 개의 창이 더 명중하며 내장이 진탕되었다.

푸욱!

또 하나의 창이 리자드맨의 몸을 관통해서 경일의 얼굴을 노렸다.

“허억!”

경일은 급하게 고개를 젖히며 창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만 볼을 찢고 지나갔다.

피가 튀고 살점이 날아가며, 마치 조커의 입처럼 얼굴 한쪽이 길게 찢어졌다.

붉은 피가 턱을 타고 흐르며 피부를 간지럽혔다.

“이거 만만치가 않네. 이렇게 독하게 덤벼오는 몬스터는 처음인데? 이게 다 몬스터가 차원을 넘어오면서 받던 페널티가 사라져서 그런 거겠지.”

경일의 예상은 반만 맞았다.

아무리 차원을 넘어오며 힘을 유지하더라도 이 정도로 많은 숫자는 정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명지광.

1년간 조용하던 그가 벌인 일이었다.

경일이 명지광의 개입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리자드맨이 평소보다 숫자가 많고 흉포하기는 해도, 사이클롭스 때처럼 목숨의 위기는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 지치기는 해도 감당할 수준이니, 외부의 개입이 있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던전에 들어온 지 벌써 5일째.

던전의 크기는 평범한 곳과 다를 바 없었고, 평소라면 던전을 폐쇄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지만 이제 겨우 목적지까지 절반 정도 왔을 뿐이었다.

경일은 잠을 자지 못한 탓에 눈에 빨간 핏발이 돋아나 있었다.

언뜻 보면 리자드맨의 눈과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몬스터가 있는 거야? 이 정도면 진짜 던전 열 개 정도는 합친 거 같은데?”

불평을 중얼거리면서도 경일은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그의 반짝이던 갑옷은 몬스터의 피로 절여져 검붉은 색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멀리서 보면 완전한 혈인의 모습이었다.

“제기랄. 몬스터의 피비린내 때문에 코가 썩어 문드러질 지경이야. 이것들아! 제발 그만 좀 덤벼!”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것도 문제지만, 또 하나의 큰 문제가 있었다.

배고픔이었다.

지금도 배는 꼬르륵 소리를 내며 음식을 달라고 난리였다.

체력 포션이 아무리 효능이 좋아도 배고픔까지 해결해 주진 않았다.

싸우는 중간 중간 겨우 물을 먹을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음식까지 먹지는 못했다.

5일 동안 고작 에너지 바 몇 개만 섭취한 게 다였다.

경일은 이제 거의 학습된 기계처럼 움직였다.

이제는 몸이 알아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공격을 피했고, 아주 적은 힘으로도 치명적인 공격을 할 수 있었다.

또,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싸우는 중간 중간 필름이 날아갔다.

분명 잠깐 잠든 것이리라.

하지만 몸은 위기에 반응하며 인공지능처럼 몸을 움직여 몬스터를 죽였다.

7일째 되는 날.

드디어 몬스터의 공격이 줄어들었다.

아무리 몬스터가 많아도 던전 크기에 한계가 있는 이상, 몬스터의 수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경일은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음식을 먹었다.

우걱우걱!

손에 쥔 고기를 원시인처럼 뜯어 먹었다.

그가 앉은 곳의 주위는 온통 몬스터의 피로 검붉었다.

온도와 습도가 높은 환경이니 만큼, 몬스터의 사체에서 삐져나온 내장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악취를 내뿜었다.

그러나 7일간 굶은 경일에게 이런 역겨운 환경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고기의 육즙을 느끼느라 정신이 없었다.

잠들어 있던 미각 세포가 깨어나 두 팔을 넓게 벌리고 만세를 외쳤다.

험난했던 지금까지의 여정을 단번에 씻어 내려 주고, 자신을 위로해 주는 끝내주는 고기의 맛.

입안에서 감칠맛이 폭발했다.

“이런… 왜 눈물이 나는 거야.”

홀쭉해진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경일은 큼직했던 고기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그때를 기점으로 몬스터의 공격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8일째 되는 날은 나무 위에서 잠시나마 눈을 붙일 수 있을 정도까지 되었다.

“혼자라는 것이 이렇게 힘드네. 누군가가 옆에 있었으면 조금이나마 깊게 잠들 수 있었을 텐데.”

9일째 되는 날, 드디어 던전의 핵에 도착했다.

평소라면 가장 강한 몬스터가 여기에 배치되어 있을 텐데, 이미 모두 덤빈 듯 핵 주변에는 파리 새끼 하나 없었다.

“후~ 진짜 식겁했네. 뭐 이런 던전이 다 있어? 인해 전술이란 게 얼마나 무서웠을지 그 심정이 저절로 이해가 된다.”

경일은 망설이지 않고 던전의 핵을 깼다.

그러자 던전은 순식간에 활력을 잃었다.

쌩쌩한 한낮의 모습에서 순식간에 석양이 지는 듯한 해 질 녘으로 변한 것이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헌터들에게 빨리 돌아가야 하지만, 경일은 긴장이 풀리자 너무 졸렸다.

그는 근처의 가장 큰 나무로 올라가 로브로 몸을 묶은 뒤 말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일주일이 넘게 잠을 자지 못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경일은 이 순간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된다.

“으아아아. 잘 잤다. 오래간만에 정말 꿀잠을 잤네.”

불편한 나뭇가지 위에서의 잠이었는데도 그 어떤 침대보다 편안했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며 마른세수를 했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자고 싶었지만, 기다리고 있을 동료들에게 빨리 가 봐야 했다.

돌아가는 길은 짧았다.

그렇게 힘들게 온 길이었는데, 하루 만에 도착할 정도였다.

경일이 나타나자 우해수가 빠르게 달려왔다.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걱정했잖아요.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그게… 리자드맨이 끝도 없이 덤비는 바람에 그랬어요. 이렇게 몬스터가 많은 던전은 저도 처음이었어요.”

“이상하네요. 이쪽으로는 한 마리도 안 왔어요. 길드장님이 가시고 걱정했는데, 그 뒤로는 잠잠했죠. 던전의 모든 몬스터가 길드장님에게 몰린 모양인데, 이런 경우가 있었나요?”

“저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여러분들이 안전했으니 다행이긴 한데… 기분이 좀 이상하긴 하네요. 일단 나가죠.”

“네.”

이들은 빠르게 게이트로 갔다.

다행히 경일 역시 어느 정도 컨디션을 회복했고, 헌터들은 계속 쉬었으니 체력이 남아돌았다.

이들은 서로 던전 폐쇄를 축하하면서 게이트를 통과했다.

그런데 게이트를 통과해 지구로 돌아왔을 때, 이들을 맞이해 준 건 헌터 협회의 사람들이 아니라 몬스터였다.

“이게 뭐야?”

거리에 몬스터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당장 이들의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오우거, 오크, 트롤, 헬 하운드까지 네 종류나 되었다.

“크아아아앙!”

“컹컹!”

“쿠어어어어억!”

이들을 발견한 몬스터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미친…….”

경일이 가장 먼저 앞으로 달려 나가며 몬스터를 공격했다.

그의 검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몬스터가 쓸려 나갔다.

목이 잘린 오크의 이빨 틈새에 인간의 고기로 보이는 찌꺼기가 끼어 있었다.

입가에 말라 버린 검붉은 피만 봐도 오크가 인간을 먹은 지 꽤 시간이 지났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경일이 급하게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 보이는 건, 몬스터가 뜯어 먹고 남은 뼛조각과 아스팔트에 말라붙어 주인을 알 수 없는 내장 조각뿐이었다.

사람의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도시는 회색빛이었다.

폭탄이 터진 듯이 건물은 부서지고, 도로 위에 수백 대의 차량이 뒤엉킨 채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

매캐한 연기가 물결처럼 넘실거렸고, 검은 재들이 바람을 따라 둥둥 떠다녔다.

인도로 돌진한 차 밑에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바닥으로 말려들어 간 사람의 팔다리가 보였다.

경일은 참혹한 모습에 현실감이 없었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우해수가 다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했다.

“던전 체인지에 이은 던전 브레이크.”

우해수가 탄식하듯 말을 내뱉었다.

“처음에 열린 건 D급 게이트였는데, 헌터들이 들어가고 던전 체인지가 일어났다고 하네요. 헌터 협회에서 빠르게 대응해 봤지만, 모인 헌터에 비해 던전에서 나온 몬스터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고 해요. 결국 저지선이 뚫리고, 도시 전역으로 몬스터가 퍼진 상태라고 합니다. 인명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갈지 현재로선 짐작조차 안 된다고…….”

경일은 곧바로 이 일의 배후가 누구인지 감이 왔다.

‘이런 개자식이.’

방금 나온 A급 던전이 바로 명지광이 판 함정이었다.

‘던전에 왜 이렇게 몬스터가 많은지 의아했는데, 전부 내 발을 묶으려는 수작이었어.’

그는 뜨겁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눈앞에 보이는 몬스터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굳이 핸드폰 액정을 보지 않아도 누군지 짐작이 됐다.

이런 기막힌 타이밍에 전화할 사람은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자신을 놀리기 위한 목적이라는 걸 뻔히 알지만,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

경일은 통화를 눌렀지만 끓어오르는 화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뭐야? 전화를 받았으면 말을 해야지.”

“이런 미친 개새끼가!”

명지광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의 얼굴이 차갑게 경직되었다.

“이게 어디서 욕지거리야? 어린놈의 새끼가 싸가지 없게 말이야.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인지… 아, 넌 애미 애비가 몬스터한테 뒤졌으니 제대로 배우질 못했겠구나. 안타깝게… 쯧쯧.”

경일은 부모의 죽음까지 들먹이는 명지광의 혀를 뽑아 버리고 싶었다.

“내가 없는 요 일 년간 행복했지? 아주 잘나가시더군. 대한민국의 영웅으로 거듭나셨던데, 축하해. 하하하!”

명지광은 경일을 엿 먹이려는 듯이 큰 목소리로 웃어 젖혔다.

그의 웃음소리에는 그동안의 서러움을 한 방에 갚았다는 듯한 통쾌함이 녹아 있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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