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양심의 가책?
“…넌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거지?”
경일은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면서 그를 윽박질렀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넌 던전에서 몬스터를 죽일 때 양심의 가책을 느낀 적 있어?”
경일은 명지광의 말을 듣는 순간, 그를 인간의 탈을 쓴 몬스터일 뿐이라고 단정지었다.
아무리 던전이 주는 영광이 달콤하더라도 마지막 인간성까지 버리다니.
“하하하,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를 지껄이는지…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씨불이는 걸 보니, 아주 급한가 보네. 이제야 내 힘이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실감이 돼? 그러니까 내가 손을 내밀었을 때 곱게 잡았어야지. 이 사태의 책임은 전부 너에게 있는 거야.”
명지광은 교묘한 말로 이 사태의 책임을 경일에게 돌렸다.
물론 경일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마음의 부담이 없을 수는 없었다.
“이런 쓰레기 새끼. 내가 너만은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말겠어.”
경일은 목이 메는 것을 참으며 한 자, 한 자 이를 악물며 말했다.
분노와 비통함이 섞인 그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느껴지는 것은 착각이 아니었으리라.
지구에 게이트가 열렸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지만, 직접 겪어 보니 말로만 들었을 때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리고 말이야… 사람들이 너를 영웅시하고 있는데, 그것도 모두 내가 깨 주지. 넌 내가 그동안 아예 지구에 나오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은데, 최근 1년 동안 나 역시 열심히 활동했다고. 앞으로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대해. 하하하하!”
명지광은 웃음소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한동안 경일이 약을 올리고 먼저 전화를 끊어 왔었는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셈이었다.
경일은 스탄다비아와 오가며 던전 안에서 지낸 것이 거의 반 년 정도는 되었다.
게다가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모두 뉴스거리가 되고 있으니, 명지광이 경일의 일정을 파악하는 것 역시 매우 쉬웠을 것이다.
즉, 명지광은 반 년 동안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지구에서 활동했다는 이야기가 됐다.
‘나도 모르게 너무 방심하고 있었던 건가?’
그동안 너무 잘 풀려 마음을 놓고 있던 자신을 질책해 봤지만, 일은 이미 벌어졌다.
“아아아아악!”
그때, 누군가의 비명이 들리며 경일의 상념도 깨졌다.
“저는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부길드장님이 헌터들을 인솔해 주세요.”
경일은 우해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비명이 들린 곳으로 달려갔다.
최대한 빠르게 달려가면서도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렇게 귀청이 찢어질 듯한 새된 비명은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단말마라는 것을.
현장에 도착하자, 비명의 주인은 머리가 터져 회색 뇌가 흘러나온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오크 한 마리가 즐겁게 혀로 시체를 핥아 먹고 있었다.
“으으으…….”
사람의 시체가 오크에게 들려 한낱 정육점의 고기 취급을 받고 있었다.
혐오스러운 장면에 신음을 흘린 경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달려가 검을 휘둘렀다.
슈각!
오크의 목을 베었음에도 경일의 분노는 멈추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리라.
조금만 더 빨랐다면… 그런 후회감이 경일의 몸을 휘감고 있었으니까.
그는 비참하게 죽은 남자의 명복을 빌어 주며 또 다른 몬스터를 찾아 뛰었다.
거리에는 온통 사람의 시체 천지였다.
정확하게는 잔해만 남은 상태.
경일이 한 발짝씩 아스팔트를 밟을 때마다 신발 밑창에 진득한 무언가가 딸려 올라왔다.
사람의 피였다.
다시 한번 이를 악물고 도시 전체를 뒤졌다.
거리는 엉망이었다.
몬스터의 등장에 놀란 사람들이 도망가려다 교통사고를 냈고, 몬스터들이 차 지붕을 밟고 다니며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을 인형 뽑기처럼 뽑아 먹었다.
“살, 살려 주세요……!”
도움을 받으려고 외친 소리에 반응하는 건 몬스터 밖에 없었다.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소녀는 다가오는 몬스터를 보고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입을 손으로 막아 보지만, 이미 늦은 상황.
몬스터는 정확히 소녀를 인식했고,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입가와 들고 있는 도끼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본 소녀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고, 조금씩 몸을 움찔거리더니 종래에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이 떨었다.
“크아아아아앙!”
몬스터 역시 눈앞의 먹잇감이 저항할 의지를 완전히 잃었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큰 소리를 지르며 소녀를 더욱 압박하기 시작했다.
“아, 으어, 으아아아…….”
소녀는 마지막을 직감한 듯, 무어라 말을 뱉으려 했지만, 그녀의 굳어진 혀에서 나오는 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소리뿐이었다.
몬스터가 소녀를 내려치기 위해 도끼를 들어 올린 순간,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퍼억!
그러고 나서 들려오는 피부가 뚫리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
소녀는 생각보다 약한 고통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상하게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도끼를 맞고도 아무렇지 않다고?’
이상했다.
그때, 갑자기 얼굴에서 느껴지는 감촉.
무언가 따뜻하고 진득한 것이 얼굴에 뚝뚝 떨어졌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소녀가 질끈 감은 눈을 뜨자, 방금까지 괴성을 지르던 오크가 고통으로 일그러진 채 죽어 있었다.
놈의 이마를 창이 관통하고 있던 것이다.
“살았…….”
선 채로 죽어 있는 몬스터를 보고 기쁨에 소리를 지르려다가 얼른 입을 막았다.
방금 전 한 실수를 반복할 뻔한 그녀는 곧바로 몸을 숨길 공간을 찾아 기며 움직었다.
* * *
경일은 들판을 달리는 야생마처럼 정신없이 뛰고 있었다.
일일이 몬스터를 상대할 시간이 없었다.
약해 보이는 몬스터는 마나를 실은 창과 단검을 던져 해결했다.
그랜드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면서, 마나의 유실 없이 투척을 할 수 있게 된 게 사태를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방금 전, 한 소녀를 공격하려던 오크를 곧바로 창을 던져 죽일 수 있지 않았는가.
경일의 손에는 기다란 창이 들려 있었다.
멀리 떨어진 몬스터를 죽이기 위해 사정거리가 긴 창을 이용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여기저기서 날뛰는 몬스터를 처리하던 중, 여러 마리의 트롤이 뭉쳐 있는 장소를 발견했다.
놈들의 커다란 손에는 사람의 찢겨진 몸통이 쥐어져 있었다.
트롤은 기분 좋게 시신을 뜯어 먹으며 성찬을 즐기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너무나 잔인한 광경에 고함이 터져 나왔다.
분노가 서린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경일은 곧바로 손에 들린 기다란 창을 휘둘렀다.
아직 대항할 자가 남아 있단 사실에 놀란 트롤이 손에 쥐고 있던 시신을 내던지고 몽둥이를 잡았다.
경일은 벽에 부딪쳐 더욱 손상되는 시신을 보며 다시 한번 분노를 곱씹었다.
트롤은 창에서 느껴지는 강한 힘에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놈의 의도와 달리, 창날은 가볍게 몽둥이를 자르고 지나가 뱃가죽까지 갈라 버렸다.
“크헉… 캬아아아악!”
트롤은 몽둥이가 잘릴 거라고는 예상 못했는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가 뒤이어 느껴지는 불에 타는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닥쳐.”
경일은 듣기 싫은 소리를 꽥꽥 질러 대는 트롤의 입에 창날을 박았다.
놈 역시 최후임을 직감했는지, 왕방울만하게 눈을 떴지만, 경일의 싸늘한 눈동자는 변하지 않았다.
창을 회수하자 트롤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경일은 이미 반시체나 마찬가지인 트롤의 목숨을 완전히 끊지 않았다.
놈은 뜨거운 태양 아래 모습을 드러내 말라 죽어 가는 지렁이처럼 아스팔트에 엎어진 채, 밀려드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간간이 경련을 일으킬 뿐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쉽게 죽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듯, 눈동자엔 불신만이 가득했다.
“크어어어어!”
“캬르르르륵.’
하나가 이렇게 쉽게 쓰러지자, 옆에 있던 트롤들이 발광하듯 소리를 질러 댔다.
다섯 마리의 트롤이 경일을 향해 한번에 덤벼들었다.
콰아앙!
다섯 개의 크고 묵직한 몽둥이가 경일을 향해 떨어졌다.
하지만 몽둥이가 때린 것은 아스팔트였다.
검은 아스팔트 조각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크륵?”
트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식간에 사라진 경일이 이해가 되지 않는 모습이다.
“쿠워워워!”
서걱!
그때, 동료의 울음소리와 함께 발목에서 화끈한 고통이 치밀어 올랐다.
경일이 몽둥이를 피하며 바닥과 닿을 듯이 자세를 낮추고, 정면에 있는 트롤의 양 발목을 잘라 낸 것이다.
분명 튼튼하고 질긴 가죽일 텐데, 마치 두부처럼 부드럽게 잘려 나갔다.
“키에에엑!”
높은 옥타브의 비명을 지르고, 발목이 잘린 트롤이 썩은 나무처럼 무너져 내렸다.
경일은 바닥에 뒹구는 트롤의 목에 창날을 꽂고서는 재빨리 뒤돌아섰다.
쿵쿵쿵쿵!
네 마리의 트롤이 단단한 바닥을 울리며 뛰어왔다.
경일은 재빨리 사선으로 마주 달려 가장 왼쪽의 트롤에게 다가갔다.
놀란 트롤들이 급하게 방향을 바꾸어 보지만, 가장 왼쪽의 트롤의 목은 이미 분리된 상태.
이제 트롤 정도는 경일의 상대가 되기엔 부족했다.
힘, 스피드, 기술 그 무엇 하나 트롤이 따라갈 수 없었으니까.
단지 덩치 큰 사냥감일 뿐이었다.
경일의 긴 창이 춤을 추었다.
창이 지나갈 때마다 트롤의 가죽과 함께 그 속에 숨겨진 부드러운 속살이 갈라졌다.
수십 번의 창격이 끝났을 때, 트롤들의 몸에서 성한 곳은 단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경일은 잔인하게 인간을 죽이고 뜯어 먹은 놈들을 곱게 죽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몸의 힘줄이 모두 잘린 트롤에게 남은 건 죽을 때까지 끔찍한 고통을 받는 것 뿐이었다.
경일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남자에게 다가갔다.
조금 전까지 산 채로 트롤의 손에 잡혀 있던 남자였다.
그는 한쪽 팔이 없었는데, 트롤이 어깨와 함께 씹어 먹었기 때문이다.
“쿠, 쿨럭… 살, 살려 주세요…….”
남자는 힘겹게 입을 열어 말했다.
고작 몇 마디를 했을 뿐인데, 열린 입에서 검붉은 피가 폭포처럼 흘러나왔다.
경일은 힐링 포션을 꺼내려다가 행동을 멈췄다.
이미 힐링 포션으로도 살아남기 힘든 상처였다.
오히려 어설프게 힐링 포션으로 회복시켜 봤자, 남자에게 오랫동안 고통을 줄 뿐.
대신 물병을 꺼내 남자에게 먹였다.
남자는 천천히 입속에 들어오는 물을 마셨다.
탁해져 가는 눈에 약간의 빛이 돌아왔다.
“감, 감사합니…….”
남자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목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경일은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고 남자의 시신을 들어 건물의 구석진 곳에 눕혔다.
훼손당하지 않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경일은 답답했다.
던전 속이라면 알아서 몬스터가 달려들었겠지만, 먹이가 많은 지구에 나온 몬스터는 일일이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몬스터가 지르는 승리의 함성과 사람들의 비명으로 인해 이곳은 지옥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하늘에는 현장을 파악하기 위해 몇 대의 헬기가 계속해서 날아다녔다.
“…이상한데.”
경일은 몬스터의 수에 비에 헌터들의 숫자가 작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을 텐데, 왜 이렇게 헌터들이 없지?’
그 순간이었다.
빌딩 높은 곳의 유리창이 통째로 박살이 나면서 수많은 유리 파편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쏟아져 내렸다.
경일이 고개를 위로 든 순간, 거리에 헌터들이 없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도로를 끼고 있는 양쪽 건물에서 샤벨 타이거가 뛰어내렸기 때문이다.
경일은 순식간에 두 마리의 샤벨 타이거에게 포위당했다.
“이런 놈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헌터들의 투입되도 안 보일 수밖에 없었구나. 명지광, 이 새끼가 그동안 아주 제대로 이를 갈았어. 이 정도로 큰 스케일로 일을 벌이려면 보통 힘든 게 아니었을 텐데… 설마 이놈들 말고도 더 있는 건 아니겠지?”
경일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등 뒤에 있던 샤벨 타이거가 경일을 향해 앞발을 후려쳤기 때문이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