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자신보다 훨씬 강할 수도 있는 사람
“흥!”
등줄기에 느껴지는 서늘한 느낌에 경일이 재빨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경일이 서 있던 곳에 샤벨 타이거의 발톱이 지나가자, 아스팔트가 마치 밭의 고랑처럼 움푹 파였다.
“이제 너희를 겁낼 이유가 없지.”
경일이 스탄다비아에서 샤벨 타이거와 싸움 도중 죽을 뻔하기는 했지만, 그때는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르기도 전이었다.
이제 그랜드 소드마스터가 된 이상, 두 마리라고 해도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았다.
경일이 재빨리 자세를 잡고 창을 휘둘렀다.
챙!
샤벨 타이거도 발톱을 들어 경일의 창을 막아 냈다.
검과 발톱이 부딪히자 금속성의 소리가 났다.
동시에 다른 하나의 샤벨 타이거가 절묘한 순간을 노려 공격했다.
놈은 경일의 방어가 가장 약해지는 순간에 끼어든 것이다.
경일은 창을 내팽개치고 급하게 몸을 굴렸다.
조금 전까지 경일이 서 있던 곳에 네 개의 발톱이 허공을 찢어발기고 지나갔다.
“제법인데.”
땅을 구르면서 묻은 먼지를 털며 샤벨 타이거를 노려봤다.
경일은 움직이며 자신에게 유리한 위치를 잡으려 했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보이지 않는 사각에서의 공격은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샤벨 타이거는 서로가 한 몸인 듯 경일을 중심에 두고 움직였다.
“몬스터 주제에 진형을 짠다고?”
처음 샤벨 타이거와 싸웠을 때, 보통의 몬스터와 다르게 고고한 느낌까지 받았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이렇게 지능까지 높을 줄은 몰랐다.
샤벨 타이거는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경일에게 달려들었다.
경일의 앞뒤로 총 여덟 개의 날카로운 발톱이 몸을 썰어 버리기 위해 날아왔다.
‘앞뒤가 막혔으면 옆으로 피하면 되지.’
경일이 오른발에 힘을 주고 옆으로 스텝을 밟은 순간, 샤벨 타이거가 재빨리 반응했다.
남아 있던 다른 쪽 발을 들어 경일이 피하려는 공간을 먼저 선점한 것이다.
“이런…….”
경일이 어쩔 수 없이 방패를 꺼내 앞에서 오는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등 뒤에서 오는 공격까지 막을 방법은 없었다.
방패에서 전해지는 충격에 몸이 뒤로 밀렸고, 그런 경일을 마중 나온 건 날카로운 네 개의 발톱이었다.
“윽!”
발톱이 갑옷을 뚫고 들어왔고, 경일은 도로 앞으로 튕기듯 날아갔다.
볼썽사납게 몇 바퀴나 굴러 건물에 부딪치고 나서야 경일은 멈추어 설 수 있었다.
거친 아스팔트에 노출된 피부가 쓸려 화끈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가장 아픈 곳은 역시 샤벨 타이거의 발톱에 직격으로 맞은 등이었다.
축축한 느낌이 나는 게, 꽤 부상을 입은 듯했다.
“쿠워워워워!”
경일이 뒹구는 모습이 만족스러운지 샤벨 타이거가 그를 바라보며 길게 포효했다
“씨발, 몬스터 새끼가 말이야.”
속에서 욕지거리가 치밀어 올랐다.
최상위급 몬스터 중의 하나인 만큼, 샤벨 타이거에게 뿜어져 나오는 힘이 여간 강한 게 아니었다.
자신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체중 차이에서 오는 힘까지 무력화시키기엔 무리였다.
급하게 마나를 돌려 몸을 보호했는데도 받은 충격이 적지 않았다.
경일은 재빨리 힐링 포션을 꺼내 마셨다.
“뭐지? 옛날에 이런 걸 한 번 겪어 본 적이 있었던 거 같은데…….”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리고 곧 떠오르는 헌터의 모습.
바로 세보 길드가 자신을 잡기 위해 보냈던 쌍둥이였다.
“그놈들은 서로의 감각을 공유해 굉장한 시너지를 발휘했었지. 설마 저놈들도 쌍둥이인 건가? 설마 몬스터도 스킬이 있는 건 아니겠지?”
경일은 샤벨 타이거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치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었다.
힐링 포션이 빠르게 고통을 줄여 주고 있지만, 아직은 부족했다.
경일이 공격할 기미가 없자 샤벨 타이거는 적극적으로 나서 조금 전과 같이 포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래, 제대로 한번 붙어 보자고.”
등의 통증으로 아직 행동이 불편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경일이 성큼 앞으로 나서자 약속이나 한 듯 샤벨 타이거가 앞뒤로 다시 한번 포위했다.
샤벨 타이거는 절대 단독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경일이 자신보다 훨씬 강하다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두 놈은 경일을 중심으로 천천히 원을 그리며 돌았다.
“샤벨 타이거가 이렇게 똑똑한 놈이었어? 몬스터 숲에 이런 놈들이 많으면 골치 아픈데…….”
경일은 자포리자의 준비만 끝나면, 그와 함께 몬스터 숲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몬스터를 육성하고 지구에 몬스터를 보내는 존재를 없애야만 스탄다비아와 지구, 두 세계가 안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겸사겸사 명지광의 힘도 없앨 수 있고.
처음에는 명지광을 죽이는 쪽으로 계획을 세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불가능했다.
그자를 죽이기 위해서는 던전으로 도망가기 전, 짧은 시간 안에 처리할 정도로 강해져야 하는데 그 경지가 어느 정도일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물론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더 강해지겠지만, 명지광 역시 가만히 있지 않고 발전하리라.
그러다가 몬스터로 인해 인류가 먼저 멸망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잠깐 딴 생각을 한 탓일까.
타이밍을 재던 샤벨 타이거 한 마리가 달려들었고, 나머지 하나 역시 곧이어 덤볐다.
그 순간 무언가 결심한 듯 경일의 눈이 빛났다.
‘이거다!’
경일은 정면으로 파고들었다.
체격 차이가 워낙 커서 샤벨 타이거의 공세를 정면에서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 이제 오직 피하는 것뿐인데, 피할 공간을 스스로 없애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공격한 샤벨 타이거조차 의문으로 가득 찬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지만, 경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샤벨 타이거의 커다란 발에서 1미터에 달하는 네 개의 발톱이 튀어나왔다.
오러를 두른 검에도 버틸 만큼 단단한 발톱이 경일을 난자하려는 순간.
경일은 자신을 둘러싼 주위가 천천히 느려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면으로 뛰어든 덕분에 뒤에서 자신을 노리던 공격은 무력화된 것과 마찬가지.
이제 눈앞의 발톱만 상대하면 됐다.
그는 인벤토리에서 장창을 꺼내 찔렀다.
창의 길이가 발톱보다 훨씬 길기 때문에 창이 발톱과 발톱 사이를 찔러 들었다.
그러나 샤벨 타이거는 공격을 뒤로 물릴 수 없었다.
이미 한 번 발을 내지른 이상, 자신의 의지로도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일은 다리를 단단하게 고정하고 창을 찌르며 버텼다.
날카로운 창끝이 샤벨 타이거의 발을 관통해 발목 어귀에서 튀어나왔다.
“크어어어어어어엉!”
샤벨 타이거의 입에서 커다란 고통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됐다.”
경일은 공격을 성공시키자마자 창에서 손을 떼고 그대로 옆으로 굴러 샤벨 타이거의 포위망에서 빠져나왔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샤벨 타이거는 자기 발을 뚫고 나온 창을 보며 마구 신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이빨로 창대를 물어 부러뜨린 후, 창을 뽑아내고 분한 듯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어 저 멀리 던져 버렸다.
놈이 화를 참지 못하고 경일에게 달려가기 위해 발을 내딛는 순간, 샤벨 타이거의 몸이 살짝 휘청거렸다.
도저히 발에 힘을 줄 수 없던 것이다.
“아플 거야. 발톱 사이의 연한 살을 찔렀거든. 그리고… 너희가 업그레이드 됐듯이, 나도 마찬가지거든.”
지금까지 경일을 견제하기 위해 거리를 유지하던 샤벨 타이거의 연계가 깨졌다.
경일은 재빨리 물러나 들고 있던 창을 그대로 던져 버렸다.
샤벨 타이거가 놀라 피하려 했지만, 경일의 창을 완전히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푸욱!
마나가 실린 창이 샤벨 타이거의 단단한 가죽을 거침없이 비집고 들어가 박혔다.
“크아아아앙!”
가슴에 창이 박힌 곳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샤벨 타이거가 비명을 질렀다.
“하, 이제 상황이 바뀐 셈이네. 지구에 오지 않았으면 조금이나마 더 살았을 텐데 말이야.”
놈들은 이대로 가다간 죽는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는지, 두 마리가 동시에 덤벼들었다.
하지만 상처를 입은 샤벨 타이거는 조금 전처럼 기민하게 움직이지 못했다.
합격이 깨진 이상, 더 이상 무서운 적이 아니었다.
경일은 요리조리 놈들을 농락하며 샤벨 타이거의 몸에 창을 꽂아 넣었다.
직접 찌르기도 하고, 때로는 거리를 벌려 투창을 하면서 말이다.
흥분한 샤벨 타이거가 무리했지만, 그럴수록 경일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 건 물론이고 부상을 입은 부위가 벌어졌다.
마치 투우 경기에 나선 투우사와 소처럼 보였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샤벨 타이거의 몸에는 수십 개의 창이 꽂히게 되었다.
마치 거대한 고슴도치 같은 모습이었다.
“끼잉~”
샤벨 타이거가 드디어 기가 꺾였는지 처량한 울음소리를 냈다.
목숨을 구걸하는 듯한 제스처였지만, 경일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꺼져라.”
경일의 공격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없었다.
샤벨 타이거의 입 주위에 흥건하게 묻어 있는 발견한 순간부터 그는 어떻게 해서든 놈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 주려고 노력했다.
급소를 피해 수십 개의 창을 더 박아 넣자, 샤벨 타이거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처음에는 살기 가득했던 눈이 곧 흐리멍덩해지더니, 이윽고 움직임이 완전히 멎었다.
샤벨 타이거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헌터들이 거리로 투입되기 시작했다.
경일은 헌터들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는 게 느껴졌다.
알고 보니, 그들도 처음부터 싸우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도시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터진 이상, 헌터 협회는 총력을 다해 몬스터와 맞서는 게 당연했다.
몬스터의 숫자가 많아 헌터들의 희생이 컸지만, 후퇴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막지 못하면 더 큰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었으니까.
여러 몬스터와 맞서면서도 계속해서 헌터를 투입해 승기를 잡았으나, 샤벨 타이거의 등장으로 인해 순식간에 승부의 추가 옮겨 갔다.
헌터들은 샤벨 타이거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이번에 처음으로 지구에 등장한 몬스터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낯선 몬스터의 등장에 조심하게 접근했지만, 놈은 너무나도 강했다.
수많은 헌터들이 추풍낙엽처럼 쓸려 나갔다.
협회장은 인명 피해가 더 커질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후퇴를 명령했다.
여기서 헌터들을 더 잃는 건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 했다.
게다가 샤벨 타이가 하나에 헌터들이 전부 묶여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들은 전선을 넓게 잡고 던전에 들어간 경일을 기다렸다.
예상보다 공략이 늦어지며 희생이 커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헌터 협회의 생각대로 곧 경일이 샤벨 타이거를 사냥했고, 곧바로 헌터들을 투입한 것이다.
“제기랄, 이럴 줄 알았으면 더 괴롭히다 죽이는 건데… 너무 쉽게 보내 줬어.”
경일은 샤벨 타이거에 의한 피해가 컸다는 이야기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기존의 던전 브레이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몬스터가 나왔고, 그 종류 또한 다양했다.
그리고 샤벨 타이거.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강함을 가진 몬스터의 등장으로 인해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엄청난 수의 인명 피해와 함께 도시의 사분의 일에 해당하는 지역이 재산 피해를 입었다.
낙관적이던 사회의 분위기는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한편, 명지광은 이제 거리낌 없이 사회를 돌아다녔다.
이런 어수선한 때에 신고를 해 봐야 경찰이나 헌터 협회에서 적극적으로 나서기는 힘들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경일은 어떠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본격적으로 몬스터가 침공을 시작한 이상, 명지광과 부딪히면 도망가지 않고 힘을 드러내 싸울 확률이 높았다.
명지광은 자신보다 훨씬 강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