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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290화 (290/300)

[290화] 방법은 많아

아직 끝을 알 수 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덤비다간 애꿎은 생명만 잃을 뿐이었다.

“그래. 나도 이 정도로 너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어. 오히려 일 년이나 시간을 벌 수 있던 게 운이 좋은 거지.”

경일은 스스로를 합리화해 봤지만, 밀려드는 분노와 슬픔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도시의 재건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상처가 컸지만, 사람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도움을 주기 위해 직접 현장을 찾았고,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것이 몬스터의 침공에도 사회를 유지한 인간의 저력이리라.

사망자의 숫자는 집계가 되지 않았는데, 대부분이 몬스터에게 잡아먹힌 탓이었다.

사실상 실종을 사망으로 집계해야 했는데, 그런 잠정적 사망자만 수천 명에 달했다.

근래 일어난 최악의 참사였다.

경일은 마음이 착잡했다.

자신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단 걸 알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죄스러웠다.

“너무 그렇게 처지지 마. 이건 전쟁이야. 피해가 없는 전쟁은 없어. 앞으로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할 텐데, 매번 울상만 지을 거야? 마음 독하게 먹어.”

네로가 격려와 위로를 전했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쉽게 회복되기가 힘들었다.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지 한 달 뒤, 명지광은 뻔뻔스럽게도 직접 만나자는 연락을 해 왔다.

피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시외의 한적한 식당에서 만남을 가졌다.

식당에 도착한 경일은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제일 안쪽의 방으로 들어갔다.

명지광은 미리 와 있었다.

“이거 오래간만이야. 다시 얼굴을 보니 되게 반가운데?”

명지광은 웃음 가득한 얼굴로 경일을 환영했다.

반면, 경일의 얼굴은 한없이 굳어 있었다.

속으로 분노를 삼키며 명지광의 맞은편에 앉았다.

“일단 먹고 이야기하자고. 그동안 지구의 음식이 그리워서 말이야. 아, 네가 가진 던전에서 생산되는 재료들이 그렇게 맛있다며? 내 던전은 그렇지가 않거든. 아무래도 인류의 반대쪽에 있다 보니, 몸에 좋고 맛도 좋은 건 드물거든.”

“…….”

경일은 아무 말 없이 굳건히 앉아 있었다.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많은 음식이 차려지자, 명지광은 즐거운 듯이 모든 음식을 만끽했다.

“이 집은 음식을 참 잘한단 말이야. 내가 이래서 지금까지 인류를 지키고 있었던 거야. 이런 지구를 몬스터가 차지하면 맛있는 음식, 즐기는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지잖아. 그건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파.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명지광은 배가 부른지 수저를 내려놓고 입가를 닦았다.

“내가 사람이 좋아서 웬만하면 참는 성격인데 말이야, 솔직히 이번에는 매우 힘들었어. 내 힘에 타격을 입은 것도 아닌데, 취미 생활이 송두리째 날아간 건 마음이 정말 아프더란 말이지.”

일 년 전, 마지막 전화에서 느낀 분노를 곱씹는 듯, 명지광의 표정이 잠시 구겨졌다.

“그리고 내가 지구에 나타날 때마다 신고를 한 건 너무 하더군.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건 정말 참기 힘들었어. 그 경찰 놈들, 전부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사회적 체면이 있잖아? 그걸 신경 쓰지 않았으면… 크크크.”

때마침 후식이 들어오자, 명지광은 말을 멈추고 느긋하게 맛을 즐겼다.

마치 자신이 승리자가 된 듯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경일은 저 밉살스러운 얼굴에 주먹을 박아 버릴까 하는 충동이 일었다.

뭐, 분명 통하지 않겠지만.

다시 만난 명지광은 분명 이전과는 달랐다.

사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는 강한지, 약한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명지광의 실력을 가늠하기엔 경일, 자신의 실력이 너무 낮은 탓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명지광의 강함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요 일 년 간, 자신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확실히 느꼈지만 아직은 부족했다.

그러나 적이 없어진 스탄다비아는 엄청난 속도로 발전할 테니, 자신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이번 사태는 좀 안타까워. 나라고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지.”

명지광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의 눈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한 번 보여 줄 필요가 있겠더라고. 어때? 한번 겪어 보니. 뭐, 네가 다치지는 않았으니까 마음에 그리 와 닿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경일은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난 네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잖아? 던전의 숙명에 따라 처음 만났을 때 널 죽였으면,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테니까.”

명지광은 그렇게 말하고 찬찬히 경일을 살폈는데, 웃고 있던 얼굴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그는 놀란 모습을 숨기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음… 물론 지금도 불가능하겠지만, 그때의 넌 내게 개미 새끼 한 마리보다 못한 존재였으니까. 그만큼 내가 좋은 마음으로 너에게 다가갔다는 걸 알아 달라는 거지.”

“던전에서 혼자 살다 보니 많이 외로웠나 봐. 옛날보다 아주 수다스러워졌네. 쓸데없는 말은 치우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경일이 명지광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쯧쯧쯧… 사람이 말이야, 품위가 없구먼. 최소한 자신의 위치에 걸맞은 품위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지.”

명지광은 그런 경일을 한 번 타박하고는 말을 이었다.

“내 용건은 간단해. 지금이라도 내 손을 잡아. 난 앞으로 더 큰일을 일으킬 수도 있어. 그러니 내 성질을 더 이상 건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또 다시 이런 제안을 하는 건 네가 예뻐서가 아니라, 인류가 없어지는 게 싫어서야.”

“개소리하지 마. 내가 네 손을 잡으면 던전 브레이크가 사라져? 만약 정말 사라진다고 하면 내가 네놈의 발바닥을 핥으래도 핥지.”

“크하핫! 그건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 그래. 너나 나나 신들의 힘에 비교하면 하찮은 존재일 뿐이야. 대신, 시기는 늦출 수는 있어. 그리고 네가 있으니 가끔 힘을 터뜨려야 할 때 막을 수도 있을 거고. 또, 손을 잡으면 나도 나설 거야. 이번만 해도 샤벨 타이거 따윈 충분히 막고도 남았을 테지. 안 그래?”

명지광은 다시 한번 이번에 일어난 피해를 경일에게 상기시켰다.

가해자가 오히려 더 큰 소리치는 상황이었지만, 법을 초월한 극단적인 힘의 논리에 반박할 말이 없었다.

명지광이 하는 말은 명확했다.

자신은 던전의 힘을 바탕으로 예전처럼 사회에서 모든 걸 누리고 살 테니, 그런 생활을 최대한 길게 가져갈 수 있게끔 협조하라는 뜻이었다.

전 세계 인류의 목숨을 담보로 한 더러운 협박이었다.

그러나 예전처럼 무시할 수가 없었다.

경일은 이번 던전 브레이크의 피해를 겪고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스탄다비아에서 다양한 일을 겪으며 심장에 굳은살이 배긴 줄 알았지만, 아닌 듯했다.

아무리 그라도 수만 명의 죽음에서 초연해질 수는 없었다.

“…만약 내가 협조한다고 하면, 인류는 계속 생존할 수 있는 건가?”

“하하하, 내가 죽기 전까지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데? 그것만 해도 어디야. 난 적어도 50년은 더 살 생각이거든.”

경일의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고 생각했는지, 명지광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결국에는 몬스터의 세상이 온다는 이야기네.”

“이봐, 그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처음부터 답이 정해진 문제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사실 너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의 일이 아니라는 걸 알잖아.”

명지광의 말은 너무 아프게 다가왔다.

경일도 처음부터 이 싸움이 기울어진 운동장인 걸 알고 있었다.

그것도 극복하기 불가능할 정도의.

지금까지 그 사실을 외면하며 최선을 다해 노력해 봤지만, 명지광이 마음먹고 본격적으로 드러낸 힘에 모든 준비는 허무하리만큼 쉽게 무너졌다.

“아무리 인류가 똘똘 뭉쳐서 대적해도 원래 전쟁은 공격하는 쪽이 훨씬 더 유리할 수밖에 없잖아. 그리고 공격하는 쪽이 월등히 뛰어나기도 하고 말이야. 너도 알다시피 차원을 통과할 때의 핸디캡도 없어졌고, 이제는 차원의 통로를 늘리는 작업을 진행 중이니까 더 많은 몬스터가 밀려오겠지. 이번에 네가 던전에서 겪은 일은 맛보기일 뿐이야. 나중에는 모든 던전이 그렇게 되겠지.”

절로 탄식이 나오는 이야기였다.

온전한 힘을 가고 넘어오는 몬스터가 지금보다 더 많아지면 과연 제때 막아 낼 수 있을까?

게다가 샤벨 타이거처럼 지구에 나타나지 않은 강한 몬스터들의 존재 역시 경일의 고개가 점차 내려가는 이유가 되었다.

“물론 던전의 주인인 네 입장에서는 안타까울 수도 있어. 하지만 애초에 인류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내가 미뤄 온 거나 마찬가지였지. 이것 하나는 너도 부인할 수 없을 걸? 내가 암던의 명령에 충실히 따랐다면, 이미 수십 년 전에 지구… 아니, 인류는 멸망했어.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부모를 죽인 원수처럼 싸우고 미워할 필요가 없다고. 안 그래?”

“…그럼 아이들은?”

명지광의 말에 경일이 조용히 속삭였다.

“뭐라고? 안 들리잖아. 크게 말해.”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응? 무슨 아이들?”

명지광은 맥락과 상관없는 질문에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이 반문했다.

“앞으로 태어나고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 말이다. 이 새끼야!”

경일이 발작하듯 소리를 지르며 상을 뒤집어엎었다.

그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었다.

헌터로서 활동을 하던 때도, 그리고 지금도 당장 분식점으로 달려가 아이들의 간식을 챙겨 주고 같이 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 아이들의 미래를 없애 버리겠다는 말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명지광의 새하얀 셔츠가 각종 반찬이 튀어 얼룩덜룩해졌다.

“이런 미친 새끼가!”

셔츠에서 풍기는 각종 반찬 냄새에 명지광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넌 말로 해서는 안 될 놈이구나. 그나마 같은 던전의 주인이라 좋을 말로 하려 했더니… 내 마지막 제안까지 거절했으니, 이번에는 더 큰 일이 일어날 거야.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겠지. 과연 네가 어디까지 막을 수 있을까? 이 빌어먹을 세상, 내가 모두 없애 주지!”

“하!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봐, 당장 해 보라고! 아마 못 할 걸? 이번에 꽤 힘을 쓴 모양이네. 일 년 전과 비교했을 때 한 오 년은 늙어 보이는 것 같은 얼굴을 보니까 말이야. 화장한다고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나? 그리고 네 말대로 우리가 던전의 주인이라고 하지만, 신의 힘에 비하면 하찮은 존재일지도 모르지. 그런데 넌 마치 지구의 신처럼 행동하는군? 하찮은 먼지 주제에!”

경일은 이번 같은 함정을 파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힘을 써야 하는지 네로에게 들었다.

명지광이 일 년간 아무리 열심히 활동했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사이클롭스를 불러오기 위해 암던의 주인으로 모은 힘을 전부 소진한 상태가 아니었는가.

분명 무언가 대가를 내놓았을 것이라 추측했다.

명지광의 얼굴을 보니, 수명을 사용했다고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어디 한번 해 봐. 나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 지금의 희생이 자라나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걸 알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난 꿋꿋이 몬스터를 막을 거니까!”

“이이이이이익…….”

얼마나 화가 났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의 명지광이 삿대질하며 외쳤다.

“좋아. 나도 최선을 다해 주지! 이왕 이렇게 된 거, 미루고 있던 계획도 전부 실행해야겠군. 크크크, 조만간 아주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거다! 내가 굳이 던전의 힘을 쓰지 않아도 네 행동을 제어할 수단은 많다는 사실을 알려 주마!”

명지광의 차가워진 얼굴은 북극의 빙하 같았고, 호기롭게 외친 경일조차 흠칫할 정도로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반찬으로 더러워진 셔츠를 한 번 보더니, 이대로 밖으로 나가기 곤란하다고 생각했는지 게이트를 열고 곧바로 사라져 버렸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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