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291화 (291/300)

[291화] 폭로

명지광의 말뜻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경일이 대한민국을 넘어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제길.”

밀려드는 기자에 둘러싸인 경일은 저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대한민국의 모든 기자뿐만 아니라, 해외 유명 매체의 기자들까지 하이에나처럼 그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원래도 그를 따라다니는 이들은 많았으나, 지금은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김경일 씨!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항간에 퍼진 소문이 사실인가요?”

“명지광 회장의 인터뷰는 보셨습니까? 아직까지 아무런 대응이 없는 건 무슨 이유에선가요? 소문을 인정한다는 말씀입니까?”

경일이 처음 등장했을 때, 대중들은 열광한 만큼 그에게 궁금해하는 점도 많았다.

그들이 느끼기에 경일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헌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헌터 협회에 등록이 되어 있긴 했지만, 그가 던전에 들어갔다고 확인된 것은 단 한 번.

무등급 거대 던전 때 뿐이었다.

그런 헌터가 홀로 사이클롭스와 싸워 이길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궁금해하는 건 당연했다.

더군다나 그가 지금까지 해 온 일이 너무 대단해서 해성 그룹의 발표를 듣고, 보도 자료를 읽은 후에도 한 사람의 업적이라고는 믿기 힘들었을 정도였다.

결정적으로 마나 연공법의 보급이 의문에 기름을 부었지만, 경일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세계의 진실을 말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현재 가장 공신력이 높은 자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면, 사회에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건 자명한 일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던전 뿐만이 아니라, 또 다른 이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거부감을 품는 사람들도 많아질 것이다.

그래서 보도 자료 이외의 공식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던 건데…….

갑자기 명지광이 경일에 대한 은밀한 소문을 하나 퍼뜨린 것이다.

경일이 던전을 완전히 없애 버리려 한다고.

처음에는 별것 아닌 헛소문으로 끝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던전 폐쇄에 열정적이었던 모습 때문인지 의외로 소문은 끈질겼다.

그 와중에 명지광이 직접 등장해 기자와 진행한 인터뷰가 공개되며, 상황이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렸다.

수배되는 처지에 놓이며 삼원 그룹의 회장이 대한민국의 진짜 실세였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던 터라, 폭발적인 관심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회장님이 던전을 지키고 있고, 해성 길드장이 던전을 없애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는 말씀인 거죠?”

“네, 그렇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밝히기 곤란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해성 길드장이 지구에서 던전을 없애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그에게 직접 물어 보시지요.”

던전이 나타난 지도 20년이 넘었고, 그동안 산업의 많은 부분이 던전의 자원으로 대체되었다.

하나만 예를 들자면, 현재 대한민국에서 생산되는 전기의 90퍼센트는 몬스터를 죽이고 나오는 마나석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제 마나석은 인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에너지 자원이었고, 마찬가지로 던전의 자원이 없는 사회도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뿐인가? 던전에서 발견되는 신물질로 의학, 화학을 발전시켜 왔는데, 갑자기 던전이 사라진다면 그만큼 인류의 문명이 몇십 년 퇴보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전 국민의 시선이 경일에게 쏠렸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해 줄 수 없었다.

던전병 치료제, 삼원 그룹 제품 부작용 치료제, 거기다 마나 연공법까지.

이미 자신의 행적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무턱대고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명지광의 말이 사실이라고 인정하면 더 큰 문제가 생기리라.

그러나 침묵하는 경일을 보며 사람들은 인터뷰가 사실이라고 받아들였고, 곧 두 패로 갈려 싸우기 시작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경일을 지지했지만, 헌터들과 기득권 세력은 배척했다.

던전이 없어지면 자신들의 권력이 모두 사라질 텐데, 당연히 그들의 반항도 격렬할 수밖에 없었다.

영웅으로 추앙하던 때는 이미 잊어버린 지, 경일을 흠집 내기 시작했고, 해성 그룹 역시 전 방위적인 공격을 받았다.

온갖 가짜 뉴스가 난립하고, 대부분의 헌터들은 경일을 외면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일은 자취를 감췄다.

누구도 그를 본 사람이 없었다.

* * *

한번 불이 붙은 스탄다비아는 그 세를 빠르게 불려 나갔다.

강 건너에 새로 만든 도시가 기존 선조의 땅보다 더 커졌으며, 인구의 유입은 끝이 없었다.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일자리도 넘쳐 나고, 일한 만큼 벌 수 있으니 각지의 사람들이 모이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마나 연공법까지 익힐 수 있으니, 용병은 물론이고 검에 뜻을 가진 이들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몰려들었다.

스탄다비아를 한 번 경험한 사람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곳으로 가족을 불러와 새로운 둥지를 꾸몄다.

워낙 많은 사람이 들어와 본토박이니, 이주민이니 이런 경계가 없어진 지도 오래였다.

그 이야기는 텃세가 없어 적응하기 한결 편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뭐, 매일 새로운 땅이 생겨나니 ‘본토’라는 개념이 생길지도 의문이었다.

몬스터에게 밀려 땅을 잃기만 했던 이 세계에서 스탄다비아가 최초로 침공에 성공한 것이다.

몬스터 숲을 점령함으로써 땅은 매일같이 넓어졌다.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르아스 왕국보다 더 커질 터였다.

물론 스탄다비아가 점령한 몬스터 숲이 아무리 비옥한 토지가 많고 일거리가 많아도 위험하다면 사람들이 외면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포리자와 스탄다비아 군대의 강력한 힘을 믿고 망설임 없이 이주를 결정했다.

베르아스 왕국 사상 최연소 그랜드 소드마스터 자포리자.

게다가 그의 충실한 기사 칼튼 역시 소드마스터에 올라 뒤를 쫓고 있었으니까.

또한 기사단 역시 꾸준한 실력 향상을 통해 베르아스 왕국에서 가장 강한 무력 집단으로 거듭났고, 그 수 역시 300명이 넘었다.

심지어 일반 병사들 역시 마나 연공법을 꾸준히 수련해 왔기에 체내에 많은 마나를 보유하고 있어, 다른 영지의 병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불안감을 희석시키는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주요 군사 지역마다 세워진 방벽이었다.

시멘트와 벽돌, 돌덩이를 섞어 만든 방벽은 대륙 역사상 그 어떤 성벽보다도 튼튼했고, 웅장하기까지 했다.

방벽을 처음 본 사람들은 누구나 감탄을 금치 못했고, 어떤 몬스터도 이곳을 통과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자포리자는 스탄다비아의 행정에 관한 부분에서 모두 손을 뗐다.

몬스터와 치르는 전투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가 행정까지 돌볼 시간은 없었다.

자포리자가 빠졌지만, 스탄다비아는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갔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배운 지식을 하나도 빠짐없이 가신들에게 전수했고, 그들은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모든 것을 배워 나갔다.

카스만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정열적으로 공부했고, 현재 스탄다비아의 행정을 모두 책임지고 있었다.

후방을 안정시킨 자포리자와 그의 군대는 오늘도 몬스터 숲을 침공한 뒤, 몰려드는 몬스터와 전투 중이었다.

평소라면 가장 앞서서 싸우는 이가 자포리자였을 텐데, 언젠가부터 그의 바로 옆에서 함께 검을 휘두르는 인물이 나타났다.

경일이었다.

“선인님, 역시 대단하십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선인님의 실력은 도저히 쫓아가기가 힘드네요.”

자포리자의 롱소드가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몬스터 두세 마리의 몸이 잘려 나갔다.

몬스터의 숲 한가운데에서 피가 튀는 전투를 치르는 와중에도 그의 목소리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듯 편안했다.

“이게 다 영주님 덕분입니다. 영주님이 잘해 주시는 만큼 강해지니까요.”

“그런가요? 그래도 검을 다루는 솜씨는 노력이 없으면 발전할 수 없지 않습니까? 처음 선인님과 연무장에서 대결할 때와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입니다.”

“하하하, 그것도 모두 영주님 덕이지요. 영주님이 그렇게 성심성의껏 지도해 주는데, 실력이 안 늘고 배기겠습니까?”

경일의 창이 크게 원을 그렸다.

창끝을 뚫고 나온 오러가 순식간에 공간을 지배했고, 그 안에 있던 모든 몬스터의 몸통이 잘려져 나갔다.

“…요즘 몬스터가 더 늘은 듯합니다.”

자포리자의 말 대로였다.

보통 몬스터는 한곳에 터를 잡고 서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만큼, 한 지역에 서식하는 몬스터의 수는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최근 덤벼 오는 몬스터의 숫자는 예전과 달리 확연히 늘어난 상태였다.

“아마 벨크스가 우리의 존재를 눈치챈 듯합니다.”

벨크스는 이 세계에서 몬스터를 육성해 지구로 보내는 존재였다.

경일이 자포리자와 이어졌듯이 명지광과 이어진 존재로, 경일에게 우쭐대며 자랑 삼아 자세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경일이 명지광과의 싸움을 포기하고 스탄다비아로 넘어오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엄밀히 말해서 그는 명지광과 떠도는 소문을 피해 이곳으로 온 게 아니었다.

아무리 기득권이 압박을 준다고 해도, 충분히 견디고 이겨 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지구에서 노력을 하더라도 명지광, 그를 잡아내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명지광은 공격자였고, 자신은 방어자였다.

이 구도는 무척이나 불리했다.

넓은 대한민국에서 명지광이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 알 수 없는 이상, 피해는 계속 쌓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자신은 명지광의 공격을 막다 지쳐 갈 게 뻔했다.

그리고 명지광 개인의 힘 역시 지구를 파괴하며 점점 강해질 테니, 경일과의 싸움에서도 우위에 설 테니까.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이 사라짐으로서 명지광의 공격이 줄어들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인류의 파멸을 원하지 않는 그로서는, 경일이 사라지면 이전처럼 던전과의 유대가 끊어지지 않는 선에서만 활동할 게 뻔했다.

그런 이유로 경일은 스탄다비아에 모든 것을 집중하기로 했다.

이곳에서는 자신이 방어자가 아닌 공격자가 될 수 있었다.

명지광과의 싸움보다 훨씬 힘들게 분명하지만, 대신 모든 일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 회심의 한 수 이기도 했다.

만약 벨크스를 처리한다면, 명지광도 함께 몰락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스탄다비아가 커지고 몬스터의 숫자가 줄어드니, 이제 슬슬 신경이 쓰이나 봅니다.”

“이제 진정한 시작이겠군요.”

자포리자는 전혀 두렵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벨크스라는 존재가 아마 신에 가까울 것임을 알고도, 그는 오히려 흥미롭다는 태도를 보였다.

싸우기도 전에 미리 겁을 먹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스탄다비아의 군대가 스쳐 간 곳에는 몬스터의 시체와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리고 새로 점령한 땅에는 몬스터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벽이 설치되었다.

경일이 이곳에 온 지 벌써 6개월이 넘었지만, 지구에서의 지원은 계속되었다.

이 모든 게 그를 믿어 주는 사람들의 힘이었다.

우해수는 벽돌과 시멘트 등 필요한 물자를 계속 보내 주었고, 이길호는 경일이 없는 던전을 관리했다.

선호연과 손주아는 경일이 고향과도 같은 언젠가는 돌아갈 분식점을 지키고 있었으며, 손윤찬은 계속해서 뛰어난 효능의 포션을 개발했다.

지구는 경일이 없어도 잘 돌아갔다.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사람들은 곧 그의 부재를 받아들였고, 예전처럼 어찌어찌 던전을 폐쇄해 나가고 있었다.

점차 게이트가 늘어나고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위험한 던전이 한 번씩 열려 막대한 피해를 입은 적도 있지만, 아직은 잘 막아 내고 있는 편이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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