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명지광이 던진 화두는 식지 않았다.
사람들은 반반으로 갈라져 많은 토론을 거쳤지만, 단 한 번도 명쾌한 답에 도달한 적은 없었다.
아마 지금보다 몬스터의 위협이 더 커지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받지 않는 이상, 절대 답을 낼 수 없으리라.
그러나 답을 내게 될 때는, 이미 인류의 패배가 확정되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경일은 스탄다비아가 편했다.
여기서는 그 누구도 몬스터의 존재를 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몬스터를 잡는 만큼 사람들의 존중과 대접을 받았다.
“네로 님, 만약 벨크스를 잡는데 성공한다면 어떻게 되나요?”
“응? 어떻게 되냐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 그러니까… 지금처럼 스탄다비아와 연결이 계속 이어지겠죠?”
“아니, 네가 이곳과 이어진 건 아주 특별한 경우야. 애초에 우주의 섭리에 어긋나는 일이지. 신의 입장에서도 무리란 걸 알면서 어쩔 수 없이 연결한 거거든. 내가 이기든 상대가 이기든, 결정이 나면 모든 연결은 끊어질 거야.”
“알겠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이곳의 삶이 좋았다.
만약 계속해서 연결된다면 지구에서처럼 이곳에서 분식점을 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이곳의 아이들과도 우정을 쌓고 싶은 소박한 꿈도 꾸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라니 어쩔 수 없었다.
있는 동안 더 열심히 살아가는 수밖에.
* * *
시간은 정말 총알같이 지나갔다.
경일이 이곳에 온 지 벌써 10년의 세월이 흘렀고, 지구는 일 년 하고도 몇 개월의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 자포리자는 나이를 먹어 50살이 되었다.
지구의 시간에 따라 나이를 먹는 경일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젊은 모습이었다.
늙지 않는 모습에 사람들은 경일을 신기해하면서도 더욱 신성시했다.
10년간 많은 일이 일어났다.
가장 큰 사건은 바로 베르아스 왕국의 침입이었다.
베르아스의 왕권을 잡은 건 바로 2왕자였다.
그가 왕권을 차지함으로써 한차례 정적들의 숙청아 있었고, 그 후로 정계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 갔다.
하지만 워낙 긴 세월 동안 민생을 제쳐 두고 오로지 왕권을 가지기 위해 싸운 탓에 나라가 엉망이었다.
국왕이 된 2왕자는 오랜 시간 노력해 민생을 재건하기보다, 단 하나의 방법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바로 스탄다비아 정복이었다.
침공에 앞서 새 국왕은 스탄다비아에 사절단을 보내 자신의 밑으로 들어올 것을 강요했다.
당연히 자포리자는 일언지하에 그 요구를 거절했고, 전쟁이 벌어졌다.
국왕은 스탄다비아만 잡을 수 있다면, 베르아스 왕국은 제2의 도약이 가능할 거라고 여겼다.
20만 대군의 침공.
스탄다비아는 종교 연합군과 싸웠던 장소 그대로 적을 맞이했다.
결과는 베르아스 왕국의 처참한 패배.
스탄다비아는 철옹성이었다.
병력의 질도 차이가 컸고, 거대한 방벽은 무슨 짓을 해도 뚫리지 않았다.
그 옛날, 종교 연합군이 패배의 쓴잔을 마셨던 곳에서 베르아스 왕국 역시 같은 꼴을 당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스탄다비아로 유입되는 인구가 다시 한번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자포리자가 국왕에게 요구한 것은 단 하나, 사람이었다.
그는 스탄다비아로 이주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막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베르아스 왕국의 폭정에 지친 백성들이 끊임없이 스탄다비아로 몰려들었다.
원치 않은 전쟁이지만, 승리의 열매는 달콤했다.
얼마 후, 스탄다비아의 인구는 무려 두 배나 늘어났다.
비옥한 땅과 집, 정착금까지 지급되자 이주민들은 스탄다비아에 뼈를 묻을 것을 맹세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이주민들은 베르아스 왕국에서 가장 못살던 하층민인 만큼, 집과 땅을 지급받자 상상을 초월하는 기쁨을 느꼈다.
심지어 무거운 세금까지 사라지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같은 양의 노동으로도 몇 배의 농작물을 수확할 수 있으니, 이주민들은 자포리자를 찬양하고 스탄다비아를 사랑했다.
그들에겐 이곳이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자포리자는 오래전, 스탄다비아의 독립을 선언했으나 대외적으로 공표하지는 않았었다.
당장 처리해야 할 과제가 밀려 있는데, 독립 선포 같은 중요치 않은 일 따위 뒤로 밀리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이번 전쟁의 승리 덕분에 이제는 주변국에서 알아서 하나의 왕국으로 대접했다.
여러 나라에서 축하 사절단을 파견했고 친교를 맺길 원했다.
* * *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자포리자의 두 눈에 굳은 결기가 보였다.
“이제야 진짜 시작이군요.”
경일이 그런 자포리자에게 화답했다.
드디어 몬스터 숲의 중심에 있는 이 모든 일의 원흉, 벨크스를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10년간 경일과 자포리자는 하루도 쉬지 않고 몬스터와 싸워 왔고, 수련을 거르지 않았다.
덕분에 이들은 검의 끝을 보고 있었다.
다음 날, 경일과 자포리자, 그리고 그의 기사단이 은밀히 몬스터 숲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마지막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처음 한 달간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아직 중심부까지 거리가 있는 만큼, 만나는 몬스터들이 그리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달이 지나자, 이제야 싸워 볼 만한 몬스터들이 등장했다.
경일의 검은 날카로웠고, 자포리자의 검은 힘이 넘쳤다.
이들은 거침없이 몬스터를 베어 나갔다.
다치는 기사들이 한두 명씩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죽음을 각오하고 오른 길, 후퇴는 있을 수 없었다.
다행히 개량된 힐링 포션이 큰 힘을 발휘했다.
경일은 기사들에게 더 좋은 음식을 제공해 조금이나마 이들의 수고를 치하했다.
그리고 또 한 달이 흘렀다.
몬스터 숲에서 두 달이나 구른 것치고는 이들의 행색은 깔끔했다.
모든 게 인벤토리의 힘이었다.
하지만 어딘가가 허전해 보였다.
이들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 있었다.
아무리 이들이 강해도, 차츰 강해지는 몬스터와의 전투에서 희생 없이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동료의 죽음에 힘이 빠질 만했지만, 이들의 눈은 여전히 매우 단단했다.
“우리의 손에 모든 이의 미래가 달렸다. 지금의 희생으로 우리의 아이들은 안전한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처음부터 살아갈 생각 따위는 없었습니다. 우리의 싸움이 얼마나 고귀한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대단한 싸움에 저희를 끼워 주셔서 영광입니다.”
경일은 이들의 의기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몬스터 숲에 깊이 들어갈수록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경일은 누구보다 빠르게 몬스터를 향해 달려 나갔지만, 기사들의 희생은 막을 수가 없었다.
기사들의 죽음은 가슴 아팠다.
자신은 이들의 희생으로 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날이 갈수록 경일은 침울해졌다.
오히려 기사들이 웃는 얼굴로 경일을 달래 주었다.
“선인님을 만나고 나서 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하루 한 끼 먹기도 힘든 삶, 제 손으로 죽지 못해 오로지 죽음만을 기다리는 삶이었지요. 아무리 노력해도 자식의 입에 쌀 한 톨 넣어 줄 수 없는 제 모습이 너무나 싫었습니다. 하지만… 선인님이 나타나고 나서 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힘들게 살아왔던 인생을 모두 보상받았습니다. 당장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입니다.”
경일은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이미 자신도 모르는 새 눈물 한 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오히려 지금은 그때 죽지 않고 꿋꿋하게 버틴 자신을 칭찬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싸움을 치를 수 있게 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별것 아닌 무지렁이에 불과한 저를 여기까지 데리고 와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제 인생이 자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이곳의 모인 모든 기사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기사의 온몸은 상처투성이였다.
하지만 그의 눈은 하늘의 별처럼 반짝였고, 미소 짓는 얼굴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늘 앞에서 싸우던 경일이 침울해하는 게 신기했는지, 또 다른 기사가 눈물을 흘리는 눈을 보며 말했다.
“선인님, 절 보십시오. 전 누구나 부러워하는 스탄다비아의 자랑스런 기사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제가 살면서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기사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 싸움에 참여했다는 사실 자체로 누구보다 거대한 명예를 얻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그 누구보다 행복합니다. 그러니 선인님이 미안해하실 건 하나도 없습니다. 제 자식 놈도 이 여정에 참여하는 제가 자랑스럽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이 모든 것은 선인님의 은혜입니다. 제 자식에게 대대손손 잊지 말 것을 단단히 일러두었습니다. 이런 명예로운 싸움에 저를 택해 주신 것, 정말이지 감사드립니다.”
기사가 단단히 쥔 주먹을 가슴에 대며 경례했다.
이 중에서 자신이 가장 강했지만, 오히려 가장 큰 위로를 받고 있었다.
지구에서 자란 자신이 응석받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 뒤로 경일은 더욱 단단해졌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몬스터를 상대했고, 기사들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몬스터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이제는 제대로 먹기는커녕 잘 시간까지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앙!”
엄청난 포효였다.
소머리에 거대한 몸집을 가진 미노타우르스의 등장이었다.
7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키 때문에 고개를 젖혀 올려다봐야 할 정도였다.
콰앙!
미노타우르스의 공격 한 번에 땅바닥에 큰 구멍이 생겼다.
미처 피하지 못한 기사 한 명의 시체가 완전히 짓눌린 게 보였다.
그 모습에 경일은 가슴이 미어졌다.
슬픔은 곧 분노로 바뀌었고, 가슴속이 터질 듯한 화산처럼 끓어올랐다.
경일이 미노타우르스를 향해 뛰어갔지만, 놈은 영악했다.
이 무리에서 가장 강해 보이는 그를 먼저 상대하려 하지 않은 것이다.
거대한 덩치에 비해 상당히 빠른 미노타우르스는 경일과 자포리자를 요리조리 피하며 기사들을 노렸다.
그러나 기사들 역시 단 한 번의 공격에 동료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죽어 나갔음에도 가슴으로 슬픔을 삼키고 맞서 싸웠다.
그 누구도 물러서지 않고 미노타우르스를 향해 덤벼들었다.
“이 개새끼야!”
경일이 참지 못하고 미노타우르스에 욕을 내뱉으며 달려 나갔다.
그 옆에는 분노에 가득 찬 자포리자도 함께였다.
미노타우르스는 더 이상 이들을 피하는 게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거대한 몽둥이를 치켜올린 뒤, 곧바로 내려쳤다.
경일과 자포리자는 약속이나 한 듯 서로 반대 방향으로 뛰어 몽둥이를 피했다.
위력은 대단했지만, 맞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경일이 먼저 미노타우르스의 다리에 도착했다.
미노타우르스가 그런 경일을 향해 발을 들어 올리고는 곧바로 밟았다.
쿵!
흙바닥이 파이며 미노타우르스의 발자국이 그대로 찍혔다.
그리고 터져 나온 비명.
“크아아아앙!”
미노타우르스의 발등을 뚫고 나온 창이 보였다.
경일이 놈이 땅을 밟기 직전, 재빨리 창을 소환한 것이다.
하지만 워낙 발이 크고 두꺼워 발등을 뚫고 나온 창이 이쑤시개처럼 보일 정도였다.
미노타우르스의 신경이 모두 경일에게 쏠렸을 때, 자포리자의 공격이 시작됐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