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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293화 (293/300)

[293화] 콜라

피잇!

빠르게 휘둘러진 롱소드가 미노타우르스의 발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두꺼운 가죽에 가느다란 실선이 생기더니 새빨간 피가 맺혔다.

“크어헝~”

미노타우르스의 비명이 숲을 뒤흔들었다.

단전에서 뻗어 나온 마나가 전신을 돌며 경일과 자포리자에게 더욱 강한 힘을 주었다.

두 사람은 마나의 의지에 반응하듯 강한 공격을 이어 나갔다.

두 다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미노타우르스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제자리에서 껑충껑충 뛰었지만, 날개가 달리지 않은 이상 피할 수는 없는 법.

놈의 다리에 상처가 늘어 갔다.

발목의 가죽이 너덜거리고, 점점 살이 벌어져 새하얀 뼈가 보일 무렵.

미노타우르스가 더 이상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무릎 꿇었다.

그 순간, 수십 개의 창이 날아오더니, 그중 하나가 정확하게 놈의 입속에 박혔다.

“케에엑!”

미노타우르스는 가시가 목에 걸린 듯이 고통스럽게 컥컥거렸다.

동료를 잃은 기사들이 복수하기 위해 창을 던진 것이다.

공격이 성공하자, 수십 개의 창이 다시 한번 미노타우르스의 얼굴을 적극적으로 노렸다.

지금까지의 싸움을 보면, 그랜드 소드마스터가 아니고서야 제대로 된 충격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단 한 군데, 눈만은 달랐다.

부드러운 살점인 입속이 관통됐듯이 여러 개의 창이 놈의 눈동자에 박혔다.

“캬아아아악!”

처음의 기세등등한 모습과 달리 미노타우르스는 온몸의 근육이 풀어져 어깨가 축 처진 상태였다.

당연히 동정하는 이는 없었다.

앞이 보이지 않자, 미노타우르스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발작하며 사방으로 몽둥이를 휘둘렀다.

퍼억! 쿵!

묵직한 몽둥이에 맞은 나무가 부서지며 쓰러졌다.

7미터에 달하는 놈의 몸집에 걸맞게 워낙 몽둥이가 크다 보니, 아무렇게나 휘둘러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땅바닥을 맞고 튄 돌조각이 비산했는데, 하필이면 한 기사의 눈에 맞았다.

그가 본능적으로 눈을 감은 순간, 미노타우르스의 몽둥이가 덮쳤다.

“으아아아악!”

미노타우르스는 비명소리를 듣고 더욱 힘차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운 없는 기사는 배트에 맞은 야구공처럼 날아가 나무에 처박혔다.

즉사였다.

방금 전까지 생기로 가득찬 눈동자는 탁한 빛만이 남아 있었다.

시신의 상태조차 온전하지 못했다.

“죽어! 이 새끼가!”

기사의 죽음에 눈이 뒤집힌 경일이 미노타우르스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시각을 잃고 예민해진 놈은 경일을 향해 정확히 몽둥이를 휘둘렀다.

위잉!

경일의 귀 옆으로 섬뜩한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그의 의기를 꺾을 수 없었다.

쾅! 쾅! 쾅!

미노타우르스는 점점 커지는 발소리에 쉬지 않고 몽둥이를 내리찍었다.

대부분의 공격은 빗나갔지만, 그중 한두 개는 정확하게 경일을 노리고 날아왔다.

“이익.”

오른발로 강하게 땅을 박차며 달려가는 방향을 틀었다.

뒤이어 조금 전까지 그가 있던 곳에 몽둥이가 쏟아졌다.

경일은 떨어지는 폭격을 뚫고 드디어 미노타우르스에게 도착했다.

그는 달려 나가던 힘으로 위를 향해 뛰어올랐다.

그러고 나서 미노타우르스의 무릎을 밟고 하늘로 날았다.

순간, 인벤토리에서 창날만 2미터가 되어 보이는 거대한 창이 나타났고, 마나를 잔뜩 품은 창날이 거침없이 휘둘러졌다.

“이야아압!”

경일의 피 끓는 기합과 함께 그의 몸을 뒤덮은 마나가 폭발했다.

파란 불꽃이 그의 몸을 뒤덮고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 강렬한 불꽃과 연결된 창날이 미노타우르스의 목을 파고들었다.

미노타우르스를 보호해 주던 단단하고 질긴 가죽은 창의 기세를 이기지 못했다.

거침없이 가죽을 베고 들어가 근육과 두꺼운 혈관을 지나 목뼈에 닿았다.

약간의 저항력이 느껴졌지만, 경일의 모든 힘이 실린 창날은 그 정도쯤은 가볍게 자르고도 남았다.

그 순간, 미노타우르스의 거대한 머리가 갸우뚱거리더니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놈은 목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급하게 손을 휘저었지만, 이미 늦었다.

미노타우르스의 거체도 굉음을 내며 쓰러졌다.

경일은 잠시 피 분수를 맞으며 눈을 감고 이번에 죽은 기사들을 추모했다.

쿠웅!

싸움이 끝나자, 기사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번 전투에서 너무나 허무하게 여러 명의 동료를 잃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몬스터는 동료의 시신을 수습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미노타우르스가 쓰러지자, 오크들이 떼로 달려들었다.

평소라면 오크들은 이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미노타우르스와 싸우느라 심신이 많이 지친 상태.

“모두 힘을 내라, 물러서지 마라!”

슬픔에 빠져 있던 기사들은 여전히 굳건한 자포리자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린 뒤, 오크를 향해 각자의 무기를 휘둘렀다.

서걱! 서걱!

기사들의 무기가 거침없이 오크의 몸을 베어 냈다.

하지만 오크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이들이 오크를 죽이는 속도보다 숲의 여기저기서 새롭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더 빨랐다.

캬아아아아악!

마치 약에 취한 듯, 오크의 시뻘건 눈동자는 오로지 한 가지만을 노리고 있었다.

“이것들이 왜 이래? 이거 정말 내가 알던 오크가 맞아?”

기사의 목소리에는 당황과 답답함이 녹아 있었다.

오크는 마치 밀려드는 파도처럼 끊임없이 이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전투 중간 중간 체력 포션을 먹었지만, 그 한계를 뛰어넘는 물량이 아닐 수 없었다.

몇 시간째 오크들을 베고 있자니 마음이 몹시 질려 갔다.

서서히 오크의 끈질김에 마음이 짓눌릴 때쯤, 자포리자의 응원이 터져 나왔다.

“모두 힘을 내라! 우리는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고 이곳에 서 있는 용사들이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정신이 무너지지 않으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자포리자의 말에 힘을 얻은 기사들은 마음속에 스며드는 두려움을 모두 떨쳐 버렸다.

그들은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오크 떼에게 기죽지 않고 놈들을 착실하게 베어 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크는 너무 많았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숫자의 오크가 존재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기사들은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둥근 진을 짜고 오크를 막았다.

그 모습이 마치 바다에 포위된 위태로운 섬의 형태와 비슷하게 보였다.

기사들은 지치거나 다친 동료들은 진형의 안쪽으로 밀어 넣어 휴식을 주었다.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침착성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큰 노력을 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경일과 자포리자는 원진 바깥으로 나와 오크를 막으며 기사들에게 조금이라도 휴식을 주려 했다.

두 사람은 시계 방향으로 돌며 밀려드는 파도를 온몸으로 막아 냈다.

향기롭던 숲의 공기는 오크의 피비린내에 덮인 지 오래였고, 바닥까지 늪처럼 질퍽거릴 정도였다.

싸우는 환경까지 최악으로 치닫자, 기사들의 체력 소모는 더욱 커졌다.

“취이이익!”

“꾸이이익!”

“케흐르르륵!”

지쳐 가는 기사들을 보며 오크들이 힘차게 울부짖었다.

“죽어!”

경일의 거대한 창이 대지를 갈랐다.

미노타우르스의 목을 벤, 창날만 2미터에 육박하는 창이 휘둘러지자, 긴 낫으로 풀을 베듯 오크들의 허리가 잘려 나갔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오크의 수를 줄여야만 기사들이 안전해질 수 있었다.

쉬지 않고 거대한 창을 휘두르자, 어느 순간부터 팔이 떨려 왔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공격을 멈출 수는 없었다.

자신보다 가진 마나가 적은 기사들이 백 배… 아니, 천 배는 더 힘듦을 알기에.

자포리자 역시 경일과 같은 마음가짐이었다.

그의 롱소드는 한 마리의 오크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빠르게 휘둘러졌다.

서걱! 서걱!

죽음으로 가득한 숲에서는 오크가 생명이 사라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기사의 희생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아아아아악!”

기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전장을 꿰뚫었다.

뇌리에 깊게 스며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목소리는,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아도 상황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오크의 녹슨 칼이 기어이 기사의 배를 뚫고 들어가고야 말았다.

잽싸게 동료들이 원진 안으로 밀어 넣어 힐링 포션을 먹여 봤지만,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피와 내장 조각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

“안 돼, 스티븐! 힘들더라도 힐링 포션을 삼켜!”

동료의 안타까운 목소리를 뒤로 하고 스티븐의 목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제기랄!”

기사의 안타까운 목소리에 오크를 상대하고 있던 기사들도 스티븐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죽어가는 동료의 손을 잡아 주지도, 눈길도 줄 수 없는 이 상황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기사들은 그 울분을 담아 더욱더 거세게 오크를 베었다.

시작이 있으면 끝 또한 있는 법.

평생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오크와의 전투도 결국에는 끝이 났다.

무려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싸운 것이다.

이들은 수만 마리의 오크를 죽였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오크와의 전투가 끝이 나고는 더 이상의 몬스터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들이 단시간에 너무 많은 수의 몬스터를 죽여 버려 공백이 찾아온 것이었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작은 평화였다.

기사들은 가장 먼저 이번 싸움에 희생된 기사들의 장례를 지냈다.

그나마 오크에게 당한 기사들은 나은 편이었다.

미노타우르스에 당한 기사들은 제대로 된 시신조차 남기지 못했다.

언제 또 몬스터의 공격이 있을지 몰라 약식으로 진행된 장례지만, 그들의 표정은 더없이 경건했다.

죽은 기사가 가여워서, 그를 추모하는 기사들이 안타까워서, 경일은 마음 한편이 짜르르하게 아파져 오고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다음 생에는 몬스터가 없는 스탄다비아의 영지민으로 태어나 행복을 누리시길.’

경일은 용감하게 싸운 그들을 위해 진심을 담아 추모했다.

장례가 끝나고 휴식을 가졌다.

땅바닥은 온통 오크의 시체가 널려 있었고, 더운 날씨에 벌써 악취가 올라왔지만, 이들은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이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오크의 시체가 없는 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다른 곳으로 옮기면 또 다른 몬스터가 기다리고 있을 게 뻔했다.

기사들은 얼마나 피곤했는지 이런 환경에서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새벽이 오기 전, 경일은 불침번을 섰다.

가장 어둡고 피곤할 시간에 일부러 자원한 것이다.

그와 함께 불침번을 서는 기사는 함께 출진한 사람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리오였다.

“힘들지 않아?”

경일은 숲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아닙니다, 선인님.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말과는 달리, 그의 눈에는 짙은 다크 서클이 서려 있었다.

잠들지 않으려고 얼마나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있는지, 눈에 붉은 핏발이 가득했다.

“리오는 몇 살이야?”

“열여덟 살입니다.”

대한민국 나이로 치면 이제 열아홉 살, 고등학교에 다니며 한창 공부하고 있을 나이였다.

대학에 가거나 아니면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할 시기였다.

인생 중 가장 즐겁게 보내야 할 시기에 이런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 서 있다니.

그러나 리오는 더 오래 수련한 기사들도 힘들어서 픽픽 쓰러지는 상황에 최선을 다해 싸운 전사였다.

경일이 그런 그를 위해 시원한 콜라 캔을 하나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선인님?”

“콜라라는 건데, 잠이 깨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거야.”

타악!

경일이 캔 뚜껑을 젖히자, 경쾌한 소리가 났다.

‘쏴’ 하고 탄산이 올라오는 산뜻한 소리와 함께 콜라 특유의 청량감 있는 단 냄새가 올라왔다.

“와~”

처음 맡아 보는 냄새에 리오의 얼굴이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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