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네크로맨서
“자~ 마셔 봐.”
“감, 감사합니다.”
리오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이 났다.
콜라 한 잔에 저렇게 환한 미소라니.
지구라면 어림도 없었겠지.
꿀꺽!
인벤토리에서 막 나온 콜라는 냉장고에서 막 꺼낸 것처럼 시원했다.
시원함을 배가시켜 주는 탄산에 이어, 처음 맡아 보는 향과 함께 복합적인 단맛을 본 리오가 깜짝 놀랐다.
“세상에! 이런 맛이 있을 수가 있다니…….”
체력 포션이 콜라보다 만 배는 더 효과가 클 것이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체력 포션보다 더 효과가 나을 수도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콜라 한 모금에 피곤으로 가득 찼던 리오의 얼굴이 이완됐다.
날카롭게 서 있던 신경도 어느 정도 가라앉는 모습이었다.
“응? 왜 그러고 있어?”
금방 다 마셔 버릴 것 같이 굴던 리오가 콜라를 가만히 들고 쳐다보기만 했다.
“그게… 없어지는 게 너무 아까워서요.”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워하는 모습이 무척 순박해 보였다.
리오의 모습에 동네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 분식점을 열었을 때, 떡볶이 맛에 놀란 아이들이 가진 돈이 없어 최대한 아껴 먹던 모습이 리오와 똑 닮아 있었다.
‘애들은 다 잘 지내고 있을까? 보고 싶구나!’
경일은 자신이 귀가하면 아이들이 아저씨 하고 부르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리는 듯했다.
지친 마음에 따뜻한 온기가 스며든다.
리오에게 작은 호의를 베풀었을 뿐인데, 경일에게 더 큰 위로로 돌아왔다.
“짜잔, 여기 더 있지롱. 그거 다 마시면 이것도 주지.”
경일의 말투는 어느새 동네 아이들에게 말하듯이 장난스러우면서도 애정이 가득해졌다.
리오의 두 눈이 기쁜 듯 커지더니, 곧바로 손에 든 콜라를 다 마셔 버렸다.
“끄윽~”
급하게 마신 탓에 탄산이 목을 찌르고 트림이 올라왔다.
“죄, 죄송합니다.”
리오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갔다.
경일은 민망해하는 그의 등을 가볍게 쓰다듬어 주고 차가운 콜라 한 캔을 건넸다.
불어오는 바람은 진한 피비린내가 났지만, 뜨거운 몸을 식혀 주었다.
고개를 들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별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현실과 너무 다른 그 아름다운 모습에 잠시 정신을 뺏길 정도였다.
경일의 눈에 땅으로 떨어지는 몇 개의 별똥별이 보였다.
긴 꼬리를 남기고 사라져 가는 별똥별이 왠지 모르게 그의 가슴으로 날아와 박혔다.
몬스터 숲에 들어오고 오래간만에 찾아온 휴식이었다.
아침 해가 떠오르자, 경일은 고생한 기사들을 위해 특별 요리를 만들었다.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요리 중 하나인 쏘가리 매운탕이었다.
기사들이 피운 여러 개의 불 위에 커다란 냄비가 걸렸다.
물을 붓고 끓어오르는 동안, 미리 손질해 놓은 채소와 쏘가리, 양념장을 준비했다.
끓는 물에 준비된 재료를 넣자, 라면을 끓이는 것처럼 간단하지만 맛있는 쏘가리 매운탕이 완성됐다.
이미 한 번 먹어 본 적이 있는 기사들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한쪽에 준비된 밥과 함께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했다.
“크으~”
얼큰한 국물에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나왔다.
“정말 맛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번 원정에 따라오길 잘했다니까?”
“캬~ 어제의 고난이 싹 씻겨 나가는구먼. 어제처럼 빡세게 싸우는 것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이런 여유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고 말이야.”
“언제 또 몬스터가 올지 모르니, 여유 부리지 말고 조금이라도 더 먹어 놓으라고.”
한 기사의 현실적인 조언에 기사들은 먹는 데에만 열중했다.
식사가 끝나고 뒷정리하는 경일의 얼굴에 슬픔이 묻어 났다.
처음 몬스터 숲에 들어왔을 때와 같은 양의 음식을 준비했는데, 너무 많이 남았다.
남은 음식만큼 기사들이 죽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들의 험난한 여정은 끝없이 이어졌다.
몬스터 숲의 정중앙을 향해 나아간 지 벌써 1년이 지나 있었다.
이제 남은 기사의 수는 겨우 스무 명이었다.
여기까지 동료의 희생을 발판 삼아 온 것과 다름없었다.
죽어간 동료들의 염원을 짊어지고, 쉬지 않고 이어진 극한의 전투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들은 더욱 강해졌다.
그들의 눈은 형형한 안광을 내뿜었고, 어딘가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캬아아아아악!”
어디선가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몬스터의 경고였다.
자신의 구역을 침입한 자에게 보내는.
이미 이런 비슷한 일을 많이 경험해 본 터라 기사들은 곧바로 전투를 준비했다.
“이번에는 만만치 않은 놈이 나올 거 같은데…….”
벌써 몬스터의 소리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달랐다.
영혼을 직접적으로 억누르는 듯한 힘이 전해져 왔다.
기사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건 공포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짜증스러워하는 모습.
지옥을 헤치고 살아남은 이들은 한 지역을 다스리는 패자의 기운을 풍겼다.
철커덕! 철커덕!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침한 소리.
“온다. 모두 전투를 준비하라.”
자포리자의 말에 기사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일렬로 섰다.
햇빛이 들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숲속에서 무언가가 걸어 나오며 조금씩 형태가 드러났다.
생각보다 작은 모습에 조금 전 몬스터의 포효에서 느꼈던 긴장이 풀렸다.
아무래도 덩치가 큰 몬스터보다는 사람과 비슷한 덩치의 몬스터가 싸우기 편할 수밖에 없었다.
“뭐지?”
아직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손에 쥔 큼직한 보석이 달린 막대기를 높게 들어 올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웠다.
“#@#&? $%#? &*#$? #%#@$!”
놈의 주문에 반응하듯 땅이 들썩였다.
그리고 땅을 뚫고 튀어나온 하얀색의 무언가.
그건 바로 앙상한 팔뼈였다.
“제기랄! 네크로맨서다!”
기사의 외침에 반응하듯, 넓은 땅이 한꺼번에 들썩였고 수백… 아니, 수천 마리의 스켈레톤이 땅을 뚫고 나왔다.
놈들은 손에 칼과 방패를 들고, 머리에는 투구를 쓴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끼에에에에에엑!”
스켈레톤은 어둡고 답답한 땅속을 나온 것이 기분 좋은 듯 크게 울부짖었다.
“윽!”
칠판을 손톱으로 길게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가 기사들의 고막을 사정없이 때렸다.
“케에에에에엑!”
선두의 선 스켈레톤이 녹슨 칼을 들어 올리자, 녀석을 따라 수천의 스켈레톤이 그 뒤를 따라 똑같이 자신의 무기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수천의 텅 빈 동공이 기사들을 노려봤다.
“온다!”
기사의 외침처럼 모든 스켈레톤이 기사들을 향해 달렸다.
뼈만 남은 스켈레톤이라 할지라도 워낙 많은 숫자가 달리니 그 진동이 작지 않았고, 그대로 기사들에게 전달이 되었다.
“모두 준비하라!”
자포리자의 명령에 기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선봉은 언제나 그랬듯이 경일이 맡았다.
서걱! 서걱! 퍼억!
경일은 달려오는 스켈레톤을 맞이하며 긴 창을 무섭게 휘둘렀다.
창날에 걸린 스켈레톤은 그대로 반으로 잘렸고, 창대에 맞은 스켈레톤은 뼈가 부러져 허물어졌다.
창은 쉬지 않았다.
스켈레톤이라는 거대한 물살이 덮쳐 왔지만, 경일의 창은 오히려 그 물살을 베어 내 길을 만들었다.
스무 명의 기사와 수천의 스켈레톤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죽어엇!”
“방심하지 마!”
“대열을 지켜라!”
기사들의 목은 이미 쉰 지 오래였다.
전투 때마다 큰 소리로 외치다 보니, 아무리 강인한 육체라 해도 목소리가 변할 수밖에 없었다.
“싸워라! 우리의 손에 전 인류의 목숨이 걸려 있다. 비록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고독한 싸움이지만, 우리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건 동료들이 알고 있다!”
자포리자의 피 끓는 목소리가 스켈레톤이 지르는 괴성을 뚫고 들어와 경일과 기사들에게 똑똑히 전달되었다.
부웅!
스켈레톤 중 유독 덩치가 큰 녀석이 거대한 쇠망치를 휘둘렀다.
터엉!
기사가 급하게 방패로 막아 보지만,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두 다리가 허공에 떠올라 그대로 뒤로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윽.”
그는 고통을 참으려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내장이 진탕됐는지 이 사이로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제기랄, 오우거 스켈레톤이다. 모두 조심해!”
칼튼이 재빨리 달려와 상처 입은 기사의 앞을 막아 혹시 모를 다음 공격에 대비했다.
오우거 스켈레톤은 말 그대로 오우거가 죽고 나서 스켈레톤으로 다시 태어난 몬스터였다.
덩치와 힘이 기존의 스켈레톤보다 훨씬 강할 수밖에 없었다.
스켈레톤의 숫자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데, 간간이 스켈레톤 오우거까지 섞여 있자, 기사들은 애를 먹었다.
“우리는 강하다! 이까짓 뼈다귀에게 무너질 우리가 아니다. 기운을 내라!”
칼튼이 소리치며 기사들의 사기를 올리려 노력했다.
경일과 자포리자가 단독으로 몬스터와 싸울 때, 늘 기사들을 수습하고 같이 싸워온 이가 칼튼이었다.
경일과 자포리자가 단독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건 칼튼이 그들의 뒤를 받쳐 주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기사들의 무기에 서린 오러가 더욱 짙게 빛났다.
단전이 찢어지더라도 스켈레톤을 모두 죽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고 위험해 내일을 생각하지 않은 지 오래됐다.
아니, 내일을 생각해서 힘을 아껴 두었다면 여기까지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최대한 침착하게 스켈레톤과 맞서보지만, 기사의 숫자가 겨우 스무 명이라는 건 넘어설 수 없는 핸디캡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이들은 적의 압도적인 물량을 질리도록 경험해 왔다.
그리고 그런 불리한 상황에 놓일 때마다, 일당백의 기세로 모든 걸 이겨 냈다.
지금은 워낙 스켈레톤의 수가 많으니, 일당백이 아니라 일당천 정도는 되어야 하겠지만.
타다다다다닥!
그러나 조금씩 지치는 기사들과 달리, 언데드 몬스터인 스켈레톤은 애초에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가장 무서운 점은 고통을 못 느낀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강한 몬스터라도 고통이 느껴지면 움찔거릴 수밖에 없지만, 스켈레톤은 그런 게 없었다.
놈들은 척추가 잘려 나가 두 동강이 나도 바닥을 기어 와 공격을 시도했다.
지금까지 싸워 왔던 몬스터의 패턴과 전혀 달랐다.
이 작은 차이로 큰 위험에 빠질 수가 있었다.
“으윽…….”
정면의 스켈레톤을 공격하려던 기사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허리가 잘려 상체만 남은 스켈레톤이 기어 와 기사의 발에 단검을 꽂아 넣은 것이다.
단단한 미스릴 갑옷이 버티지 못하고 구멍이 날 정도로 스켈레톤은 강했다.
몬스터 숲의 중심에 거의 다 온 만큼 몬스터는 강했고. 이제 미스릴 갑옷도 큰 방어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기사가 다치지 않은 다리로 스켈레톤의 두개골을 밟아 으스러뜨렸다.
끈질긴 스켈레톤의 공격에 기사들이 곤란을 겪었다.
가장 공격을 많이 받는 이는 경일이었다.
스켈레톤도 경일이 가장 강한 걸 알고, 그를 죽이기 위해 끊임없이 덤벼들었다.
오우거 스켈레톤같이 덩치가 큰 녀석이 경일과 정면으로 맞서는 동안, 사방에서 그에게 달려들었다.
경일은 아예 스켈레톤이 다시 일어날 수 없게 머리를 터트려 버렸다.
언제부턴가 그의 발밑에 뼈가 쌓여 숲의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바닥을 밟을 때마다 우두둑거리며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제기랄.”
스켈레톤 한 마리가 온몸을 날려 경일의 팔을 잡는 데 성공했다.
급하게 팔을 흔들어 녀석을 떼어 내려 해 보지만, 맞서고 있는 오우거 스켈레톤이 이 기회를 두고 볼 리가 없었다.
휘잉!
경일은 온몸을 날려 오우거 스켈레톤이 휘두르는 거대 망치를 겨우 피해 냈다.
그사이 또 다른 스켈레톤들이 경일에게 달라붙었다.
놈들은 경일의 두 팔과 다리를 잡고 늘어졌다.
“놔라, 이 새끼들아! 이 징그러운 몬스터 새끼들이!”
경일의 화난 목소리가 전장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힘을 써서 스켈레톤을 떨쳐 내도 그때뿐이었다.
다시 한 마리가 달라붙고, 또 다른 놈이 달라붙고… 연쇄적으로 스켈레톤들이 경일을 붙잡은 것이다.
경일이 움직이자 거의 서른 마리의 스켈레톤이 땅에 질질 끌렸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