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도착
“이런!”
경일은 발 아래로 떨어지는 액체를 보았다.
혹시 몰라 기존의 방패보다 몇 배나 두껍고 크게 만든 것을 인벤토리에서 꺼냈는데, 본 드래곤 최후의 브레스에 녹은 것이다.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방패가 완전히 사라지리라.
다른 방패를 안쪽에 덧대는 것도 불가능했다.
경일의 몸을 완전히 가려 줄 만큼 커다란 게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점점 방패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강해지고 있었다.
‘젠장, 방패를 버리고 피해야 하나?’
그러나 그것도 불가능했다.
옆으로 쏟아지는 브레스를 볼 때, 피하는 순간 자신도 공격에 노출될 게 뻔했다.
유일한 희망은 방패가 사라지기 전에 브레스가 멈추는 것 뿐.
놈도 끝까지 브레스를 쏠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경일의 기대를 배신하듯 브레스의 강도는 더욱 세졌고, 방패가 녹는 속도 역시 더 빨라졌다.
여러 겹으로 만든 방패가 어느새 브레스의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얇아져 버렸다.
경일은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여기서 끝인가?’
이대로 죽으려니 억울했다.
1년이 넘은 시간을, 그리고 수많은 역경을 이겨 내고 여기까지 왔는데, 조금만 더 가면 이 모든 일의 원흉을 만날 수 있는데…….
바로 목전에서 희망이 꺾여 버린 만큼 마음이 더욱 아플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겪은 기사들의 영웅적인 죽음이 전부 개죽음으로 끝을 맺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경일은 심장이 수십 개의 바늘로 찔린 듯한 괴로움과 고통을 겪었다.
자기도 모르게 눈가가 붉어지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정말… 정말로 여기가 끝인가?’
그 순간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악!”
본 드래곤의 처절한 비명과 함께 브레스가 순간 멈췄다.
놀란 경일이 얼른 방패를 치우고 상황을 파악했다.
자포리자였다.
그가 브레스를 쏘는 데에 정신 팔린 놈의 목뼈를 밟고 올라가 이마에 롱소드를 깊게 박은 것이었다.
본 드래곤은 마지막으로 경일을 죽이려고 한 것까지 방해받자, 분노를 터뜨리며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롱소드의 자루를 잡고 있는 자포리자는 단단하게 버텼고, 그게 마지막 발악이었는지 본 드래곤의 거체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이긴 것이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살아남은 기사들의 입에서 승리의 기쁨이 튀어나왔다.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최악의 몬스터를 죽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잡동사니처럼 볼품없게 널브러진 뼈를 보니,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본 드래곤이 마지막 문지기였고, 이제 마지막 싸움만이 남았음을.
“괜찮으십니까?”
자포리자가 급하게 달려와 물었다.
“네, 영주님 덕에 살았습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죽을 뻔했습니다. 심장이 얼마나 쪼그라들었는지 지금도 욱신거립니다, 하하하!”
경일이 웃음을 짓자 자포리자의 마음도 한결 편해졌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네크로맨서의 잘린 머리가 ‘툭’ 하고 옆으로 떨어졌다.
역시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 것이었다.
예상대로 더 이상 몬스터의 습격은 없었다.
경일은 마지막 싸움을 대비해 컨디션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몬스터가 사라진 몬스터 숲은 아름다웠다.
반짝이는 풍성한 나뭇잎들.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 사이로 내리쬐는 환한 빛줄기.
짙은 생명력으로 가득한 숲의 공기는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런 이름다운 숲이 몬스터 숲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었다.
이제는 숲의 오명을 벗기고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줄 시간이었다.
잠시 풍경을 감상하던 경일이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그 많던 이들이 모두 죽고, 이제 자신과 자포리자를 포함해도 겨우 열 명만이 남아 있었다.
최후의 결사대는 죽은 기사들의 염원을 짊어지고, 인류의 생존이라는 감당하기 힘든 사명을 띠고 이곳까지 왔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경일은 이들에게 뭔가 근사한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배움이 짧았던 터라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에 담긴 감사하는 마음은 지금까지 동고동락해 온 동료들에게 정확히 전달되었다.
마지막 싸움은 분명 지금까지 해 온 어떤 싸움보다 힘겨울 것이다.
감사를 표현할 기회도 이게 마지막일수 있을 터.
살짝 쑥스러움을 느끼던 경일은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어쩌면 벨크스라는 놈은 자신과 싸울 자격이 있는지 보기 위해 이런 숲을 만들었을 수도 있으리라.
자존심이 상할 상황이지만, 처음부터 이런 구도로 짜인 이상 어디 투정을 부릴 곳도 없었다.
[대단하구나.]
오래간만에 네로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던전의 수호신인 그는 정해진 법칙 때문에 이 싸움에 어떠한 영향도 끼쳐서는 안 된다.
경일은 네로가 이 일로 상당한 페널티를 받을 거라는 것을 알았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의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감사합니다.’
경일은 짧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서자 자포리자와 기사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 볼까요?”
경일은 최대한 밝은 얼굴로 자포리자와 기사들을 바라봤다.
“네, 선인님.”
돌아오는 목소리가 밝았다.
이미 원래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진 모습이었지만, 그들이 내뿜는 에너지는 그 무엇보다 밝았다.
일주일간의 행군.
그들을 맞이한 것은 거대한 공터였다.
생명력이 넘치는 숲이 사라지고 황량한 땅만이 펼쳐져 있었다.
이 땅에서는 그 어떤 생명체도 자라고 있지 않았다.
경일은 직감적으로 벨크스의 영역으로 온 것을 알았다.
몬스터 숲의 강력한 생명력까지 밀어낼 수 있는 거대한 힘.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으며 인간의 인식을 벗어난 힘.
퍼석!
경일이 먼저 벨크스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말라 버린 흙에서 들려오는 건조한 소리가 생명력이 말랐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몬스터 숲에 이런 공간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자포리자가 황당한 듯 끝없이 펼쳐진 공터를 둘러봤다.
그러던 그의 눈에, 이 공간과 어울리지 않는 선명한 색이 보였다.
“선인님… 저기.”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본 경일은 자포리자가 본 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게이트였다.
누런 단색의 세상에서 게이트가 내뿜는 원색만이 오롯이 빛나고 있었다.
흑백의 화면 속에서 강렬한 색조가 나타난 듯한 그런 느낌.
“가죠.”
경일이 먼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숲이 내뿜던 향기로운 냄새가 사라지고, 무취의 세계가 그들을 맞이했다.
게이트까지는 거의 반나절 거리였다.
이미 일주일 간 행군을 한 이들이었지만, 숲과는 달리 황량한 곳에서 걸으니 정신적으로 조금 피곤해졌다.
게이트는 멀리서도 보인 만큼, 그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분명 진공청소기가 먼지를 빨아들이듯 몬스터를 삼켰으리라.
“하하하하하하!”
게이트에 눈이 팔린 이들을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 갑자기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경일과 일행이 주변을 둘러보자, 방금까지 없었던 한 인물이 게이트 옆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남자의 웃음소리에 녹아 있는 것은 분명 무시였다.
뭘 이런 걸 가지고 놀라고 그러냐는…….
남자는 하얀색의 머리카락을 전부 올백으로 곱게 넘기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였고,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잘생긴 얼굴이었다.
작은 얼굴과 완벽한 이목구비, 특히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에서는 천진난만하고 선한 느낌까지 풍겼다.
190센티 정도의 키에 탄탄한 몸매.
지금까지 상상해 왔던 벨크스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황량한 게이트 앞이 아니라 스탄다비아, 혹은 지구에서 만났다면 벨크스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네가 벨크스냐?”
경일이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래. 내가 벨크스다.”
대답하는 목소리까지 사람의 호감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마치 천상의 천사가 말한다면 저런 느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설마 신인가?’
경일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신이란 단어가 떠오를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떠오른 생각을 날려 버렸다.
신이 이런 곳에서 몬스터나 관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물론 고작 외모 하나만 보고 이런 생각이 들게 하다니, 평범한 존재가 아닌 것은 확실했다.
경일은 벨크스를 만나면 가장 먼저 묻고 싶었던 질문부터 던졌다.
“왜 지구와 스탄다비아를 침공한 거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마치 대답이 마음에 안 들면 곧바로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듯이.
하지만 벨크스는 그런 경일의 기세쯤은 가볍게 흐트러뜨리고 입을 열었다.
“왜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벨크스는 경일의 질문에 오히려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너희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도 않았는데 왜 침공했지? 우리는 너희의 존재 자체를 알지도 못했어. 잘살고 있는 우리를 왜 말살시키고, 지구를 정복하려 한 거냐고!”
혐오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경일은 벨크스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하하하하, 난 또 뭐라고. 너희는 왜 죄 없는 동물을 죽이고 먹지?”
“그게 이것과 무슨 상관이야?”
질문과 전혀 상관없는 대답에 경일이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아니지, 상관있어. 우리의 기준에서 인간이란 종족은, 너희가 먹는 동물과 같은 급에 불과해. 너희가 동물에게 동의를 구하고 잡아먹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 역시 너희에게 동의를 구할 필요 따윈 없어. 그저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지구라는 곳을 선택했을 뿐이야.”
“그게 무슨 개소리야! 어떻게 짐승과 인류를 비교할 수가 있지? 인류는 말이야, 문명을 꽃피우고 지성이 있는 존재라고!”
“하하하! 뭔가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우리가 보기에 너희는 짐승과 똑같아. 아니지… 오히려 짐승보다 못한 존재겠군? 짐승은 너희 같은 허세는 없으니까. 지구의 인간들은 과학이라는 걸 아주 대단하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우주의 법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아주 하찮은 잔재주에 불과하지. 실제로 내가 보내는 게이트와 몬스터에게 과학이 통했나? 아니잖아. 조금 강한 녀석만 보내도 너희의 세계에서는 아주 큰일이 벌어졌던 것 같은데.”
벨크스가 선해 보이는 얼굴로 온갖 독설을 퍼부었다.
경일은 어떻게든 받아치려고 했지만,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너희의 역사를 살펴보니, 같은 종끼리 온갖 이유를 붙여 서로 침공하고 노예로 삼지 않았어? 너희는 그래도 되는데, 우리가 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내 생각에는 말이지, 너희 종은 가만히 두면 알아서 싸우다 멸망할 거야. 그 시기가 조금 더 빨리 온 거라고 생각하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질 거야.”
벨크스는 심심하던 차에 재밌는 장난감이라도 만났다는 듯이 즐거워하며 경일을 가지고 놀았다.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경일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화가 끓어올라 터질 것만 같았다.
“내가 보기엔 네놈이야말로 별 볼 일 없는 놈으로 보이는데. 혼자서 이런 원시적인 환경에서 몬스터나 관리하는 걸 보니, 아무것도 아닌 놈인 게 분명해. 자격도 안 되는 놈이 입만 살아서 나불대기는.”
경일이 지지 않고 벨크스를 조롱했다.
“너, 여기서 혼자 얼마나 오래 있었어? 여기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몬스터가 언제 생긴 건지 기억도 못 하던데… 그러면 혼자서 수천 년 동안 냄새나는 몬스터나 관리하고 있던 거냐?”
“뭐, 뭐, 뭐… 이런 하찮은 놈이 감히!”
정곡을 찔린 듯 벨크스의 웃는 얼굴이 깨지고 본바탕이 드러났다.
온화하게 뜨고 있던 눈꼬리가 화를 참지 못하고 하늘로 치솟더니, 주름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던 얼굴에 깊은 고랑이 순식간에 생겨났다.
순백의 머리카락 역시 새빨간 핏빛으로 물들었고, 갓난아이처럼 매끄럽던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르며 돌기가 오돌토돌 돋아났다.
“이런, 이제야 정체를 드러냈군.”
경일은 악귀 같은 얼굴을 보고 한껏 비웃었다.
“이런 건방진 놈. 여기까지 온 건 인정해 주겠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있는 자격까지 얻은 건 아니야!”
“지랄. 아무것도 아닌 놈이 큰소리치기는.”
경일의 손에 창이 나타났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