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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298화 (298/300)

[298화] 몬스터의 먹이일 뿐이야

“그리고 말이야. 우리가 이렇게 대화를 나눌 사이는 아니잖아? 네가 죽음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으니, 그리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경일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자, 가라앉았던 공기가 서서히 달아올랐다.

이제 이 여정의 목표를 마무리 지을 때였다.

“쯧, 오래간만에 보는 장난감이라 조금 더 놀고 싶었는데.”

이미 정체가 드러난 벨크스는 아까와 같은 신비로운 모습을 버리고 원색적인 기운을 뿜어냈다.

경일이 앞으로 나서자, 자포리자와 기사들이 놈을 포위했다.

자포리자가 지금까지 자신을 믿고 따라온 기사들과 일일이 시선을 맞추고 입을 열었다.

“이 모든 악의 원흉을 죽여 몬스터를 몰아내자.”

이 싸움이 마지막인 걸 알고 있는 그들은 결연한 투지로 불타올랐다.

“유치하기는. 너희가 무슨 정의의 사도라도 되는 거 같아? 나는 악이고, 너희는 선… 이런 거야? 이런 미개한 것들이랑 싸워야 한다니.”

벨크스는 오히려 그런 기사들의 모습을 비웃었다.

“누가 미개할지는 싸움이 끝나 봐야 아는 거 아니겠어?”

경일이 먼저 벨크스에게 달려들었다.

‘저놈이 본 드래곤보다 약할 리는 없어. 처음부터 전력으로 상대한다!’

순식간에 놈에게 도달한 경일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그와 함께 자포리자와 그의 기사들 역시 벨크스에게 달려들어 각자의 무기를 휘둘렀다.

몬스터 숲을 뚫고 온 만큼 이들은 강했고, 그런 그들이 펼친 합격은 완벽했다.

피할 공간을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그대로 투영되었다.

그러나 벨크스는 그저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음만 짓고 있었다.

검격이 놈의 몸에 닿기 직전.

“물러서!”

갑자기 경일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포리자와 기사들이 급히 물러나 순간, 방금까지 있던 자리에 검은빛의 화살이 쏟아져 내렸다.

퍼퍼퍼퍼퍽!

화살은 사정없이 바닥을 뚫고 들어갔다.

그 광경을 보던 경일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분명 벨크스는 아무런 움직임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이 검은빛의 화살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극도로 예민한 감각이 살기를 감지하지 못했거나 조금이라도 대처가 늦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땅을 딛고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리라.

“하하하하하하!”

벨크스가 시원하게 웃어 제꼈다.

즐거워 미치겠다는 듯이.

“이제 네놈들의 위치가 실감이 되나? 여기까지 온 것 때문에 꽤나 자신감이 넘치는 모양인데… 과연 그게 너희들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일일까?”

경일은 숨이 턱하고 막혀 왔다.

그 직후 온몸을 사로잡는 공포.

그렇다.

벨크스는 몬스터를 조종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쉴 틈 없이 몬스터를 몰아쳤다면.

처음부터 본 드래곤 같은 범접 불가능한 몬스터를 보냈다면.

경일과 자포리자, 그리고 기사들은 여기에 도달하지 못하고 죽었으리라.

그는 정말 신처럼 자신들을 내려다보며 구경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벨크스의 한마디는 경일의 단단했던 마음에 균열을 내기에 충분했다.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걸어왔던 길이, 동료의 시체를 발판으로 삼아 그들의 의지를 가슴에 새기고 온 길이 전부 벨크스의 장난이라니.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놈의 웃음에서 느껴지는 것은 분명 진실이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 네놈의 세 치 혀에 놀아날 만큼 우리의 노력은 가볍지 않다!”

경일이 좌절하려고 한 그때, 자포리자의 엄한 질책이 터져 나왔다.

복잡한 현대인의 삶을 살고 있던 경일보다 명예와 신념으로 살아가는 자포리자의 마음속 기둥이 더욱 탄탄할 수밖에 없었다.

벨크스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자포리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에게는 벨크스가 적이었고, 적은 싸워서 이겨야 할 상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야아압!”

자포리자가 롱소드를 세우고 벨크스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와 함께 그의 기사들도 용감하게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당찬 모습도 잠시, 자포리자와 기사들의 힘찬 발걸음은 벨크스를 앞에 두고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움찔움찔.

어째서인지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온몸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고통.

그들의 동공이 끊임없이 흔들렸다.

“이게 무슨…….”

자포리자 역시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매우 놀란 얼굴이었다.

“하하하하! 이 버러지들아. 너희가 감히 내 옷깃 하나 건들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난 너희처럼 미개한 것들이 함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냐!”

벨크스가 입꼬리를 이죽거리며 웃었다.

자포리자와 기사들의 발걸음을 잡은 건 중력이었다.

놈과 가까이 다가섰을 때, 그의 육체를 누르는 강력한 힘을 느꼈다.

무시하고 앞으로 달려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을 놀렸으나, 마음과 달리 강한 압력 때문에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투둑!

버티지 못한 잔 근육이 터져 나가는 소리가 나며 자포리자가 천천히 무릎 꿇었다.

“으윽.”

몸속의 내장이 찌부러질 것 같은 고통에 기사 한 명이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잇새 사이로 신음을 내뱉었다.

자포리자는 이를 악물고 몸을 세우려 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비웃는 것 같이 더욱 강력한 압박이 그를 내리눌렀다.

자포리자는 온몸의 힘을 끌어내 자신을 내리누르는 압박에 저항했다.

하지만 이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인간의 힘이 아닌 자연의 힘이었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자신은 한낱 인간이었고, 자연의 힘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가 딛고 있던 바닥이 갈라지며 동심원을 따라 거미줄 같은 금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이를 악문 그의 입술을 비집고 핏물이 흘렀다.

“이런!”

경일은 동료들이 위험에 처한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곳까지 오기 위해 지금까지 얼마나 노력했는가.

그런데 고작 적의 말 한마디에 지금까지의 노력을 의심하다니…….

이 무슨 바보스러운 짓인가.

경일은 자신이 너무 바보 같고, 지금까지 자신을 믿고 따라온 동료들에게 너무 미안해 자괴감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 자책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되리라.

경일은 곧바로 인벤토리에서 창을 꺼내 던졌다.

오러를 머금은 창이 벨크스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창은 하나가 아니었다.

경일은 연발로 총을 쏘듯 연속으로 창을 던졌다.

순간, 벨크스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창의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다른 곳에 신경을 쏟자, 자포리자와 기사들을 압박하는 중력의 힘이 약해졌다.

“물러서!”

자포리자는 재빨리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벨크스가 창을 누르는 동안 집중력이 약해져 겨우 물러설 수 있었다.

일단 위기에서는 벗어났지만, 놈과 거리를 두고 서 있는 이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이건 숫제 괴물… 아니, 격이 다른 존재였다.

지금까지 강해지기 위해 익힌 모든 것을 부정당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무작정 달려들어서는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고, 처음 경험하는 힘에 어떻게 대항해야 할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위가 조용한 가운데, 경일이 방패와 검을 들고 앞으로 나갔다.

조금 전 자신이 보인 못난 모습을 반성하듯, 당당한 걸음걸이로 앞으로 나섰다.

“오호.”

그 모습에 벨크스가 흥미를 느끼고 작은 감탄을 내뱉었다.

“이야아아아압!”

경일이 뛰기 시작했다.

벨크스와 가까워지기 시작하자, 하늘에서 언제 등장했는지 모를 검은빛의 화살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경일은 이미 예상한 듯 들고 있는 방패를 머리 위로 올렸다.

땅땅땅땅땅!

그와 함께 서서히 느껴지는 압박.

온몸에 쇳덩어리를 달고 뛰는 것만 같았다.

“쯧쯧, 안 된다니까. 하여튼 미개해서 그런지 판단력도 형편없군 그래.”

팔짱을 끼고 여유롭게 서서 비웃는 놈의 얼굴에 주먹 한 방만 박아 넣을 수 있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경일은 더욱 힘을 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것밖에 없었다.

처음 암던의 주인을 만났을 때, 자신은 그의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자포리자 역시 벨크스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하지만 자신들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다.

“으아아아압!”

경일이 기합을 지르며 온몸의 힘을 쥐어짰다.

얼굴에 피가 쏠리면서 코피가 터져 나오고, 그와 함께 눈의 실핏줄 역시 모두 터져 피눈물이 흘렀다.

온몸의 혈관이 울룩불룩 튀어나오고, 압력에 이기지 못한 눈알이 팽창했다.

하지만 경일은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너무나 큰 고통에 순간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동시에 자신을 배척하고 몰아내려고 하던 기득권과 헌터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경일은 스스로의 의지로 스탄다비아에 왔지만, 그의 내면에 자신을 배척하는 사람들의 악의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 부분도 분명 존재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인류 전체가 무너지고 말 것인데도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내세우는 이기적인 사람들.

그런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내가 왜 그런 사람들 때문에 이렇게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단단한 마음에 조금씩 균열이 일어났다.

그와 함께 다리에 힘이 빠지고 이대로 모든 것을 놓고 편안해지고 싶은 마음이 계속 커져 갔다.

“모두 선인님을 따르라!”

그때, 자포리자의 피 끓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점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은 진실의 목소리.

“와아아아아아!”

이 자리에서 가장 약한 기사들조차 망설이지 않고 자신을 향해 달려왔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었지?’

꺾이려고 하는 무릎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노력하는 이유가 떠올랐다.

아이들.

분식점을 하면서 만났던 동네 아이들의 환한 얼굴이 한 명, 한 명 스쳐 지나갔다.

‘그래. 난 저 아이들에게 밝은 미래를 선물하고 싶었어.’

경일이 싸우는 가장 큰 이유였다.

자포리자와 그의 기사단까지 가세하자, 몸에서 느껴지는 압력이 조금 약해진 것이 느껴졌다.

이것으로 벨크스의 힘이 무한대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순간, 웃음 짓고 있던 벨크스가 정색했다.

“이런 버러지들이… 감히 주제도 모르고! 너희 같은 것들은 단지 몬스터의 먹이일 뿐이야. 그것이 너희의 운명이지. 죽어도 끊임없이 몬스터 먹이로 다시 태어나는 것.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이 운명은 변하지 않을 거다!”

벨크스가 싸움에 뛰어든 자포리자와 그의 기사들을 향해 폭언을 퍼부었다.

몬스터의 먹이라니.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니.

“너희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몬스터에게 먹혔는지 이야기 해 줄까? 그래, 너. 네가 이 중에서 가장 몬스터에게 많이 먹혔군. 이번 생도 너희 부모는 모두 몬스터의 먹이가 됐군 그래? 특히 너처럼 재수가 없는 것들이 있지. 다시 태어나도 너희가 사는 스탄다비아처럼 거지 같은 곳만 골라서 태어나는 것들 말이야.”

“이런 개자식이!”

벨크스에게 지목받은 기사의 부모님이 몬스터에게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 것은 사실이었다.

기사는 이 모든 것이 저놈 때문이라는 사실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벨크스에게 달려들었다.

“안 돼!”

자포리자가 급하게 말려 보지만 이미 상황은 끝나 있었다.

기사는 벨크스에게 공격 한번 해 보지 못하고, 하늘에서 쏟아진 검은빛의 화살에 난자당했다.

수없이 많은 화살에 맞은 그는 누가 봐도 즉사할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기사는 죽지 않았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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