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던전 핵
기사는 온몸을 수많은 화살로 꿰뚫리고도, 입에서 울컥울컥 피를 토해 내면서도 핏발 선 눈으로 자신을 비웃고 있는 벨크스를 노려봤다.
절대 움직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그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의 몸을 내리누르는 중력 때문에 허리가 점점 꺾여 갔다.
기사는 한눈에 보기에도 위태로운 발걸음을 조금씩 느리게 옮겼다.
그의 움직임은 갓 태어난 사슴처럼 위태로웠지만, 분명 조금씩이나마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는 그 모습에 어느새 벨크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경일은 끓어오르는 분노와 동시에 뜨거운 감동을 느꼈다.
“저놈의 힘은 무한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더욱 힘을 쓰면 놈의 힘이 분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르단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여 줍시다!”
경일은 조금 전 자포리자와 그의 기사단이 합류하면서 자신에게 가해지는 압박이 약해지는 것 분명히 느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자신들이 힘을 쓸수록 아르단에게 가해지는 압박은 약해질 터.
경일에 말에 이곳에 있는 모든 이가 그에게 힘을 주기 위해 체내의 힘을 더욱 끌어냈다.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단전의 모든 마나를 뽑아낸 것은 물론, 근육이 가진 모든 힘까지 쓰며 앞으로 전진했다.
“이런 버러지들이!”
벨크스가 짜증을 냈다.
아르단은 그런 벨크스의 모습을 보고 웃었다.
그는 동료들의 힘을 느끼며 놈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항거하기 힘든 상대에게 도전하는 아르단의 모습에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위대함이 느껴졌다.
경일조차 한때 꺾였던 순간을 극복하고 나아가는 선구자의 발걸음이었다.
마침내 벨크스 가까이 도착한 아르단.
그는 검을 쥔 팔을 들고 그대로 던졌다.
이미 신체 능력의 대부분을 상실한 검은 어린아이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힘없이 날아갔지만, 벨크스에게 명중했다.
순간, 경일과 자포리자는 얼어붙었다.
손도 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존재가 저런 공격조차 피하지 못한 것이다.
놈의 옷에서 조금씩 피가 새어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아르단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그대로 허물어져 내렸다.
“이, 이런.”
벨크스의 힘은 경일의 예상대로 무한대가 아니었다.
그는 경일과 자포리자, 그리고 나머지 기사들에게 힘을 쏟느라 아르단의 공격은 피할 겨를이 없던 것이다.
고통이란 것을 처음 겪자, 그는 매우 당황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이들은 벨크스도 자신들과 똑같이 아파하고 피를 흘리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처럼 여겨졌던 그가 단지 강한 기술을 가진 생명체 하나로 격하된 것이다.
“이야아아압!”
가장 먼저 경일의 기합성이 터졌다.
동시에 그의 몸이 오러로 불타올랐다.
너무나도 강렬한 파란빛이 그의 몸을 감쌌다.
그러고 나서 자신을 짓누르던 압박을 거부하며 허리를 들었다.
“이런 버러지 새끼들이!”
벨크스가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살기를 피워 올렸다.
그와 함께 떨어지는 검은빛의 화살… 아니, 검은빛의 창이라고 봐야 할 무언가가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하늘을 검게 물들인 검은빛의 창은 아이러니하게도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쾅! 쾅! 쾅! 쾅! 쾅!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기도 힘들 정도의 압력에 노출된 상태에서 검은빛의 창까지 휘몰아치자, 한가운데에 있던 이들은 마치 폭탄에 얻어맞는 것만 같았다.
“아아아아악!”
누군가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제기랄!”
경일은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가면 전멸당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가 더욱 힘을 내야 했다.
하지만 마나는 무한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전신을 뒤덮던 푸른빛이 줄어들고, 단전 역시 쪼그라들며 고통이 느껴졌다.
이건 마나 결핍의 전조 증상이었다.
‘하필 이럴 때…….’
마나가 떨어지면 헌터는 일반인과 똑같았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벨크스의 공격에 단 1초도 버티지 못하리라.
경일의 얼굴에 절망감이 떠올랐다.
이제 겨우 다 왔는데,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눈앞에 정상을 두고 돌아서야 한다니.
그런 그의 등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자포리자의 손이었다.
자포리자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이곳에서 가장 마나가 많은 자신이 이 정도로 몰렸고, 그다음으로 강한 자포리자조차 저 상황에 다른 이들은 어떻겠는가.
“선인님.”
자포리자가 입을 열자 피가 울컥하고 쏟아져 내렸다.
그의 단단한 눈이 경일과 마주쳤다.
말하지 않아도 자포리자의 의지가 그대로 전해져 온다.
그리고 자신의 등을 대고 있는 손에서 느껴지는 힘.
그는 도저히 다 죽어 가는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을 내 경일을 밀어냈다.
“으아아아아!”
경일은 달렸다.
빌딩만 한 쇳덩어리가 자신을 눌러 으깨 버릴 것 같은 어마어마한 힘에 굴복하지 않고 앞으로 달렸다.
그와 함께 쏟아지는 검은빛의 창.
몇 발짝 떼지도 못하고 단전의 마나가 전부 말라 버렸지만, 경일의 발걸음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벨크스가 굉장히 놀라 눈을 크게 뜬 모습이 보인다.
가만 보니 그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처음과 다르게 땀을 뻘뻘 흘리며 얼굴이 파랗게 변할 정도로 힘을 쓰고 있었다.
“이게 뭐야? 어떻게 계속 움직일 수 있는 거지?”
놈의 목소리에는 초조함과 공포가 녹아 있었다.
경일은 그런 그를 향해 한번 웃어 주고 더욱 빠르게 달려 나갔다.
잠시 후, 드디어 놈의 정면에 설 수 있었다.
“드디어 같은 곳에 섰네.”
경일이 벨크스와 눈을 맞추며 웃었다.
“너, 너, 너…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지?”
벨크스는 이미 마나가 말라 버린 경일이 이곳에 서 있는 게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마나가 고갈된 경일이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건 자포리자와 그의 기사들의 전해 준 의지 덕분이었다.
의지는 텅 빈 단전에 새로운 힘을 채워 주었고, 경일이 이곳까지 올 수 있게 도와 주었다.
“이게 네놈이 버러지라고 무시했던 이들의 진정한 힘이다. 네놈의 힘 따위는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는 진짜 힘이지.”
경일이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잠, 잠, 잠깐만.”
벨크스가 손을 앞으로 뻗으며 애원하듯 소리쳤다.
그 모습을 보고 경일이 크게 웃었다.
“자기가 신인 줄 알고 행동하는 놈도 별수가 없구나.”
그는 경멸이 깃든 냉담한 눈길로 벨크스를 내려다보았다.
“이럴 수는 없어. 이건 우주의 법칙에 어긋난다고! 너희 같은 미물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야!”
“어디 죽고 나서도 그런 개소리가 가능할지 두고 보지. 그리고 말이야, 이제 이곳에 다시 오기는 힘들 거야. 이미 한번 겪어 봤으니 앞으로는 오는 족족 죽여 버릴 테니까 말이야.”
경일이 검이 벨크스를 향해 내리그어졌다.
“어, 어, 어…….”
당황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얼굴 한 중간을 기점으로 벨크스의 몸에 가느다란 핏빛 실선이 생겨났다.
이윽고 놈의 몸이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졌다.
벨크스가 죽자, 그들을 압박하는 모든 힘이 사라졌다.
경일은 다급하게 자포리자에게 달려갔다.
그는 다행히 살아 있었다.
자포리자를 소중히 안아 들고 그의 입에 포션이란 포션은 모두 부었다.
“선인님, 감사합니다.”
자포리자가 잘 움직이지 않는 입을 열고 힘들게 말했다.
“아닙니다. 이 모든 건 영주님과 기사들의 힘입니다.”
벨크스와 싸움이 끝나고 살아남은 이는 경일을 포함해 단 네 명이 다였다.
너무나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세계를 침공한 벨크스라는 최악의 적을 무찌를 수 있었다.
자포리자와 살아남은 기사들에게 포션을 먹이고, 경일은 모든 사건을 마무리하기 위해 게이트로 다가갔다.
거대한 게이트는 벨크스의 존재와 상관없이 여전히 찬란한 빛을 내고 있었다.
경일이 게이트로 들어가니, 그의 눈앞에 보인 건 엄청난 공간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는 수백 수천 개의 게이트였다.
각자의 게이트에서 몬스터가 들어와 또 다른 게이트를 통해 사라졌다.
“이건… 물류 터미널 같은 곳이구나.”
경일은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이곳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던전의 핵.
수천 개의 게이트를 품고 있는 핵답게 그 크기가 엄청났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진한 빛을 내뿜으며 단단한 느낌을 물씬 풍겼다.
그런 대단해 보이는 던전의 핵이 경일이 앞에 서자 떨림이 일어났다.
마치 천적을 마주친 것처럼.
“뭐지? 꼭 이성이 있는 존재 같잖아.”
마치 자신을 죽이지 말라고 애원하는 듯했다.
“절대 안 되지. 네가 존재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는데 말이야.”
경일은 자신이 가장 애용하는 투박한 몽둥이를 꺼냈다.
이 몽둥이로 얼마나 많은 악인에게 벌을 줬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넌 광산으로 보낼 수 없는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너를 부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해.”
웅!
그의 말을 알아들은 듯이 던전 핵의 떨림이 더 강해진 것 같았으나, 경일은 망설임 없이 던전 핵을 후려쳤다.
따앙!
몽둥이가 던전 핵에 튕겨 나오며 전달된 진동 때문에 손바닥이 찌릿찌릿했다.
“어쭈, 다른 핵과는 다르다 이거지. 하긴, 차원을 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데 쉽게 부서지지는 않겠지. 그런데 말이야… 빨리 부서지는 게 좋을 거야. 시간이 늘어갈수록 너의 고통만 커질 거거든.”
경일은 마치 던전 핵이 살아 있는 것처럼 말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본격적인 몽둥이질이 시작됐다.
땅! 땅! 땅! 땅! 땅! 땅! 땅!
던전 핵이 깎여 나가며 파편이 튀어 올랐다.
몽둥이를 한 번 때릴 때마다, 반탄력 때문에 손에 충격이 전달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일의 손바닥이 찢어져 피가 흘렀지만, 몽둥이질을 멈추지 않았다.
한 대 한 대 때릴 때마다 지금까지의 고생이 조금씩 깎여 나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이겼고, 그 달콤한 승리의 맛에 온몸이 쾌감으로 넘쳐흐른다.
몽둥이로 맞은 곳이 조금씩 패이더니, 지금은 사람 한 명 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만큼 커져 있었다.
던전 핵의 떨림이 점점 커져 갔다.
마치 그만하라고 화를 냈다가 안 되니 애원하는 듯한 느낌이 몽둥이를 통해 전해졌다.
던전으로 들어온 몬스터들은 여전히 여러 게이트를 향해 사라지고 있었다.
가끔 고등급의 몬스터가 보일 때는 경일의 마음이 급해져 몽둥이질이 더욱 빨라졌다.
어느 순간, 던전 핵에 커다란 동굴 같은 구멍이 생겼다.
경일은 아예 던전 핵으로 들어가 부챗살 모양으로 구멍을 넓히기 시작했다.
“됐다.”
어느덧 던전 핵은 반 정도가 잘려 나가 있었다.
무게를 지탱하는 곳이 반 정도 사라지고 나머지에 쏠리자, 지금이라도 부서질 것 같이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경일은 이제 반대쪽으로 가서 몽둥이질을 시작했다.
몽둥이가 던전 핵을 때리자, 크게 움찔거리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지금 때리는 곳에 던전 핵의 무게가 모두 쏠려 있는 만큼, 기존의 충격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몽둥이질을 이어 갔고, 어느 정도가 되자 더 이상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던전 핵이 스스로 파열되기 시작했다.
거대한 나무가 넘어가듯 ‘파즈즛‘ 하는 깨지는 소리와 함께 던전 핵이 기울기 시작했다.
한 번 시작된 균열은 더욱 커졌고, 밑동이 잘려 나간 나무처럼 ‘쿵‘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마치 폭탄이 터진 듯 먼지구름이 일어나고, 바닥은 지진이 난 듯 크게 흔들렸다.
경일은 던전 핵의 균열이 시작될 때, 이미 멀찌감치 떨어져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던전 핵이 무너져버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남은 감정은 후련함과 안도감이었다.
이 긴 여정이 끝난대서 오는 성취감이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