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급해서 되도록 그녀의 발언을 참아 주고 빨리 이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먼저 건들지는 않되 걸어오는 싸움에 물러서지 않는 게 인생 좌우명 중 하나 아니던가.
“검무(劍舞).”
“뭐?”
연조가 한쪽 눈을 찌푸리며 되물었지만 내 말투는 지극히 담담했다.
“너랑 같아. 칼 든 것만 빼고 사람들 앞에서 눈요깃감이 되면서 춤추는 건 같다고.”
“네가 춤을 춰? 몸속에 박자 감각이라는 게 전혀 없는 네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연조의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비웃음을 참기가 어려운지 얼굴이 흐트러졌으나 과연 이 나라 최고의 미인인지라 구겨진 얼굴도 고왔다. 경멸 어린 웃음을 앞에 두고 심드렁한 어조로 대답했다.
“응. 원래 그랬지. 근데 열흘 전에 바뀌었어. 오라버니로.”
“…서문 공자께서 검무를 춘다고?”
순간 연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달아났다.
“맞아. 오라버니랑 대결했거든, 진 사람이 검무 추기로. 그런데 내가 이겨 버렸지 뭐야.”
‘그 어려운 걸 내가 자꾸 해내네’하고 웃자 연조는 냉랭한 얼굴로 코웃음 치며 말했다.
“네가 이러니 비검(秘劍)이라는 별명이 붙지. 네 말이면 껌뻑 죽는 서문가 덕분에 숨은 칼날이라는 별명까지 얻어 놓고도 성에 안 차? 서문 공자님이 일부러 져 주신 거잖아!”
그녀는 붉게 칠한 입술을 한껏 끌어 올렸다. 표독스러운 눈가에 언뜻 경멸이 스쳤다. 나를 향한 제갈연조의 분노는 언제나 이렇게 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하긴, 이런 그녀를 두고 단 한 번도 져 주지 않는 나 역시 성격 더럽긴 마찬가지일까. 연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 채 나지막하게 꾸짖듯 대답했다.
“일부러든 진짜 실력이 부족해서든 혹은 방심했든. 결론은 딱 하나지, 내 오라버니가 검무를 추게 됐다는 거.”
“그러니까 너를 위해서라고.”
“같은 말 하게 하지 마. 네 말마따나 나도 사람들 앞에서 춤추는 게 싫었어. 그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했을 뿐이야. 그런데 넌 뭘 했지? 인형처럼 하라는 대로 다 해 놓고 이제 와서 쓸데없는 푸념? 화풀이?”
“지금 인형이라고 했어?”
자신에게 가장 약점이 되는 부분을 건드렸는지 제갈연조가 날카롭게 쏘아붙였지만 멈추지 않았다.
“인형 맞잖아? 그렇게 춤추고 노래하는 게 싫었으면 뭐라도 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주어진 팔자에 안주해 놓고 어리광부리며 태평하게 사는 게 도대체 누군데?”
“말조심해. 난 너와 달라. 나한텐 아무것도 없다고!”
연조의 고운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언성이 조금 높아졌기에 포목점의 다른 손님들이 수군거리며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서문 공녀가 성질을 못 참고 또 한판 했다더라.’ 같은 소문이 추가될지도 모르겠지만 무슨 상관일까. 지금 내겐 제갈연조에게 우리 둘의 차이점을 일깨워 주는 게 가장 중요했다.
“주책바가지 오라버니 하나 없는 것 빼곤 다 똑같아. 나에게 형제가 없었다면 아버님과 검을 겨뤘을 거야. 넌 제갈 가주님과 담판을 지어 본 적은 있니? 아니, 네가 이런 불만이 있다고 말해 보기라도 했어?”
“그만해.”
“하긴. 네 말대로 너와 나는 다르지. 그게 바로 네가 아직도 내 발치도 못 따라오는 이유고.”
더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연조를 그대로 두고 먼저 발걸음을 돌렸다. 등 뒤에서 이를 빡빡 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아 효과가 없었다. 포목점을 완전히 나서기 전 연조에게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였다.
“어차피 못 이길 싸움은 이제 그만 좀 걸어. 받아 주는 것도 지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