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친왕은 깊게 고뇌하는 듯 인상을 살짝 찡그린 채 눈을 감았다. 무언가를 참고 있는 것처럼 입매가 조금 떨렸다. 그가 참는 것이 나인지, 내 말 모두인지, 자신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곧 주이환이 천천히 눈을 뜨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소저는 오늘 하루 어땠습니까.”
“예?”
지금까지의 대화 흐름에 전혀 맞지 않는 말이었다. 엉뚱하기까지 한 발언을 되묻자, 남자는 어느새 굳었던 표정을 봄볕처럼 풀고 천천히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저는 온통 생경한 경험뿐이었습니다. 소저의 별명들 덕분에 오랜만에 크게 소리를 내어 웃어 봤습니다. 어떤 날씨를 좋아하는지 처음으로 생각해 봤고, 소저 귀에까지 들어간 제 소문이 무엇인지 조금 궁금해졌고요.”
‘그러고 보니 매화차가 이렇게 맛있는지도 처음 알았네,’ 하며 금친왕의 시선이 물끄러미 식은 찻잔으로 옮겨졌다.
“즐거웠습니다. 무척.”
“…다행이네요.”
“소저는 어땠습니까?”
되돌아오는 질문에 퍽 난감했다. 단순히 소감만 물어도 머리가 아플 판에 당혹스러운 것투성이였으니까. 금친왕이 낯설게 느낀 것들이 내겐 숨 쉬듯 당연한 일이라. 그제야 좋아하는 날씨에도 그렇게나 고심했던가 이해할 수 있었다.
뒤따른 감정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나 역시 이 엉터리 같은 하루가 꽤 즐거웠으니까. 하지만 솔직해지는 건 반칙이었다. 전쟁으로 엮인 너와는 어떤 관계도 될 수 없다고 못 박아 놓고서, 함께 있어 즐거웠다고 말하는 건 일종의 기만이고 이기심 아닌가.
“그냥 뭐….”
평소답지 않게 말을 흘리며 시선을 이리저리로 흩트려 놓았다. 머쓱한 나머지 애꿎은 찻잔만 노려보는데, 웬일인지 주이환에게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시선을 살짝 들어 올리자 날카로운 눈동자와 맞닥뜨렸다. 독수리가 먹잇감을 낚아채듯 도통 시선을 놓아주지 않는 그는 눈빛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설프게 넘어갈 생각 말아요.’
어쩔 수 없었다. 저런 눈빛이라면 거짓을 고해도 금방 간파당할 거다.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최대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 위해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얼렁뚱땅 함께한 인연치고는 재미있었습니다. 적국의 장수와 이렇게 즐겁게 거리를 돌아다녀도 되나, 하고 죄책감이 들 만큼.”
솔직한 대답이었는데도 그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왜! 뭐! 어불성설인지 알면서도 열심히 대답했는데!’
억울한 마음이 들어 작게라도 타박할 요량으로 입을 떼려는데, 금친왕이 조금 더 빨랐다.
“…주이환입니다.”
“예?”
“적국의 장수 말고, 제 이름이요.”
“아는데요?”
뭘 당연한 걸 묻고 있냐는 듯 말투가 매서웠다. 아까 정체를 깐 건 난데 모를 리가 있을까.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주이환은 구김살 하나 없이 부드럽게 말을 덧댔다.
“다음번 만날 때에는 제 이름을 불러 주셨으면 해서요. 그럼 소저께서도 죄책감을 조금은 덜어내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쓴웃음이 샜다. 그렇게 덜 수 있는 죄책감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애석하지만 각자의 배경 같은 건 생각하지 말고 하나의 인격으로 서로를 대하자는 이 속 편한 소리는 내게 닿지 못했다. 가느다란 한숨을 쉬며 작게 혀를 찼다.
한편으로는 우리 사이에 놓인 간극이 잘난 제국의 금친왕도 별 손쓸 도리가 없는 문제인가 싶기도 했다.
“제 죄책감은 그런 얕은수로 줄지 않을뿐더러 말입니다, 아니 잠깐만. 다음이 또 있습니까?”
“다음의 다음도 있는데요.”
남자는 풀이 죽었는지 어깨를 늘어뜨리며 대답했지만, 가볍게 무시하고서는 말을 이었다.
“우연히 볼 수는 있겠지요. 폐하의 탄신일 진연에는 모두가 참여할 테고 그 모두에는 저와 랑도 포함되니까요. 헌데 제가 그 자리에서 랑의 이름을 부를 리는 없는데, 그것 말고 다른 만남이 또 있을 예정입니까?”
‘설마 아니지?’, 라는 얼굴로 쏘아붙이자 주이환이 옅은 미소로 대답했다.
“저는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상대와 하루를 함께 보낼 만큼 정이 깊지 않습니다. 소저가 들은 소문 중 저의 이런 점에 대한 것은 없었습니까? 왠지 모르시는 것 같기에.”
“왜 안 들었겠습니까. 무정한 인간이라고 아주….”
순간 말을 하다 말고 손을 들어 합, 하고 입을 막았다. 상대는 제국의 금친왕이다. 너무 막 나가서는 곤란했다.
“흠흠. 아무튼. 저는 사적으로 랑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두어 번 헛기침으로 머쓱해진 공기를 다스렸다. 다행히도 그는 조금 전 실언이 불쾌하지는 않았는지, 인상을 찡그리는 대신 섭섭한 듯 눈꼬리를 내리며 말했다.
“소저야말로 무정한 거 아닙니까. 이렇게 하루를 함께 보내 놓고 버리시다니요.”
눈에 힘이 확 들어갔다. 하루를 함께 보내다니, 누가 들으면 밤에 정분이라도 난 것처럼 오해할 만한 발언 아닌가.
“제가 거기까지 책임을 느껴야 하는 겁니까? 누가 보면 오해하실 소리를 왜 자꾸 하셔요?”
“오해 사고 싶어서요.”
“랑!”
줄다리기 같은 말씨름 끝에 기어코 씨근대며 그를 다그쳤다. 주이환은 서로 주고받는 얕은 말다툼마저 재미있는지 얼굴에 짓궂은 웃음기가 서렸다. 이대로는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 저의는 분명히 전했습니다. 앞으로 제 뒤도 밟지 마셔요.”
‘그러고 보니 왜 나를 미행했는지도 안 물어봤잖아?’
속으로 조그맣게 짜증을 내는 동안 남자 역시 스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듣지 않으신 것이 있지 않습니까.”
금친왕은 웃음기를 거두기도 전 한 걸음 내 쪽으로 다가와 창가에 가만히 기대섰다. 오후의 태양이 얼굴 옆선을 밝게 물들여 표정 하나하나가 유난히 또렷했다.
“더 들어야 하는 것이 남았습니까?”
“제 눈에 차고도 남는 소저의 얼굴이요.”
“…아.”
그제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눴던 대화를 기억해 내고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내 얼굴을 칭찬하기엔 좀 길다던 그의 말.
‘그게 농담이 아니었다고?’
얼떨떨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시선을 내게 온전히 맞췄다.
“소저는 눈이 가장 예쁩니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마치 별이 그 안에서 노는 것처럼 반짝반짝 빛이 돌아요. 샐쭉 웃을 때 잡히는 두 볼의 보조개가 무척 귀엽고요. 아 그렇지. 시원하게 뻗은 이마와 눈썹 선도 곱습니다.”
“저, 저기 랑….”
‘무슨 칭찬이 이렇게도 구체적인데?’
주이환은 준비해 두었던 낭만적인 시구를 읊는 것처럼 거침이 없었다. 하마터면 ‘지금 제 얘기를 하는 게 맞습니까?’ 하고 물을 뻔할 만큼.
‘칭찬 면역제 같은 건 어디 파는 곳이 없나?’
뒤꽂이를 팔던 상점 앞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이어진 칭찬 폭격에 약이라도 먹고 싶었다.
‘모든 게 저 주둥이 때문이야!’
일단은 입이라도 막아야 홧홧해지는 얼굴을 감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든 그의 말을 저지하기 위해 입을 막아 보려 한 발자국 다가갔다.
그걸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을까. 금친왕은 한 번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눈동자를 호기심으로 가득 채웠다.
“사실 줄곧 해 보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왼쪽 볼 한가운데 있는 작은 점이 먹물을 실수로 떨어뜨린 것 같아 지워 보고 싶었어요.”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마치며 한 손을 올려 내 뺨을 감싸 쥐었다. 순간 벼락을 맞은 듯 그대로 몸이 굳었다.
볼에 살포시 손이 닿는가 싶더니 볼에 콕 박힌 점 하나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내렸다. 피부와 피부가 닿는 촉감이 너무나 또렷했다. 손가락뿐만이 아니었다. 볼 아랫부분에 닿는 손마디나 턱 부분을 스치는 굳은살까지 죄다 야릇했다. 차마 짜릿한 어떤 맛까지 도는 것 같아 급하게 숨을 삼켰다.
“안 지워지네….”
나와는 달리 주이환의 말투는 너무도 평온했다. 작게 혼잣말을 한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곧바로 손을 내린 탓에, 붉게 달아오른 내 얼굴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점인데 애초에 지워질 리가 없잖아, 이 인간아!’
머릿속에서 소리를 빽 지르면서도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얕게 심호흡했다.
“…랑. 정말 소문이랑 영 딴판이신 거 아십니까?”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가볍게 책망했지만 금친왕은 시종일관 모르쇠였다. 두 입을 조금 내밀고는 으쓱거리는 모습이 조금 얄미워서 나도 모르게 신경질을 부렸다.
“무슨 빙장(氷將)이 이렇습니까? 아니면 그 얼음은 얼렸다가 다 여인들에게 주고 다니십니까? 세상에 뭐 이렇게 대놓고 사람을 꼬셔!”
왠지 그의 손바닥에서 곱게도 놀아난 것 같아 심술보가 터졌다. 아니, 심술만은 아닌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하고. 아무튼.
‘더는 정말 안 되겠어.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고 보자.’
그를 한 번 흘겨보고 단박에 걸음을 옮겨 그대로 찻집 밖으로 나가 버리려다 우뚝 멈춰 섰다.
‘나는 을이다, 예의 바른 제후국의 을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마지막 이성을 다 챙겨 주이환을 향해 무릎과 고개를 살짝 굽혀 예를 취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한 남자를 한 번 더 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끝까지 능청스러운 모습에 짜증이 퍼져서, 그대로 찻집의 문턱을 넘어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