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녕 대군, 곧 진단우결은 반달 같은 남자였다. 그는 다부진 인상보다는 부드러운 선을 가진 자였다. 둥근 코끝과 도톰한 아랫입술, 속 쌍꺼풀이 내려앉은 눈매 탓일까. 대군은 사내라는 말보다는 고운 미소년이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렸다.
동시에 어딘가 무감정하고 차가운 인상이 있었다. 남자는 비교적 내게 친절하고 상냥했지만, 가끔 냉혹한 표정도 감추지 않았다. 원녕의 냉철함은 단도로 살갗을 찢어 내는 것처럼 예리했다. 미소년치고는 뿜어내는 싸늘함은 이따금 몹시 가차 없었고 또한 서늘했다.
“소녀가 늦었습니다. 송구합니다.”
공손한 사과에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노을이 내려앉은 붉은빛이 대군의 뺨을 비춰 창백한 인상을 포근하게 만들었다.
“아니다. 불쑥 기별도 없이 찾아온 것은 나이니 개의치 말렴.”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예서 기다리지 마시고 안으로 드시지 그러셨어요.”
“여기에 있어야 몇 걸음이라도 빨리 너를 보지 않겠니.”
듣기 좋은 미성의 단우결은 평온한 바람처럼 잔잔했다.
“정자보다 소녀의 처소가 더 가까운데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하자, 그는 입꼬리를 당겨 즐거운 듯 웃었다. 마치 이렇게 장난을 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삶의 유일한 즐거움인 것처럼.
“그리 농을 치면 이건 다시 가져가야겠구나.”
대군은 비단 보자기로 싼 상자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이게 무엇입니까?”
상자를 받아 들고 비단 천을 풀자 반들반들하게 옻칠한 검정 나무상자가 있었다. 상자의 뚜껑을 열어 안을 들여다봤을 때, 곧 작은 경탄이 입술을 뚫고 흘러나왔다.
“이건 방 나라의 유리 세공함이 아닙니까.”
솔직한 탄성에 흡족해하며 원녕은 짙은 웃음을 지었다. 그는 편히 세공함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내 손에 있던 보자기와 나무상자를 가져갔다.
“이렇게 안까지 깨끗하게 모두 들여다보이는 세공함은 처음입니다.”
“선과 면도 제법 잘 다듬어져 있더구나. 혹여 네 손이 베일까 봐 걱정했거든.”
“또, 또! 소녀는 그렇게 약하지 않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또’라는 말에 원녕의 눈가에 잠시 날이 섰다가 사라졌다. 찰나였기에 미처 눈치채지는 못했으나 갑자기 그가 입을 다물어 버렸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공함에서 눈을 떼고 대군의 안색을 살폈을 때, 단우결은 이미 내가 알던 예의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방국 재상이 배편으로 내게 따로 보내온 것이란다. 네 마음에 들 것 같아 슬쩍 가지고 나왔단다. 잘했지?”
단우결은 조금 허리를 숙여 내 눈을 마주했다. 남자의 까만 눈동자가 어리광을 부리며 자신을 칭찬해 달라고 조르는 것 같았다.
‘이를 어쩐다.’
공녀의 신분으로 일국의 대군에게 칭찬하는 건 당돌함을 넘어 건방진 일이었다. 게다가 원녕이 내미는 모든 선물을 넙죽 받을 만큼 얼굴이 두껍지도 못했고. 결국 조금 어정쩡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송구합니다. 대감께 자꾸 받기만 하는 것 같아서요.”
“칭찬을 받을 줄 알았더니 도리어 애꿎은 사과를 받는구나.”
흥이 깨졌다는 얼굴로 대군은 다시 허리를 곧추세웠다. 남자가 자세를 무르자 긴장이 풀렸는지 안도의 한숨이 가슴속에서 흘러나왔다.
“송구하면 너도 내게 뭐라도 주면 될 게 아니니?”
“소녀가 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요.”
“너밖에 줄 수 없지. 너에게만 받고 싶고.”
어딘가 서늘한 눈을 하고서 단우결은 조금 웃었다. 조금씩 저녁노을이 가라앉는 남자의 옆얼굴에 왠지 모를 예리함이 스쳐 지나갔다.
‘저녁 봄바람이 이렇게 찼나.’
왠지 모를 스산함이 느껴져 어깨가 떨렸다. 대군의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 같아 농담조를 섞어 가볍게 대답했다.
“또 소녀의 마음을 받고 싶다는 농 말씀입니까?”
“언제부터 내 진심이 농이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단우결은 조금 화가 난 것처럼 굴었다. 진했던 미소 대신 달의 반쪽 같은 서늘함이 얼굴을 덮었다.
점심에 있었던 일이 생각나 나 역시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가 정성을 쏟아야 할 상대는 따로 있었으므로. 머리에서는 말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연조에게 충분히 받고 계시지 않습니까.”
주저하듯 흘린 말에 마침내 원녕의 얼굴에서 작은 온기마저 사라졌다. 싸늘해진 분위기 속에서 호안이 말하던 소문을 떠올렸다. 발 없는 말은 반쪽짜리 진실을 담고 있었다. 적어도 제갈연조의 연정은 진짜였다.
연조의 은애는 진단우결 그 자체였다. 만약 그가 일국의 대군이 아니라 장터에서 신발을 파는 상인이었대도 그녀는 남자를 마음에 담았을 거다. 이 때문에 다른 건 몰라도 제갈연조의 연모 하나만큼은 인정하는 편이었다. 난 그토록 누군가를 순수하게 연모해 본 적이 없으니까.
“제갈 세녀의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투기라도 부리는 거니?”
발톱을 감춘 부드러운 음성이 들리자 생각이 중단됐다. 대군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음에도 웃음기를 머금으려 필사적이었다. 투기 같은 이유로 연조의 이름을 말한 게 아님을 알면서도.
“설마요.”
“아깝구나. 왜 매번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을 비껴가는 건지.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닐 테고.”
마치 ‘그렇지?’라고 떠보는 대군의 눈이 매서웠다. 마른 젖을 짜내는 게 이런 심정일까. 아무리 나를 들볶아도 그가 원하는 답은 줄 수 없었기에 답답함 서린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토록 대감을 연모하는 이가 있는데, 왜 자꾸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소녀는 연조에게 죄책감 같은 건 느끼기 싫어요.”
“너야말로 이미 열여섯 무투회날 나의 운명이 되었거늘, 어찌 자꾸 이럴까.”
분노로 그르렁거리면서도 어쩐지 상처받은 눈빛을 한 단우결이 안타까웠다. 또 ‘그날’의 일을 들먹이는가.
“대감. 그날의 일은 대감께서 생각하시는 것만큼 그리 장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진 말을 하는구나. 그 진창에서 함부로 손을 내밀어 놓고.”
대군은 탄식하듯 눈을 감았다. 사방이 깜깜해졌어도 그날의 감각은 어제처럼 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