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반에 너무 빗맞은 화살이 많아서였을까. 너무 점수가 떨어질 것을 염려해 후반부에 말 화살을 잘 쏘는 데에만 주력한 게 화근이었다.
단우결은 두려움에 떨며 왕과 주요 대신들, 세가의 가주와 그들의 일족들이 함께 자리한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미 그들의 웅성거림은 시작된 지 오래였다.
“원녕 대군께서 활에 아주 강하십니다.”
“폐하의 태자 시절보다 더 자질이 훌륭한 것 아닙니까.”
“지난 전쟁 때도 대군의 활약이 컸다 들었습니다.”
원녕은 자신을 바라보는 왕의 시선이 더도 없는 광기와 투기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헉, 허억…, 하, 학….”
단시간에 너무 급격하게 쌓인 압박감 때문에 숨쉬기가 어려웠다. 자신의 운명은 이대로 꺾이는가, 좌절감과 무력감이 온몸을 덮친 순간.
“대군께는 송구하나 폐하와 겨룰 실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맑지만 또랑또랑한 어떤 여자아이의 음색이 수군거리던 관중들의 목소리를 단번에 지웠다.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겨우 고개를 돌리자 목소리의 주인인 여자아이와 정확하게 눈이 맞아 떨어졌다. 잘 닦인 조약돌처럼 반짝반짝한 눈에, 양 볼에 옴폭 팬 보조개가 몹시 사랑스러운 아이. 서문산산이었다.
사실 이전부터 어린 서문산산을 알고 있기는 했다. 이제 열넷이 된 여자아이는 귀족의 필두인 서문가의 일족이었으니까. 다만 거기까지였다. 깊은 친분은 고사하고 겨우 인사치레를 하던 것이 전부였기에, 원녕은 당혹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산아. 그만두어라.”
가주인 서문의곤 역시 적잖이 당황했는지 갑작스럽게 나선 제 딸을 향해 엄하게 타일렀다.
하지만 아이는 예나 지금이나 대쪽 같은 성격의 서문산산이었다. 소녀의 사전에는 ‘일시 정지’라는 말은 없었으므로, 관중들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허공에 대고 말을 멈추지 않았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무투회의 활쏘기 종목 규칙은 말 위에서 활을 쏘는 것이었습니다. 시합 규정이 훨씬 쉬워진 지금 폐하와 대군의 실력을 겨루는 것은 대죄입니다.”
열넷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의 발언에는 이상하게도 어떤 힘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규정이 달랐었지요.”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것은 맞지 않습니까.”
“하지만 원녕 대군의 솜씨가 탁월한 것 역시 사실입니다. 말 위에서도 거뜬할걸요.”
“대 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지요. 무엇보다 대죄라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폐하의 심기라도 건드리는 날엔… 어휴!”
아이의 말에 여러 관중은 조금씩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곧 관료들을 포함한 귀족들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견이 분분해질 무렵. 단우결은 무언가에 홀린 듯 산산의 얼굴을 살폈다.
소녀의 얼굴에는 전장에서나 볼 수 있는 호기가 있었다. 순간 대군의 머릿속에는 소녀의 표정을 가장 잘 설명해 줄 어느 전서(戰書)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명장은 때를 놓치지 않는다.’
“게다가 서문가에서는 궁수 훈련 시에 말을 타며 활을 쏘는 자세의 표본을 폐하의 자세로 삼고 있습니다. 한낱 어린 저도 폐하의 궁술 실력을 알고 있다는 것이 그 답이지요.”
이윽고 산산은 단우결의 눈을 똑바로 직시한 채 잔잔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긴. 아버지로서든, 임금으로서든. 폐하를 넘을 수 있는 대군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넘어지기 시작하는 나무에 선사하는 마지막 도끼질 같은 말이었다. 평생 제 아들이 자신을 넘을까 두려워하던 원휘왕을 향한 충언이기도 했다. 그 충언에 공룡 뼈 같은 의도가 심겨 있는 게 문제였지만.
산산의 말이 끝나자 이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이 그제야 ‘폐하를 따라올 자는 없지요’라며 태도를 바꿨다. 원휘왕 역시 이미 모든 화가 누그러졌는지 표정에 관대함이 드러났다.
여론이 완전히 돌아선 것을 확인한 아이는 앞쪽으로 걸어 나왔다. 곧 왕이 앉아 있는 쪽으로 공손하게 한 번 절하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폐하께서 너무 억울하실 것 같아 소녀가 대신 입을 열고 말았나이다. 부디 용대(容貸)를 베푸소서.”
마무리까지 깜찍했다. 아무리 국왕이라 한들 서문의 여식에게 벌을 내리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제 스스로 나서서 용서를 구하니 왕은 더없이 흔쾌하게 작은 아이의 죄를 덮었다.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폐막으로 흘렀고, 다음 종목인 격투 종목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정신이 나간 채로 대회장 중앙에서 빠져나오자 창녕이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창녕, 너구나.”
단우결은 아우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말로 이루 다 할 수 없는 어떤 감각이 온몸을 훑었다. 몸 안의 피 한 방울까지도 모조리 바뀌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처음 맛보는 감각에 어지러움을 참아 내는 동안 옆에서는 창녕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말을 건넸다.
“큰일 날 뻔하셨습니다. 저는 정말 어찌 되는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내가 괜히 마음을 쓰게 했구나.”
“아닙니다. 그나저나 조금 전 그 아이는 서문가의 여식이지요? 어찌 그리 당돌합니까. 폐하께 그런 진언을 하다니요.”
창녕은 조금 굳은 것 같은 단우결의 표정을 보았지만, 그가 조금 전의 충격에서 이기지 못한 탓이라고 넘겨짚고는 말을 이었다.
“여인답지 않게 하는 행색이 망나니 같다고 들었는데, 대장부감이 아닙니까. 어떤 아이인지 직접 만나 얘기를 좀 나눠 보고 싶습니다.”
“…창녕. 나는 너와 여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겨룰 생각이 없는데.”
“예? 그게 무슨….”
그제야 창녕은 베일 듯 서늘해진 단우결의 표정을 간파했다. 남자는 거기서 말을 멈추고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산산에게 접근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약속을 창녕에게 받아 내고서, 남자는 시선을 흩뜨려 소녀를 찾았다.
‘다시 눈을 마주할 수 있을까.’
아이의 눈동자를 본 순간, 잿빛이었던 세상에 빛과 색이 물들었다. 그 세상에서 둘만이 한 언어를 쓰고 같은 꿈을 꾸는 듯했다.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한 감각을 또 한 번 느끼고 싶었던 걸까. 단우결은 끈질기게 소녀의 얼굴을 좇았지만 무투회에서 다시 시선이 섞일 일은 없었다.
파란만장했던 무투회가 끝나고 대군은 사흘 뒤 서문가를 찾았다. 소녀에게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객실에 앉아 있다가 문을 통해 들어오는 산산을 발견했을 때 또 한 번 해일이 몸을 덮치는 감각을 맛봐야만 했다.
‘왜 이전까지는 이 아이의 가치를 몰라봤을까.’
탄식이 절로 나올 만큼 자그마한 여자아이는 빛보다 찬란했다. 넋이 나갈 뻔한 정신을 겨우 가다듬고 단우결은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는 내가 경황이 없어, 감사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아 들렀단다.”
“감사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오히려 대군께 무례한 언사를 저질렀습니다.”
“아니다. 나를 구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거든. 헌데 너 역시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아버지가 나를 투기해 날마다 숨죽이며 산다는 것을.’
원녕은 차마 뒷말까지는 모두 덧댈 수 없어 탁자 위에 준비된 차를 한 모금 마시는 것으로 언어를 대체했다. 속이 쓰리다 못해 아렸다. 제 입으로 말하자니 진득한 피로감과 자괴감이 몰려오는 듯했다.
“예. 궁의 광기가 성벽 밖에서도 보였기에.”
작게 중얼거리는 어린 산산의 얼굴에도 동정심과 안타까움이 스쳤다.
“고맙구나. 날 위해 애써 주어서.”
“성심에 두지 말아 주세요. 소녀는 단지 그곳에서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게다가 엄청난 것을 한 것도 아니고 몇 마디 거들었을 뿐인걸요.”
“나에겐 대단한 것이었는데.”
단우결의 조금 웃는 얼굴에 산산은 금세 능청스러운 얼굴이 되어 손사래를 치고 말했다.
“더한 것을 했다면 소녀는 지금 땅에 발붙이고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날 저녁부터 아침까지 아버님의 명으로 처소에서도 나오지 못하고 두 끼나 굶는 벌을 받았거든요.”
“내가 가주께 잘 말씀드려 보겠다.”
“아니요. 아버님께서 이제 겨우 잊어버리셨는데 지금 말씀하시면 더 혼이 날 겁니다. 저를 위하신다면 그만 묻어 주셔요.”
아이가 곱다랗게 웃자 볼 양옆에 깊은 보조개가 생기며 대군의 마음을 흔들었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연심에 그는 두어 번의 헛기침으로 설레는 마음을 애써 다스렸다.
“그러고 보니 서문가에서는 정말 궁수 훈련 시에 폐하의 자세를 본으로 하니? 나는 처음 듣는 터라.”
“소녀도 처음 듣습니다.”
“뭐?”
원녕은 어처구니가 없어 되물었지만, 산산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대답했다.
“그러니 소녀를 왕족 능멸죄로 능지처참해 죽이고 싶지 않으시거든 부디 함구해 주셔요.”
“세상에 폐하를 상대로 거짓을 고했단 말이냐!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말을 타며 활을 쏘는 훈련은 전쟁 이후 폐지된 훈련법이라 절대 들키지 않습니다. 설령 폐하께서 우연한 기회에 말을 타는 궁술 훈련을 목격하고 본인의 자세가 아닌 걸 아셔도 굳이 밝히시지 않을 거고요.”
“어째서?”
단우결의 물음에 서문산산은 짓궂은 얼굴로 함박웃음 지으며 말했다.
“본인의 자세와 실력보다 훨씬 좋다고 알려진 것을 굳이 지적하고 바꿔서 무엇하겠습니까?”
남자는 순간 자신이 무엇을 들었는지 귀를 한 번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토록 뻔뻔하게 머리를 굴리고서도 당당하게 미소 짓는 이는 처음이었다.
제정신이 아닌 것은 저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실을 능멸한 처사에도 화는커녕 이상하게도 계속 웃음이 났다.
“하! 하하하!”
뱃속에서부터 웃음이 끓어올라 입을 막아도 웃음이 새는 것이 꼭 미친 사람 같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겨우 웃음을 갈무리할 때쯤에야 단우결은 한숨을 크게 내어 쉴 수 있었다.
사는 것 같았다. 이제야 조금 삶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동시에 원녕 대군은 그날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다. 서문산산만이 그의 유일한 구원이자 반려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