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 대감!”
“…산아.”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그날 일을… 떠올리고 있었단다.”
역시.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약한 한숨을 뱉어 냈다. 당사자인 내겐 기억에도 없는 일화이건만, 단우결은 절대 잊을 수 없다는 듯 보다 큰 의미를 부여했다. 과거의 어느 날, 그는 술에 한껏 취해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나는 그날 너를 향한 연심을 굳혔단다.’
원녕은 조금 쑥스러운 얼굴이었으나 정작 그 얘기를 들은 내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가득했다. 무투회에서의 일은 사람과 사람 간의 연을 잇는 하나의 일화가 될 수는 있다. 누군가를 새롭게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도 맞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원녕 대군은 그런 일화로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하지는 않을 텐데.’
의구심을 갖는 부분이 바로 여기였다. 낮에 호안이 호들갑을 떨면서 말하는 소문을 모두 긍정하지 않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제갈연조가 대군을 사모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나를 향한 대군의 마음은 정말 연심인가?’
딱 잘라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어딘가 찜찜한 기분도 남았고.
“후회하고 있느냐. 그날 나를 도와준걸.”
시선을 들자 세상의 슬픔을 모두 짊어진 것 같은 얼굴로 단우결이 있었다. 이번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절대요.”
선왕인 원휘왕의 광기를 되짚어 봤을 때, 만약 그날 단우결을 구하지 않았다면 지금 그는 이렇게 살아 있지 못했을 거다. 그러니 후회는 없었다. 다만 원녕의 감정이 무척 유감스러울 뿐.
나는 어디까지나 벗으로서 그를 좋아했다. 대군이 겪은 고통을 몹시 안타깝게 여기고 있고, 내 능력이 닿는 선에서 할 수 있는 걸 해 주고 싶기도 하다. 단지 이 마음은 연심이 아닌 충정인 게 흠이었다.
한편 단호한 부정이었음에도 대군의 얼굴엔 괴로움이 넘쳤다.
“하긴. 상처받은 짐승에게 손을 내미는 일은 꽤 위험천만하다는 걸 그때의 너는 몰랐겠지.”
“대감. 어찌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이렇게 내 마음을 네 손바닥에 얹어 놓은 채 쥐지도 않을 거면서, 나를 왜 도왔니.”
몹시 상처받은 얼굴로 그는 흡사 피를 뱉듯 헐떡거렸다. 나 역시 원녕을 너무 몰아세우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다.
“소녀는 할 수 있는 것을 두고도 못 본 척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대감이 아닌 다른 분이어도 똑같이 했을 겁니다.”
심지어 나는 그날의 일을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내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도움 하나가 단우결에게는 일생일대의 일화가 되어 그의 모든 순간을 좀먹고 있었다. 벗으로서 내게 정을 쏟는 걸 이제는 막아야 했다.
“대감. 저를 대감의 성심에 두기 위해 마음을 해하지 말아 주세요.”
“다른 이, 다른 이라.”
순간 대군의 눈빛이 광증을 입은 듯 날카롭게 빛났다. 절절한 부탁은 깡그리 잊은 채, 머리에 오직 ‘다른 이’라는 말만 빼곡하게 들어선 것일까. 남자는 몸을 딱딱하게 굳히고 으르렁거렸다.
“산이 네가 오늘 내 화를 돋우려 작정을 했구나.”
짓이겨 뱉은 글자 마디마다 음산함이 묻어 있어 소름이 돋았다.
“과거는 왜곡하지 말아야지. 그건 나였고, 영원히 나일 수밖에 없을 거란다.”
슬픔과 분노가 짓눌린 미소는 어딘가 처연했다.
대군과 나 사이를 얕은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완연하게 낮은 온도를 품은 봄바람은 마치 겨울이라도 되는 양 매섭고 거칠었다.
‘오늘의 긴 대화는 결국 과거의 일이 얼마나 그에게 중요한지를 다시금 확인한 것이었나.’
착잡한 마음이 들어 속으로 혀를 찼다. 단우결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무척 즐거웠지만, 가끔 우리는 서로의 견해차를 좁히지 못해 찝찝한 상태로 헤어지는 날도 많았다.
“날이 찹니다, 대감. 이만 환궁하시지요.”
더 대화를 끌다간 꼭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았다. 그만큼 대군은 무척 위험해 보였다.
공손히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춘 후 손에 있던 유리 세공함을 그에게 다시 내밀었다. 우리의 대화는 합을 보지 못했지만, 적어도 선물이라도 돌려주어야 어떤 감정들이 씻겨 갈 것 같았다. 제갈연조를 향한 이상한 죄책감이라든가, 받을 수 없는 단우결의 연심 같은 것들이.
서늘했던 대군의 얼굴에 잠시 슬픔이 안개비처럼 서렸다가 사라졌다. 곧 원녕은 비린 미소를 한 입 베어 물고서는 내 손에 놓인 세공함을 옆으로 툭 쳤다.
‘쨍그랑!’
순식간이었다. 그토록 정교하고 아름다웠던 우리 세공함이 투명한 빛을 발하며 땅에 닿자마자 산산이 조각났다. 찰나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종잡을 수도, 믿을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완전한 박살 난 세공함을 허망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게 고작이었다.
눈을 들어 그를 책망할 생각으로 입을 열려는 순간 본능처럼 몸이 굳었다.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은 남자의 표정은 어떤 때보다 잔혹했다.
“네가 쥐지 않으니 폐물(廢物)일 수밖에.”
세공함을 떨어뜨린 이유를 묻는 내 눈빛에 그가 빈정거렸다. 단우결은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 보다 가까이 내 앞에 섰다. 그의 발바닥에서 잘게 깨진 유리 조각이 비명을 지르듯 잘그락거렸다. 남자는 허리를 조금 굽혀 조용히 귓속말을 전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니.”
어깨가 자그맣게 떨렸다. 귓가에 앉은 대군의 가느다란 숨소리 때문이 아니라, 바닥에 처참하게 부서진 세공함이 마치 내 모습 같아 보였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