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연가 (12)화 (12/126)

사실 서문일천은 원녕 대군에 대해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귓등으로 들은 소문에 의하면 단우결이 제 누이를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전부였으니까. 주책바가지의 샛별인 그로서는 나라의 고귀한 분이 가만히 두어도 귀여운 산산을 좋아한다는 데 별로 막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바뀐 것은 올해 신년제 때였다. 일 년의 풍요와 행운을 기원하는 신년제 전날, 서문가는 단우결이 보낸 선물 상자들로 거짓말을 조금 보태 터질 뻔했다.

선물들에는 3일간의 신년제 동안 산산이 입을 옷이며 장신구들이 즐비했다. 일천이 거슬렸던 것은 ‘아직 혼인조차 올리지 않은 여인의 옷까지 대군이 신경 쓰느냐’는 것이 아니었다. 옷과 장신구가 평소 산산이 즐겨 입던 것과 조금씩 비껴 있었다. 정확하게는 원녕의 취향이 어느 정도 섞인 느낌이었다. 비단보에 쌓인 상자들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자, 그의 누이가 와서 말을 붙였다.

“왜요, 오라버님?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아니. 너는….”

그는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하마터면 ‘너는 이것으로 괜찮으냐’고 물을 뻔했으니까. 옷과 장신구에 드러난 그의 취향, 그리고 그 취향을 만인이 모이는 신년제에서 과시하듯 너에게 입히고 싶어 하는 대군의 정복욕이 정말 괜찮은 거냐고.

이런 여러 의미가 함축된 말을 머리 좋은 제 누이가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눈치 빠른 산산이 어떤 의도들을 알아채기 전에 서둘러 다른 말로 돌려야만 했다.

“…너는 마음에 드니?”

“예. 의복에 섞인 비단결이나 장신구에 쓰인 천연석도 모두 특상품입니다. 이전 선물들을 받기 부담스러워 한 번 돌려보냈더니 더 좋은 것들로 다시 챙겨 보내셨네요.”

“…그래.”

“다만 감이 너무 겹겹이 덧대 있어서 갑갑할 것 같긴 합니다. 소매 기장도 그렇고 치맛단도 길어서 활동성도 좀 떨어질 것 같고요.”

‘네 살갗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싫어하는 거겠지.’

일천은 산산이 들리지 않게 가만히 혀를 찼다. 아무래도 제 누이는 자신의 곰 같은 촉보다 뭉툭한 촉을 가진 것 같았다. 아니면 같은 남자끼리의 감이라는 게 발동한 걸 수도 있다.

“네 취향과 영 다른 것이 온 건 아니냐?”

“예. 색깔 같은 건 평소 제가 즐겨 입던 것으로 보내 주셨어요. 아무래도 서로 오래 보아 와서 그런지,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나 봐요.”

“하긴. 그 머리 좋은 분이 어련할까.”

“오라버니. 자신이 여인들에 대해 무심하다고 세상 모든 사내가 여인의 취향에 무심하다고 생각하지 마셔요.”

일천이 빈정대는 말투로 말하자 산산 역시 지지 않고 가볍게 그를 나무랐다.

‘처음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색이나 옷 모양을 밀어 넣으면 거부감이 든다는 걸 알았을 거다.’

그러니 노골적으로 자신의 저의를 드러내는 행동은 하지 않겠지, 하고 일천은 총명하나 어딘지 모르게 잔혹한 얼굴의 진단우결의 얼굴을 떠올렸다. 한편으로는 자기 생각은 알지도 못하고, 옷감을 이리저리 쓸어 보는 산산을 보니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착잡했다.

결국 신년제 내내 산산은 단우결이 보내 준 의복을 입고 장신구를 착용했다. 일각에서는 제갈 세녀에게도 원녕이 선물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하지만 제갈연조의 옷에서는 단우결의 취향도, 거기에 숨은 어떤 소유욕도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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