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연가 (14)화 (14/126)

제후국 제일의 월병 맛집들을 생각하자 입에서 침이 고였다. 월병을 먹을 생각에 가시 돋친 입매가 풀어져 헤실헤실 웃고 있는 줄은, 그걸 주이환이 묘한 얼굴로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희당이면 팥 월병이고 화정이면 고구마 앙금 월병이 딱인데!’

한창 먹을 생각을 모락모락 피우고 있을 무렵. 남자가 조금 서운하다는 투로 말했다.

“미인계보다 당과라니. 어쩐지 먹을 것에 진 느낌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제 얼굴이 어떻게 쓰이는지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조금 전에 공녀의 경계를 풀려고 썼는데요, 미인계.”

남자는 눈꼬리를 살짝 접어 웃었다. 과연 저 웃음에 놀아난 여자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대충 감이 올 정도로 눈을 홀리는 뭔가가 있었다.

“헌데 미인계보다 월병의 효과가 훨씬 더 좋네요. 섭섭해라.”

“…송구합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렇게까지 말씀드렸으니 다음번엔 꼭 넘어와 주시겠지요.”

금친왕은 유달리 반짝반짝 윤이 나는 얼굴로 곱게 웃었다. 누가 봐도 웃는 얼굴이었지만 조금 한기가 느껴졌다.

‘약간 삐진 것 같은 건 기분 탓인가?’

떨떠름한 얼굴로 볼을 살살 긁었다. 주이환이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신뢰도가 부족해서일까, 그의 표정 하나하나에 설레기보다는 나도 모르게 의심이 앞섰다.

“뭐, 굳이 별명 같은 단서가 아니더라도 공녀가 누군지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누구의 뒤를 밟는지도 모르고 미행을 자처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예?”

당황한 기색을 거두지 못한 채 날카롭게 되물었다. 표정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았다. 그에 비해 금친왕은 너무도 평온한 얼굴이었기에 전혀 저의를 짐작할 수 없었다.

‘이거 진짜 뭐 하자는 거지?’

냉탕과 온탕을 몇 번이나 오간 것처럼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별명 같은 것으로 농을 치더니 어느새 이야기의 핵심을 건드리고 있었다. 긴장의 끈을 쥐락펴락 하는 그의 화법이 익숙하지는 않았기에 약간은 버거웠다.

“허면 묻겠습니다.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일국의 친왕께서 세녀의 뒤를 밟으시다니 필시 어떤 의도가 있지 않겠습니까.”

머릿속에 의도에 대한 예시들이 휙휙 지나갔다. 미행과 납치, 협박, 외교 분쟁, 전쟁 같은 험악한 단어들이 줄을 이었다.

“보고 싶어서요.”

주이환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오히려 질문이 너무 쉽다는 듯 의기양양하기까지 했다.

‘저자의 어디까지를, 또한 얼마나 믿어야 할까.’

밀려드는 피로함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나를 한 여인으로서 여기고 있는 걸까. 그렇다고 하기에 우리의 만남은 너무나 짧았고 남자의 호의는 갑작스러웠다.

‘의도를 전혀 알 수 없는 상대와의 말씨름이 이렇게 지치는 거였나.’

차라리 어떤 외교나 정치 목적을 가지고 만나는 쪽이 훨씬 편했다. 타국의, 그것도 한때 전쟁을 함께 했던 나라의 친왕과 인격적인 만남 자체가 몹시 불편했고 양심에도 찔렸다. 내게서 별다른 대답이 없자 금친왕이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믿지 않으시는군요? 진짠데.”

“믿는 쪽이 어리석은 것이겠지요.”

“정말입니다. 공녀를 쭉 만나고 싶었거든요. 6년 전에 우리가 처음 만난 후로 지금까지.”

금친왕의 말 중 앞부분은 귓등으로 씹어 넘기다가 6년 전이라는 대목에서 눈이 크게 떠졌다. 동공에 떠오른 질문을 읽은 그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어째 좀 전보다 한숨의 깊이가 조금 더 묵직해진 건 기분 탓일까.

“역시 잊으셨습니까? 나중에 다시 만날 약속까지 나누었는데. 공녀야말로 무정하십니다.”

“농치지 마십시오. 소녀는 기억에 없습니다.”

“6년 전에 이 나라에서는 종전 협정이 있었지요. 이건 기억하시지요?”

나를 놀리려는 듯 금친왕은 씩 웃음을 지었다.

‘그날이 어떤 날인데. 미쳤다고 그걸 잊겠냐!’

어처구니가 없어서 속으로 이가 갈렸다. 성질이 제대로 돋아난 표정으로 그를 째려보고 있자니, 주이환은 서둘러 웃음을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와 형님이신 태자 저하를 모시고 저 역시 협정날 기 제후국의 궐에 있었지요. 협정 서약 날에는 공녀의 부친이신 서문가의 가주께서도 함께 참석해 계신 까닭에, 공녀도 입궁했었고요.”

“예. 궁에 있었던 것은 기억합니다. 협정이 끝난 뒤에 열린 연회에서, 고기 조림이 그대로 얹히는 통에 꼬박 이틀을 앓아누웠거든요.”

“이번엔 고기 조림에 제 존재감이 묻힌 거로군요?”

“…다시 한번 송구합니다.”

왠지 그의 이마에 가느다란 힘줄이 빡 돋아난 것 같았지만 애써 기분 탓으로 넘겼다.

여러 가지 의미로 한번 보면 기억에서 쉽게 지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그를 잊었다는 생각에 이번엔 정말 미안해졌다. 정수리가 보일 정도로 깊이 고개를 숙이자 남자가 말을 이었다.

“본래 협정식에는 저 역시 참석해야 했으나 조금 불편한 자리였거든요. 그래서 식장이 열리는 궁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누가 눈치를 주는 것도 아닌데 어찌 불편해하셨어요?”

주이환은 가만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옛꿈이라도 꾸는 듯 막연한 안개가 자욱했다.

“글쎄요. 어제 공녀의 말씀대로 제가 거둔 목숨들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르지요.”

“장수가 피를 보는 것은 숙명과도 같지 않습니까?”

“숙명이라. 과연 무가의 공녀다운 발상이군요.”

“무장의 길을 택한 순간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할 죄책감이 있다는 걸 각오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장수라고 하기엔 미숙했거든요. 전부 다.”

금친왕의 표정은 비 오기 직전 날씨처럼 무척 흐렸다. 은연중에 그가 말하는 ‘다’라는 것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이 함축돼 있음을 직감했다.

“그런 제게 그날 공녀께서는 많은 걸 알려 주셨답니다.”

주이환은 왠지 어두워진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마음이었는지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녀가요?”

“예. 지금처럼 공녀께서는 제가 약한 질문들만 꼬집어서 하시는 통에 아주 진땀이 났어요.”

“저하께 약한 질문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네요.”

“그대 앞에서 저는 한없이 약해지니까요.”

“…아 좀!”

이제 좀 진지해져 보려는데, 또다시 시작된 ‘주이환의 끼 부리기’에 작게 짜증을 부렸다.

금친왕은 심통이 난 내 표정이 재밌다는 듯 빙글거리며 웃었다. 그러다 시퍼런 도끼눈과 마주치자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하고 멋쩍은 헛기침을 두어 번 뱉었다.

“그날 이후 간간이 공녀 생각이 났습니다. 사람이 좋게 변하는 데에는 영겁이 걸린다지만 나쁘게 변하기까지는 한순간이지요. 하물며 6년 아닙니까. 그 오랜 시간을 거쳐 공녀께서 어찌 계실지 궁금했고 또 보고 싶었습니다.”

“보고 싶다고 그리 남의 뒤를 밟으시면….”

책망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포물점에서 만난 것은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원래는 직접 이곳으로 찾아오려 했습니다.”

“정말 우연인 게 맞습니까? 다분히 수상하신 것 알고 계시지요?”

눈을 가늘게 뜨면서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자 주이환이 이번만큼은 들으라는 듯이 크게 한숨을 지었다.

“세상에 어떤 사내가 6년을 기다린 만남을 멋없게 장터 한가운데서 하겠습니까?”

“아….”

어정쩡하게 대답하긴 했지만 머리에는 아직도 의심이 가득했다. 다른 것은 다 제쳐 두더라도 금친왕은 세상에 흔하고 넘치는 ‘어떤 사내’가 아니었으니까.

난제를 만난 듯 어려운 표정이 된 내게 그는 조금 허리를 굽혔다. 이윽고 책상에 팔꿈치를 댄 상태로 손등으로 턱을 괴며 단번에 거리를 좁혔다. 어딘가에서 물기 없는 여름 햇빛 같은 냄새가 났다. 전장을 누비는 남자의 몸에서 나는 향이라고 하기엔 더없이 다정하고 포근했다.

갑자기 좁혀진 거리에 당황해 상체를 뒤로 물릴 새도 없이 그가 먼저 입을 뗐다.

“공녀. 솔직하게 말씀해 보세요.”

“뭐, 뭘 말입니까?”

“남녀 사이의 애정 관계 같은 거 잘 모르시지요?”

금친왕의 표정은 조금 짓궂었고 분명 입술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농담 따위가 아니라는 듯 몹시 단단했다.

주이환의 말에는 사람을 매료시키는 어떤 힘이 있었다. 대답을, 그것도 거짓이 아닌 진실을 독촉받는 기분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하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왜 대답을 해 줘야 하지?’

곱씹어 보면 우리들은 특별한 애정 관계에 놓이지 않았다. 이런 사적인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 줘야 할 의무도 없었고. 생각이 거듭되자 오히려 분해져서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그걸 왜 소녀가 알려 드려야 하지요?”

“잘 모르시거든 제가 가르쳐 드리려고요. 하나씩, 천천히.”

왠지 그 가르침이라는 게 대단히 위험하고 진득해 보였다. 거미줄에 온몸을 묶인 사람처럼 금친왕의 시선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애써 입을 열었다.

“잘 알면요?”

“공녀께 알려 드린 자를 발본색원해야지요.”

“찾아서 무얼 하시게요?”

“자신의 연적을 가만히 내버려 두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남자는 눈을 맞춘 채로 웃었지만 정작 뱉는 말에는 찬기가 가득해 주변 공기가 싸늘했다.

‘연적이라고?’

나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조금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로 마음먹은 걸까. 연적이라는 한 단어가 주이환이 내게 품은 호의를 ‘연모’라고 말하고 있었다. 적잖이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게다가 발본색원이라니.

‘지금이라도 얌전히 잘 모른다고 자수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으로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중.

“하긴 발본색원까지 할 필요도 없지요. 대군들이 머무는 궁으로 가면 될 테니.”

어딘가 비웃음이 담긴 주이환의 옆모습은 잘 벼른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언뜻 그의 동공 속에서 ‘진단우결’이라는 이름을 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떤 것도 답해 주기가 어려웠다. 그가 던진 연적이라는 말이 아직 머리에서 소화가 안 돼 체한 듯 머물러 있었으니까.

“그런가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대답을 내놓자, 금친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냉랭한 얼굴로 입꼬리를 당겼다. 남자는 숙였던 허리를 다시 세우면서 나와 거리를 두었다. 주이환의 시선이 먼 곳으로 떨어졌다.

“예전엔 말입니다. 누가 먼저냐, 이런 것이 참 유치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매달릴 게 없어 순서라도 잡고 늘어지는 게 꼴사납기도 했고. 헌데 역시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가 봅니다. 막상 내가 그 주인공이 되니 어떤 심정인지 알 것 같습니다.”

“순서라니 그게 무슨….”

되묻는 목소리에 주이환은 시선을 내게로 다시 옮겨왔다. 다시 마주한 남자의 눈에는 정염이 타닥타닥 모닥불처럼 타고 있었다.

“내가 먼저였다고. 그대를 마음에 둔 거.”

금친왕의 눈빛은 어떤 때보다도 진지하고 위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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