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이를 갈면서 궐의 복도를 걷는 중 연조는 숨을 삼켰다. 멀리서 단우결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가슴에 품었던 분노와 짜증이 한 번에 가라앉으며 원녕의 맑은 얼굴만이 마음에 가득 들어찼다.
‘얼굴만 봐도 행복할 수 있다니, 일생을 함께한다면 얼마나 천국 같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연조는 거의 뛰다시피 걸음을 재촉해 단우결의 앞을 가로막았다.
대군은 갑자기 자신을 막고 서는 여자의 등장에 잠시 미간을 찌푸리다가, 상대가 제갈연조임을 알고서는 가벼운 웃음을 만들어 냈다.
“제갈 공녀. 이곳에는 어ㅉ….”
“이틀 뒤면 폐하의 탄신제 아닙니까. 미리 공연장을 확인하고자 들렀습니다.”
남자는 순간 자신의 말이 가로막혔음을 알고 잠시 입매를 굳혔다. 여전히 연조가 홍조를 띤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내 표정을 풀었다. 그는 가면처럼 잘 꾸며진 얼굴로 연조에게 말했다.
“공녀의 책임감은 언제 봐도 놀랍습니다. 이토록 그대가 신경을 쓰니 공연이 더더욱 기대되는군요.”
“…책임감이 없는 이가 있어 소녀가 더 힘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긴 연조의 얼굴엔 억울함이 가득했다. 절세가인의 아련하면서도 사연 깊은 표정은, 그 표정을 짓게 한 어떤 사람이든 패 주고 싶게 만드는 위력을 지녔다. 원녕은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 이유를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서문 공녀 말입니다. 본래 세녀가 해야 할 군무를 서문 공자께서 춘다고 합니다. 아픈 것도 아니고,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요.”
“아아.”
단우결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군무를 추는 사람이 서문일천이라는 소문이 돌았을 때 내심 좋아했던 그다. 누구에게도 산산의 춤추는 모습 같은 건 보여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무책임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셔요?”
“글쎄요. 본래 탄신일 진연에는 각자가 가장 자신 있는 것을 내보이는 것이 본 의미 아닙니까. 서문 세녀는….”
“자신이 잘하지 못한다고 다른 이에게 군무를 미루는 건 충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다시 한번 연조가 남자의 말을 막았다. 귀엽게 토라지며 눈을 말똥말똥 뜨는 것이 무척 사랑스러웠지만, 막상 그녀의 시선을 한눈에 받는 단우결은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공녀께서 유독 서문 세녀에게 엄격한 건 아닙니까.”
“소녀는 이유 없이 사람을 싫어하지 않아요. 다 이유가 있다고요. 하지만….”
말꼬리를 늘이는 연조에게 단우결이 눈짓으로 묻자 그녀는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대감께서 서문 공녀만을 너무 편애하시니 소녀가 질투가 나서 그렇습니다.”
제갈연조는 제 얼굴을 퍽 잘 쓰는 편이었다. 그래서 바로 지금 같은 때, 어떻게 하면 결례 섞인 발언을 곱게 포장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입을 귀엽게 내밀면서도 큰 눈을 살짝 흘겨 떴다. 더불어 자신이 결코 화가 난 것은 아님을 알리기 위해 단우결의 소매 끝을 살짝 잡았다. 대군은 그녀의 손에 잡힌 제 소매를 빤히 쳐다보고 별 반응이 없이 입을 열었다.
“편애라니요.”
“언제나 편애하시잖아요. 지금도 보셔요. 서문 세녀와는 사석에서 편히 하대하시지만 제게는 이리 꼬박꼬박 존대하시고….”
“공녀를 존중하는 의미입니다.”
“저번에는 두 분만 도화서 들을 데리고 계곡으로 피서를 하러 가셨지요. 불꽃 축제가 있던 날도 같이 계시고, 또….”
연조가 칭얼거리듯 말을 늘리자 원녕은 끝내 얼굴에 모든 표정을 지웠다. 모든 인내가 끊어진 탓에 냉기가 흐르는 눈빛을 감출 수 없었다.
단우결은 몹시 짜증스러웠다. 가뜩이나 지난번 산산의 입에서 연조의 이름이 나온 이후로 제갈 이야기만 나오면 화증이 일었다. 그런데 오늘은 본인이 제 앞에서 몇 번이나 말을 막고 정인을 폄훼하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으므로.
‘이런 이에게 죄책감을 느끼다니. 산이 너, 내게 혼이 좀 나야겠구나.’
연조에게 향한 정인의 마음이 너무나 아까워 기가 찼다. 남자는 한껏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눈꼬리를 내린 제갈연조를 조용히 바라봤다.
“공녀.”
그는 여자를 향해 한기 어린 목소리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그녀가 주춤거리자, 대군은 제 소매를 붙잡고 있는 연조의 손을 잡아 뜯듯 떼 냈다.
“아… 대, 대감!”
여자는 어떤 신호를 감지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흡사 어린 토끼가 두려움에 떠는 것 같은 모양새라, 웬만하면 넘어가 주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원녕의 인내심은 끊어진 지 오래였다.
“공녀는 나에게 애정을 맡겨 놓기라도 했습니까. 혹은 내가 공녀에게도 똑같이 대해야 할 의무라도 있습니까.”
“아니, 아닙니다. 그건 아니지만….”
“애당초 편애라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편애란 무릇 같은 사랑을 받아야 하는 두 존재 중 한쪽에만 치우쳐 사랑을 주는 것을 말하지요.”
“그, 그렇긴… 한데….”
울 것처럼 말을 더듬는 연조를 향해 남자는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여자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귀에 속삭였다.
“헌데 공녀는 처음부터 내게 사랑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거든.”
말을 뱉는 단우결의 표정은 무척 아름다웠고, 그만큼 가차 없었다. 제갈연조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기억 속에서 언제나 상냥하고 다정했던 대군이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녀가 잔뜩 굳어 있는 사이 남자는 천천히 허리를 폈다. 곧 다시 잘 짜 맞춰진 가면에 자신을 끼워 넣듯, 상냥하고 해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 내게 애정을 구하지 마세요. 공녀의 마음이 너무 아플까 염려됩니다.”
하지만 연조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건 경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