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대군은 금친왕의 이야기를 꺼낼 때 내게서 표정 변화가 있는지 유심히 살피는 눈치였다. 이윽고 안색에서 별 동요가 없다는 걸 깨닫고는 어딘지 안심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자가 세가들을 방문하고 다닌 것은 알고 있느냐.”
“예.”
“내 눈엔 금친왕이 세가를 통해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탄신제보다 일주일이나 빨리, 그것도 황태자보다 먼저 이 나라를 온 게 이상하니까.”
“그러… 네요.”
“게다가 일국의 사절단이 왕궁에 기거하기는커녕 일개 귀족의 집을 방문하고 다니는 게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고.”
“예.”
얌전히 대답만 하니 싫증이라도 난 걸까. 원녕은 예리한 얼굴로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런데 네 핑계를 대더구나, 산아.”
“예?”
갑자기 내 이름이 나오자 깜짝 놀라 언성을 높였다. 그제야 원하던 반응이 나온 건지 단우결의 입매에는 승리의 미소가 잠시 스치고 지나갔다.
“네게 개인적인 관심이 있는 것처럼 말하던데. 설마 내 연심도 믿지 못하는 네가 적국의 장수 말에 놀아날 리는 없을 테고.”
그러면서 대군은 내 얼굴을 핥듯이 쳐다봤다. 절대 놀아나서는 안 된다는 협박과 같은 말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하긴. 다분히 의심스럽긴 하나 그 역시 일국의 금친왕 아니냐. 정말 네게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너를 이용하려는 속셈에 가깝겠지.”
“어찌 단언하십니까?”
“생각해 보렴. 네가 이 나라의 비검인데, 너를 회유해 서문가 전체를 쥐고 흔들고 싶은 거 아니겠니. 마침 서문가는 군권도 있으니 일석이조겠구나.”
단우결의 말에 잠시 머리가 굳은 것처럼 멍해졌다. 누군가가 가슴을 칼로 내리그은 것처럼 쓰라렸다. 어느새인가 나도 모르게 그에게 마음을 조금씩 열고 있었던 걸까. 아픔과 혼란으로 가득 찬 마음을 감추며 최대한 무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
“허나 서문가뿐만 아니라 다른 세가들도 방문했다 들었습니다.”
“산아, 자존심이 무척 상할 테지만, 금친왕에게는 처음부터 네가 목적이었단다.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다만, 제갈연조는 내게 마음이 있고 독고해완은 유약한 데다 서문가보다 위세가 높지도 않지. 그러니 네가 적격이고, 곧 목표였다는 뜻이란다.”
“아….”
“거짓이 아니란다. 그의 입에서 네가 목적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궁인들에게라도 물어보면 알 것이다.”
“묻지 않습니다. 대감을 믿어요.”
“옳지, 착하다.”
담백한 대답에 원녕은 흡사 내 머리를 쓰다듬을 기세로 뿌듯한 미소를 만면에 띠웠다. 반대로 내 마음은 점점 먹구름이 가득해졌다. 애써 차분한 표정을 지어냈으나, 그를 따라 마주 웃어 줄 만큼의 여유는 차마 발휘하지 못했다.
“분명 금친왕이 네게 남긴 말 중에는 너만을 특정하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 역시 처음부터 네가 목표였다는 뜻이 되겠지.”
어쩐지 무척 신이 나 보이는 단우결의 말끝으로 어떤 일화가 생각났다. 내 기억에는 없어도 주이환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던 종전 협정 날의 첫 만남.
‘이게 또 이렇게 이어지나.’
속이 아렸다. 금친왕 때문에 썩을 속이 내게 조금이라도 있었다는 것에 스스로 놀랄 때쯤. 대군은 죽어 가는 사냥감에 단검을 꽂아 넣듯 입을 열었다.
“그러니 적장에게 기회를 주어서는 아니 된다, 산아. 절대 그를 믿어서는 안 돼.”
거역하지 못할 위압감을 뿜어내는 원녕을 앞에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는 것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