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연가 (22)화 (22/126)

“그럼 또 우연으로 우리가 만났다고 말씀하고 싶으신 겁니까?”

“예. 우연이긴 한데, 제가 조금 더 노력한 우연이지요.”

노력한다고 만들어지는 우연도 세상에 있나. 의심 어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주이환은 씩 웃으면서 찻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연치곤 제가 좀 오래 여기서 기다렸습니다. 이 차, 다섯 잔째거든요.”

순간 할 말을 잃고 그를 멍하니 쳐다봤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계속 나를 기다렸다는 거야?’

남자의 저의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 생각한 바를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올지 어찌 아시고 여기서 기다리고 계셨다는 겁니까?”

“몰랐는데요?”

“헛걸음이면 어찌하시려고요.”

“어찌하지 않습니다. 그냥 제가 조금 더 기다린 게 되는 것뿐입니다. 기다린 걸로 생색낼 생각도 없고요.”

“말도 안 돼.”

“말이 왜 안 됩니까. 실제 공녀는 오시지 않았습니까. 제 바람대로.”

금친왕은 슬쩍 얄미운 미소를 지었다. 맘 같아서는 그의 팔뚝을 조금 꼬집어 주고 싶었으나, 가볍게 한숨을 짓는 것으로 불만을 대신했다.

어떤 마음으로 나를 기다렸을까. 오리라는 확신도 없는 채로, 오가는 행인 중 혹여 내 얼굴이 있나 고개를 내밀고 시선을 굴렸을까. 다섯 잔째 비우는 매화차가 질리지는 않았을까. 딱딱한 방바닥에 눌러앉은 엉덩이가 아팠을 텐데.

‘이런 정성 때문의 그의 연정을 진실이라고 믿고 싶은지도 모른다.’

곧 깨달았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를 마음속에 들여놓고 있었음을. 마음을 자각하고 나니 더욱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결심을 굳힌 채 조금은 흐린 미소로 입술을 열었다.

“일개 귀족의 딸에게 쏟는 마음이 너무 과하지 않으십니까. 사람 하나 얻겠다고 이렇게까지 정성을 들이시다니요.”

“공녀는 일개 귀족의 딸도, 그냥 사람도 아닙니다. 제겐 유일하고 앞으로도 그럴 분이지요.”

“그런 말씀을 듣고 싶은 게 아닙니다. 소녀는, …저를 통해 더 얻고자 하시는 게 있는지를 묻는 겁니다.”

주이환은 봄바람처럼 상냥했던 미소를 거뒀다. 조금씩 무정해지는 남자의 표정을 바라보며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새삼 그에게 미안했다. 모르는 척 넘어가 주지 못하는 내 성격이, 그래서 먼저 못된 말을 하게 만드는 이 상황들이 전부 다.

“분명 소녀를 얻어 상 제국에 이익이 되는 게 있는 것이겠지요. 혹은 서문가를 어떤 목적으로 움직이는 데에 소녀가 필요했든가요.”

“공녀께 보인 제 마음이 그렇게밖에 전해지지 않았습니까.”

금친왕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달리 무척 떨렸다. 그는 차마 내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겠다는 듯 시선을 땅에 떨어뜨렸다.

“순진하지 못해 송구합니다. 랑이 보여 주신 연정을 의심으로 답해, 또한 송구합니다. 허나 제게 연정과 믿음은 같은 가닥입니다. 믿을 수 있어야 마음을 열 수 있어요. 제게 보인 고운 성심은 너무나 귀한 것이나, 랑께서 무엇을 생각하시는지 알 수 없는 이상. 성심은 바다에 뜬 나룻배나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를 억지로 감내하듯 남자는 눈을 꽉 감았다. 나를 향한 섭섭함이나 분노가 잘못된 말로 나가 버릴까 봐 필사적으로 막아내는 듯, 남자의 표정은 무척 고통스러웠다.

한참을 눈감고 있던 그가 비로소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얼굴을 마주 댄 금친왕의 표정은 큰 상처를 입은 짐승처럼 아픔으로 흘러넘쳤다.

“공녀.”

그의 음색에 다정함은 없었다. 지독히도 삭막하고 건조한, 그러니까 소문을 듣고 ‘금친왕의 목소리는 이럴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그 모양 그대로였다.

“제가 정말 무언가를 위해 그대가 필요했다면,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장터가 아니라 고문장이었을 겁니다.”

주이환의 얼굴은 한겨울의 찬 바람처럼 지극히 냉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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