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야 눈을 가렸던 천을 풀고 몸을 돌려 연조를 향해 걸어갔다. 눈앞에는 각양각색의 꽃 패들이 무작위로 널려 있었다. 제갈연조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녀. 가만 보면 참 단순하십니다.”
비웃음 섞인 음성에 연조는 불쾌한 듯 눈썹을 살짝 치켜떴다. 그러면서도 도발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응수했다.
“서문 공녀께서는 제 춤 실력을 부러워하시더니, 이제는 명예까지 흠집 내시려는 군요.”
“그럴 리가요. 근거가 있는걸요.”
나는 꽃 패 위에 손을 올려 두고 어떤 것이 그녀가 고른 것인지 짐작해 보려는 듯 헤아렸다.
“짧은 순간에 제후국의 국화를 선택할 만큼 충의가 넘치지는 않으시니 백일홍은 아닐 테고.”
손에서 백일홍 꽃 패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늘이 폐하의 탄신일인 것보다 본인의 공연일임이 더 중요했을 테니, 폐하께서 좋아하시는 수선화도 아닐 것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허면 평소에 공녀가 좋아하는 꽃인 모란일까요?”
순간 연조의 얼굴에 승리의 표정이 스쳤다. 자신이 생각한 덫에 걸려들었다는 듯 제법 뿌듯하기까지 했다. 왠지 그녀의 얼굴에 소금을 끼얹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말을 이었다.
“공녀의 가장 큰 실책은 너무 이른 축배를 든다는 것입니다.”
“무슨…!”
“예상 가능한 범위 아닙니까. 공녀가 좋아하는 꽃이 뭔지 뻔히 아는 제게, 모란꽃을 고르는 건 너무 쉽게 답을 주는 것이니까요.”
“너무 정답을 질질 끄는 거 아닙니까?”
왠지 여유가 없어진 표정으로 앙칼지게 묻는 제갈연조를 향해 작은 미소를 지었다.
“결국 짧은 순간 머리를 쥐어 짜낸 거라곤… 제가 좋아하는 꽃을 골라 허를 찌르자는 계략이었겠지요.”
말을 마친 내 손에는 백합 꽃 패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우와!”
“정답입니다!”
“서쪽에서는 참으로 신묘한 것이 유행하고 있군요.”
사람들은 놀람의 탄성을 내지르며 저마다 어떻게 정답을 맞힐 수 있었는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심지어 누군가는 내 눈을 가린 천을 살펴보기까지 했다.
한편 제갈연조의 표정은 입에 흙을 물고 씹은 사람처럼 일그러졌다. 그녀는 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대느라 어깨가 들썩거렸다. 원수의 분노는 곧 나의 기쁨이라, 그녀의 표정을 마음껏 감상했다. 잠시 뒤 군중을 진정시키려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이겼으니 공녀께서 셈을 치르셔야지요.”
“…필사해야 하는 책이 무엇입니까.”
씹어뱉듯 묻는 연조에게 백합 꽃 패의 뒷장을 보이며 말했다.
“여투금지책(女妬禁止冊)입니다. 먼 옛날 신건대제께서 쓰신 책이지요. 여인의 투기에 대해 특히 조심하고 삼가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청중들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제갈연조의 표정은 반대로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감히 자신에게 여인의 됨됨이에 대해 가르치려 든다고 생각했을까. 그녀의 얼굴이 수치심과 분노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름다운 얼굴로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표정이 흉악해진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곧 연조만 들을 수 있도록 귓속말로 속삭였다.
“한 다섯 번쯤 필사하면 질투심으로 남을 모함하는 너의 모난 성격도 좀 나아지지 않겠니?”
내 속삭임을 듣고 억지로 울분을 집어삼키는 연조를 뒤로한 채, 다시 무대 중앙으로 발걸음을 옮겨 입을 뗐다.
“이번에는 폐하의 탄신일을 축하드리는 마술을 보여 드리겠사옵니다.”
나는 천천히 진 귀빈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거부할 수 없는 미소와 압력으로 힘을 담아 말했다.
“귀빈 마마, 소녀를 좀 도와주십시오.”
‘다음은 너다, 진 귀빈.’
웃고 있는 입속에서 조용히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