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연가 (31)화 (31/126)

승무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서서히 떴다. 알고 있다고만 말하기엔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제 말마따나 왕위가 ‘얻어걸린’ 이 왕은, 한때 자신의 왕권을 세우기 위해 사력을 다했었다.

자신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원녕 대군을 포섭하려고도 하고, 탐관오리가 돼 버린 대소 신료들의 뜻을 꺾어 보려고도 했다.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곧 무력함과 좌절감이 그를 덮쳤고, 술독에 빠져 한참을 허우적거렸다. 그 결과 세간에는 함공왕은 나라 정무를 팽개친 왕으로 알려져 버렸다.

‘이런 뒷이야기들을 몰랐다면 속이 편했을까.’

독고승무는 새삼 제 가문의 처지가 무척 애석했다. 왕을 위한 직속 집단이기 때문에, 독고라는 성씨를 달고 사는 이상 왕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알 수밖에 없었으므로.

“소신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나이다.”

“그대의 청대로 서문의곤에 대한 의심은 일단 접어 두지. 대신 세가 말고 다른 대신들의 동태도 빠짐없이 살펴라.”

“예, 폐하.”

“또한 독고 공자는 원녕 대군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조금이라도 수상한 점이 보이거든 즉시 내게 고하라.”

“명을 받들겠나이다.”

고개를 조아리는 두 신하를 앞에 두고 평우찬은 잠시 생각할 거리가 있는 듯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어떤 결의가 남자의 동공에 가득 실려 있었다.

“대군부를 경계하고 왕권을 세우기 위해서는 왕세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왕세자의 정통성은 왕비에게서 태어날 때 가장 견고해지지.”

“허면 현재 비어 있는 왕비 자리에 간택령을 내리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그래. 누가 간택될지는 모르겠으나 짐의 힘이 될 수 있는 여인이었으면 좋겠군.”

순간 평우찬의 머리에는 한 여자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웃을 때 옴폭 팬 두 보조개, 재빠르게 돌아가는 머리 회전, 제 아비를 닮아 조금은 다혈질인 그녀.

“…서문가의 공녀라든가.”

서문산산을 곁에 둔다면 정치 세력도 얻을 수 있을뿐더러, 경계 대상 1호인 단우결의 열망도 꺾을 수 있었다. 어쩐지 뒷부분이 조금 더 끌리는 건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한편 예상 밖의 이름에 독고영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평우찬이 영을 보며 어쩐지 놀리는 듯한 가느다란 웃음을 지었다.

“혹시 차기 독고 가주의 가주빈이 될 여인이었던가.”

“당치 않사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보고 자란 누이인지라 조금 놀란 것뿐이옵니다.”

영이 공손히 대답하자 함공왕 역시 별 뜻이 없다는 듯 가벼운 어조를 이어 갔다.

“짐 역시 생각이 난 것뿐이지 그녀를 왕비로 삼겠다는 건 아니다. 애초에 처녀 단자를 넣지 않으면 뽑고 싶어도 그럴 수 없으니.”

“헌데 세녀 중 서문가의 공녀가 적합한 이유라도….”

가주가 조심스럽게 묻자 평우찬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짐이 그대의 여식인 독고해완을 점찍지 않아 서운했는가.”

“소신 어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나이까.”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는 가주를 보고서 왕은 흥이 깨졌다는 듯 짧게 혀를 찼다. 하긴. 독고승무는 그런 사람이었다. 질릴 정도로 충직하고 말주변도 얼마 없는 자. 그래서 놀릴 생각으로 농담을 던져도 지금처럼 진지하게 응수를 하니 있는 재미도 떨어질 수밖에.

평우찬은 가만히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온 서문산산을 생각했다. 어째서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이 쑥 나왔을까. 건방진 조카님을 누르기 위해서라는 건 일종의 변명임을 본능적으로 그는 안다.

“…재밌어서.”

“예?”

심각했던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말에 독고 가주는 바보처럼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곁에 두면 질리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희로애락이 분명한 표정. 분명 궁지에 빠졌는데도 태연하게 마법을 부리는 천연덕스러움. 깜찍하지만 꽤 효과가 큰 잔꾀. 의외로 영악하지만은 않은 순수함까지.

‘세상에 그런 외계인 같은 여자가 어디 흔한가.’

서문산산을 생각하는 함공왕의 얼굴에는 어느새 봄결 닮은 웃음이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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