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죄책감이 마음을 흔들었다. 나 자신도 불쑥불쑥 찾아오는 의심과 경계의 벽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몰라서 생긴 감정이었다.
그럼에도 내겐 뭐든 한 수가 아니라 열 수라도 접겠다고 말하는 주이환이 퍽 사랑스러워서. 그의 발걸음에 맞춰 나 역시 조금 더 후해지자는 마음에. 용기를 내서 부끄러움 담은 한 마디를 얹었다.
“만족하신다니, 다음엔 이마 말고 볼 정도는 허락해 드리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요.”
고개를 살살 저으며 말하자 금친왕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이내 눈을 녹이는 봄 햇살처럼 사르르 얼굴이 풀어지더니, 여러 번 본 적 있는 끼 부리는 표정으로 변했다.
“지금 시점에서 볼은 허락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묻고, 두 배로 갑니다.”
“누구 맘대로 두 배를….”
당황한 내가 말을 맺을 새도 없이 입술에 생경한 감촉이 와 닿았다. 이마에서 느꼈던 그 감촉과 같은 것임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문고리가 맞물리는 것처럼 두 입술이 폭신하고 알맞게 자리를 찾았다. 이마에서 느꼈던 감촉이 입술로 옮겨 간 것뿐인데도 모든 신경이 입술에 쏠린 것처럼 선득했다.
입맞춤은 무척 다정하면서도 다급했다. 어딘가 절박한 움직임에 그가 내 머리와 허리를 받치고 있는지도 몰랐다.
쉽게 나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듯 주이환의 입술은 무척 끈질겼다. 상체를 젖히려고 하면 벌을 주려는 듯 쫓아와 내 숨을 가로챘다. 덕분에 입술 사이로 들고 나는 숨이 얕고 밭았다. 부드럽게 휘감은 감각 또한 아찔하고도 오싹했다.
“음, 아….”
간신히 떨어진 입술 밖으로 작은 신음이 터졌다. 주이환은 열띤 눈빛으로 손을 들어 조금 부어오른 내 입술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열기가 바짝 오른 입술에 차가운 감각이 반가워 입을 조금 벌리자 오히려 그의 어깨가 살짝 요동쳤다.
“…저를 부추기지 마세요.”
“소녀가 언제 그랬다고.”
무엇인가를 잔뜩 억누른 듯한 목소리였다. 조금 쉰 것 같은 음색 끝에는 짐승의 울림 같은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있었다.
“다른 이들 앞에서 이런 표정을 지으시면 정말로 아니 됩니다.”
“이런 표정이라니요?”
“숨은 달고 얼굴도 빨갛고, 입술은 더 그렇고.”
“…누가 그리 만들었는데.”
볼을 부풀리며 툴툴거리자 주이환은 샌 웃음을 머금고는 내 볼을 살짝 건드렸다. 언젠가 그가 지워 보고 싶어 엄지로 문지르던 점이 있는 부분이었다.
“다음번에 만날 땐 남은 진도도 더 뺄 테니 그리 아세요.”
“당분간은 외교 일정도 없을 텐데, 벌써부터 다음번 만날 때를 기약하시다니 너무 성급한 거 아닙니까?”
“명분이야 만들면 되는 것을요. 공녀께서는 그사이 지금처럼 건강하고 즐겁게 지내시면 됩니다.”
공사다망한 제국의 친왕이 타국에 오는 것이 그리 말처럼 쉬울까. 그럼에도 주이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술을 끌어당겨 웃었다. 나 역시 살그머니 마주 웃어 주자 순간 뭔가가 기억난 듯 남자는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아. 너무 어여쁘지는 마세요. 무슨 일이 생길까 진짜 겁납니다.”
아무것도 무서울 것 없이 전장을 누비던 남자의 약한 소리는 기어이 내게 파도같이 맑은 웃음을 짓게 했다.
우리 둘 사이로 봄바람이 한차례 지나갔다. 처음 만났을 때 만개했던 복사꽃이 어느새 바람에 나부끼며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