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하니 축제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멀리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귀빈 마마. 준비가 모두 끝났사옵니다.”
후궁 중 한 명인 한빈이 귀빈에게 말하자 그녀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헌데 폐하께서는 어디 계시느냐.”
“사람이 많아 피로하시다며 먼저 막사로 들어가셨나이다.”
한빈의 대답에 귀빈은 자그맣게 눈살을 찌푸리더니 지루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머리가 좀 아프구나. 들어가 쉬어야겠으니 한빈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꽃술을 마시며 웃어 젖히던 진 귀빈이 인상을 찡그리며 이마를 짚었다. 연기치고는 너무나 성의가 없어 비웃음이 흘렀다.
보아하니 자신이 눈치를 봐야 하는 왕도 없으니 축제를 관할하기는 귀찮고, 대충 천막에서 등 비비고 놀자는 심보가 보였다.
“축제를 준비한 총관이 자리를 비우면 쓰나. 직무 유기 아닌가.”
날로 먹자는 태도에 빈정거리며 조용히 말했다. 혼잣말이라고 하기엔 조금 컸을까.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었음에도 대쪽같이 내 말을 얻어들은 진 귀빈이 표독스럽게 대답했다.
“만약 내가 자리를 비워 무슨 일이라도 생기거든, 그것은 이 연회장 호위하는 서문 공자의 잘못이지 본 빈의 실책이겠는가.”
상대를 특정하지는 않았지만, 교묘히 날 향한 비난의 말이 섞여 있었다. 왕실 교위인 오라버니가 축제의 호위로 있는 이상, 어떤 불미스러운 일도 일어나지 말게 하라는 협박으로도 들렸다. 다만 그 협박이라는 게 왠지 애들 장난처럼 우습게 느껴져, 입꼬리를 당긴 채 침묵했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마마.”
“봄이어도 아직 바람이 차니 어서 들어가시옵소서.”
그러자 되레 옆에 있는 후궁들이 머쓱해졌는지 하나둘 말을 보태며 귀빈을 재촉했다. 진 귀빈은 멀리서 내 쪽을 바라보며 한 번 비웃는 걸 잊지 않고는, 후궁들의 말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마련된 천막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 뒤. 감미로운 꽃향기와 함께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매년 찾아 주던 나비가 없으니 올해 서문가의 꽃은 혼자겠구나.”
목소리와는 달리 내용은 세상 고소하다는 내용이 가득했다.
이제는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새삼 지겹다는 표정으로 제갈연조를 쳐다봤다. 어느 때보다 아름답게 치장한 그녀는 가면을 쓴 많은 남성의 열띤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일단 꽃인 기억은 없고, 나비가 오길 바란 적이 없는데 알아서 온 것이니 부러워하지도 말고.”
“그래? 그럼 널 위해서 날아오는 나비도 올 수 없게 도와줘야겠구나.”
심술궂은 얼굴로 웃은 연조는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언성을 높였다.
“여기 있는 서문 공녀께서 오늘 대단히 몸 상태가 좋지 않으시니, 아무래도 좀 앉아서 쉬셔야겠군요.”
그러면서 연조는 가면을 써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남자들을 향해 경고하듯 또박또박 말을 덧붙였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굳이 춤을 권하는 자는 제 명예를 걸고 엄히 잘못을 따질 겁니다.”
여자는 빨갛게 칠한 입술을 끌어당겨 화사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어찌나 기세등등한지 나와 눈을 마주쳤던 몇몇 가면 쓴 남성들이 서둘러 시선을 돌리는 게 느껴졌다.
춤을 추기 위해 모인 공자와 공녀 모두 귀족의 여식들이지만 제갈가에 비하면 세력이 부족하다. 그러니 권력을 등에 업고 잘못을 따질 거라고 콧대를 세운 채 으스대는 거겠지.
작태가 하도 같잖아서 숫제 웃음이 터졌다. 왕비가 없다고 네 몫을 챙기기 바쁜 귀빈이나, 자신이 절대적인 권력자도 아니면서 제힘을 과시하려는 연조나. 한마디를 해 주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을 것 같아서, 얼굴에 안쓰러운 미소를 가득 올린 채 입을 열었다.
“그래. 네게도 오늘 같은 날이 있어야 좀 낫겠지. 매년 나와 원녕 대군이 춤을 추는 걸 보기만 하다가 올해는 그 꼴을 안 보게 됐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겠어?”
금기어나 다름없는 단우결을 입에 올리자 진하게 웃던 연조의 얼굴에 빗금이 서렸다.
“오늘은 집에서 이 안 갈아도 돼 연조야. 나도 너무 좋다.”
“무슨…!”
“매년 꽃 축제날 밤에 네 이 가는 소리가 도성을 채우고 넘치는 거 모르지? 우리 집까지 들려서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얄미운 빈정거림이 효과를 발했는지 주위에서는 몇몇 웃음이 터졌다. 킥킥거리는 쪽으로 연조가 고개를 홱 돌리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재빨리 흩어졌다.
“이따위 말로 날 골탕 먹이려는 모양인데, 상관없어. 누구의 선택도 받지 못한 네가 오늘 가장 비참할 테니까.”
“나 이건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건데 말이야. 넌 아무한테서도 선택을 못 받으면 자존심이 상해? 진짜?”
이번엔 맹세코 궁금해서 묻는 말이었다. 연조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고도의 작전이 진짜로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의 발언으로 가장 마음이 상했는지 고운 미간을 팍 찌푸렸다.
“난 다른 사람의 관심 같은 건 신경도 안 쓴다는 네 그 태도가 세상에서 제일 짜증 나.”
씹어뱉듯 힐난한 연조는 그대로 등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가 버렸다. 그녀 역시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사실 지금이 가장 무안하고 머쓱했다.
“그냥 물어본 거잖아, 진짜….”
정말 억울한 마음에 제갈연조의 등에 대고 말했지만 아무런 대답도 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