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연가 (37)화 (37/126)

“아, 아야!”

생각보다 입술을 짓이겨 씹은 모양이었다. 천이 입술에 닿을 때마다 몹시 따가워 나도 모르게 신음이 터졌다. 인상을 찡그리는 모습을 보며 왕은 작게 혀를 찼다. 거리가 무척 가까운 까닭에 입 속에 삼킨 그의 소리가 왠지 생생하게 들려왔다.

“주인이 함부로 쓰는 입술이구나.”

“아까는 너무 놀라서… 경황이 없어 사죄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폐하. 황공하옵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사과를 하려 고개를 숙이려고 하자 평우찬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은 말고.”

그는 자꾸 숙이려는 내 턱을 고정하듯 한 손으로 잡았다. 그러고는 아예 편안하게 자세를 잡고 이리저리 얼굴을 돌려 가며 입술을 닦아 냈다.

마음껏 입술을 지분거린 그는 등을 돌려 이번엔 찢어진 입술에 바를 약을 가지고 왔다. 사람이 염치가 있지, 아무리 그래도 임금에게 약까지 얻어 받는 건 정말 아니다 싶어서 황급히 그를 막았다.

“폐하, 큰 상처가 아니니 소녀가 나중에 혼자 하겠사옵니다. 부디 성수를 거두어 주소서.”

“이제는 그대마저 나를 막는가.”

“아니, 소녀는 너무 황공한 나머지….”

“이 작은 것 하나 짐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으니 왕이라 해도 참 하찮은 존재가 아니냐.”

자신을 폄훼하는 말이었다. 평우찬의 얼굴엔 씁쓸한 자괴감이 넘실거렸기에, 신하의 도리로서 본능적으로 아니라고 말해야 함을 알았다. 헌데 그러려면 약을 발라 주는 그의 손길을 거부해서는 안 됐다. 내 염치는 또 어찌해야 하는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답답해 습관적으로 입술을 깨 물으려고 입을 벌린 순간, 임금은 눈을 반짝 뜨더니 순식간에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내 입술에 갖다 댔다. 마치 애꿎은 입술은 그만 괴롭히고 대신 자신의 손가락이라도 희생양으로 삼으라는 듯이.

“헉, 폐하!”

하마터면 그의 엄지손가락을 물 뻔한 걸 간발의 차로 멈출 수 있었다. 입술 끝에 살짝 베여 물 뻔한 손가락의 감촉이 젖어 들었다.

“짐이 겨우 피를 닦아 놓은 것을 도로 엉망으로 만들 셈이냐.”

“황공하옵니다.”

“공녀의 입에서 이제 송구는 그만 듣고 싶은데.”

평우찬은 재미가 없다는 듯 툭툭 말을 뱉으면서도, 손으로는 열심히 약을 작은 수저로 떠서 입술에 조심스럽게 발랐다.

“소녀 아직 입에 담지 못한 황공이 더 많이 남아 있사온데….”

“얼마나 남아 있는지 들어나 보지.”

“감히 폐하께 무릎을 꿇으라 말씀드렸고, 사람을 잘못 골랐다고도 지적했습니다. 또한 몇 번인가 폐하의 발을 몇 번인가 밟은 것도 같아….”

말을 하면서도 정말이지 혀를 깨물고 싶었다. 오늘 살아서 돌아가게 된다면 필시 조상님들께서 도운 것이니, 위패에 천 배라도 올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왕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가벼운 어투로 대답했다.

“굳이 공녀의 잘못이 될 것은 없다. 무릎을 꿇는 것은 규칙이었고 사람을 잘못 골랐다는 말은 짐을 위한 그대의 염려이니까. 또한 공녀가 코끼리가 아닌 이상 두어 번쯤 짐의 발등을 밟았다 하여 부서지지는 않는다.”

마지막 부분에서 왠지 모를 웃음기를 느낄 수 있었다. 생각보다 왕이 많이 노여워하지는 않은 것 같아 안심하면서도 혹시 몰라 조심스럽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허면 소녀가 받아야 할 벌은….”

“무슨 벌? 짐이 언제 그대에게 벌을 내린다 한 적이 있던가.”

전혀 그럴 의도가 없어 보이는 왕을 앞에다 두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허면 소녀를 부르신 연유가….”

“약 발라 주려고.”

임금은 친절하게도 손에 든 약병과 수저를 반짝반짝 흔들었다. 순간 아기들이 재롱을 떠는 모습과 겹쳐 보였기에, 웃음을 참기 위해 볼에 힘을 꽉 줘야만 했다.

이윽고 평우찬은 약을 다 발랐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뒤를 돌아 있는 틈을 타 약이 치덕치덕 묻은 입술을 더듬었다.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너무 약을 많이 발라서 거의 먹을 뻔했다. 딱 봐도 타인을 치료해 주는 게 영 서툰 사람이었다.

‘잘하지도 못하면서 왜 손수 챙기고 난리야, 부담스럽게.’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부담스러운 건 또 가닥이 달랐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생각보다 왕은 노하지 않았고 벌도 없었으며, 목숨까지 무사히 건졌으니 더는 바랄 게 없었다. 그도 내게서 용무를 끝냈으니 이제 나가 봐도 되나 싶어 절을 올리려는 찰나.

“헌데 공녀는 궁금하지도 않은가 보군.”

갑자기 불쑥 왕의 물음이 날아들었다. 난데없는 질문에 살짝 미간에 빗금을 그었다. 약병을 모두 정리한 평우찬이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표범 같은 포식자가 사냥감에게 다가가듯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함께 춤을 췄을 때만큼이나 거리가 좁혀지자, 함공왕은 허리를 조금 맞춰 귓속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어찌 짐이 그대에게 춤을 청했는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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