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연가 (38)화 (38/126)

평우찬은 잠시 대답이 없다가 다시 무덤덤한 표정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군이 그대를 특별하게 여기는 이유가 지혜일지도 모르겠군.”

칭찬의 감언이었으나 반대로 남자의 눈은 싸늘했다. 마치 나의 지혜가 단우결에게 쓰인다면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암묵적으로 춤 신청이 원녕 대군을 도발하려는 것임을 시인한 남자를 두고 한 번 더 물을 수밖에 없었다.

“소녀 우매하여 폐하께 한 가지만 더 여쭈어도 되겠나이까.”

“얼마든지.”

자신에게 이다지도 따박따박 무언가를 묻는 여자는 없어 새로웠을까. 평우찬은 불쾌한 기색 없이 느긋한 자세로 내 질문을 윤허했다.

“어느 정도의 정치 긴장은 필요한 것이라지만, 필요 이상의 도발이나 갈등이 오히려 폐하의 성심을 해치는 일이 되지 않을까 염려되옵니다.”

게다가 정치 구도로 봤을 때, 애석하지만 현재 왕보다는 대군부의 세력이 더 큰 상태였다. 저보다 덩치 큰 짐승을 굳이 도발해서 좋을 게 없지 않은가.

품은 의구심을 이해했는지 평우찬은 일리가 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고개를 숙이고 내 얼굴을 마주한 왕은 조금 따뜻한 표정이 돼 있었다. 단단하게 잠겼던 입매도 조금 풀어져 있었다.

“…대군이 그대를 마음에 둔 이유가 무엇보다 다정 때문일지도 모르겠구나.”

“예?”

“짐의 걱정을 해 준 게 아닌가?”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혹시 자신감 과다 망증에 걸린 건 아닌가.’

순간 표정 관리가 전혀 안 돼서 이를 수습하기 위해 얼른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묵례를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약간 웃음을 짓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기가 차서 코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단우결은 집착 광증, 평우찬은 자신감 과대 망증이라니.

‘이쯤 되면 진씨 왕가 모두 다 정신병자는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할 거 같은데.’

물론. 아주 약간의 걱정이 섞이긴 했다. 하지만 그건 이길 확률이 희박한 싸움을 먼저 거는 사람에 대한 예우 차원이었지, 잘난 임금에 대한 인류애가 발휘된 건 정말 아니었는데.

‘저렇게 자신하고 있는데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조용히 질려 하고 있을 무렵, 이번엔 임금이 먼저 입을 뗐다.

“원녕이 냉담해 보여도 사실은 무척 다혈질인 구석이 있다. 기분파에다가 앞뒤 구분 못 하고 질러 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고.”

‘폐하. 지금 너무 대놓고 조카님 흉을 보는 것 같은데요.’

뭐 이런 성의 없는 뒷담화가 다 있나 싶었다. 하지만 가만히 뜯어보면 죄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임금의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머릿속에서 상황 구분 못 하고 주이환과 설전을 벌였던 일이나 홧김에 유리 세공함을 산산조각 내버린 행적들이 줄을 이었으므로.

“그러니 또 혹시 아느냐. 그대를 건드렸다고 눈이 돌아서 짐에게 틈을 보일지.”

“소녀를 너무 과대평가하신 듯하옵니다. 대군께 그 정도로 큰 의미를 지니는 자는 아니 옵니다.”

공손한 대답을 듣고는 평우찬은 가볍게 혀를 찼다.

“우리 조카님이 생각보다 추진력이 약한 건가, 아니면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 공녀의 고집이 센 건가?”

“둘 다 아닌… ㄷ….”

“짐이 좋을 대로 생각하지. 앞쪽이 좋겠군.”

함공왕은 또 제 좋을 대로 내 말을 확 끊었다. 둘 다 아니라고 소심하게 대답하려던 대답은 어쩔 수 없이 입 안으로 쏙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뭐. 눈이 돌 정도는 아니더라도 심기를 건드릴 수 있다면 그것대로 소소한 화풀이가 아니냐. 그런 목적들을 다 떠나서, 춤 자체는 즐거웠고.”

임금의 눈에는 잠시 추억을 되짚는 듯 아련함이 스쳤다. 조금 전 일인데도 무척 오래된 일을 헤집는 것처럼. 건조했던 그의 표정에 한 줄기 미소가 잠시 돋았다가 뿌리를 내리지는 못하고 금세 사그라들었다.

‘이 남자는 마음껏 웃어 본 적이 있긴 한 걸까.’

가면을 쓰고서도 입을 막던 모습이 생각나 조금 마음이 쓰였다. 그나마도 춤을 춘 시간이 즐거웠다니 세가의 공녀로서 다행인 일이었다.

물어볼 것도 다 물어봤겠다, 이제 정말 막사를 나설 때가 된 것 같았다. 마지막 인사를 올리려는데 평우찬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공녀는 어째 짐이 묻기를 바라는 질문에는 지나치는 습관이 있군.”

“황공하옵니다.”

“어째서 이 모든 걸 그대에게 알려 주는지 궁금하지 않으냐.”

이번엔 내 표정이 조금 딱딱해졌다.

‘왜 궁금하지 않았겠어.’

사실 단우결을 도발하기 위해 나를 이용했다는 말은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됐다. 앞뒤 모든 이유까지 설명하지 않아도 될 일을, 임금은 너무나도 친절히 알려 주었으므로.

하지만 덮는 게 현명했다. 임금의 진의가 무엇인지는 아직은 모르겠으나 두 숙부와 조카가 벌이고 있는 건 왕궁 암투였다. 이런 일엔 한 번 발을 잘못 담그면 발목이 잘릴 게 아니라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는 법이니까.

이렇게 굳이 묻어 두려 한 걸 짚어서 알려 주는 함공왕이 예뻐 보일 리는 없었다. 내게서 아무 말이 없자 왕은 기어이 꼭 말해 주고 싶었는지 다시금 말을 이었다.

“공녀의 입장을 분명히 하라는 뜻이었다.”

“예?

“공녀가 원녕 대군의 특이점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짐처럼 그걸 이용하려는 자가 있다는 것 역시 알아두라고.”

임금은 자신이 악당이라도 되는 듯 말했다. 마치 유괴범이 아이에게 ‘나를 조심하라’고 가르치는 것처럼. 이상한 왕의 말에서 염려를 느낀 것은 내 착각일까.

“아니, 역시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정치란 그런 것이니까.”

임금의 얼굴에 어떤 초조함이 물들었다. 이윽고 평우찬은 그늘 섞인 눈동자로 말을 맺었다.

“다음번에 볼 때는 그대가 대군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짐에게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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